77화 Chapter 76
「으어어…….」
7권좌의 마신 아몬.
조금 전과는 달리 녀석은 흐리멍덩한 눈빛을 한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 녀석을 향하여 힘을 조절하여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지만.
퍼억!
녀석은 반응하지 못한 채 그대로 일격을 허용했다.
「…….」
고통에 찬 비명도, 그렇다고 어떠한 반응도 없다.
마치 넋을 놓은 것처럼, 아니 흔한 말로 혼이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멍하니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고작 이 정도 고통과 공포에 심상이 잡아먹혔나? 네 녀석의 그릇도 어지간하구나.”
녀석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이유.
그것은 수천 번이나 반복되는 죽음을 겪으며 녀석의 심상이 무의식 속으로 도망쳐 버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녀석의 의식이 날아갈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빠른(?) 시간에 무너질 줄이야.
‘수천 번이 아니라 수십만 번의 죽음과 고통 속에서 싸웠건만.’
나도 녀석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한낱 인간에 불과했던 나는 마신들의 온갖 권능과 고문에 저항해야만 했고, 수십만 번이나 되는 정신적인 죽음을 맞이했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처럼 도망치지 않았다.
죽음의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섰고.
지속되는 고문을 악착같이 버텨 냈다.
그런데 녀석은 어떤가.
초월체라는 것이 고작해야 수천 번의 죽음을 견뎌 내지 못한 채 굴복하고 만 것이다.
참으로 실망스러운 결과일 수밖에 없다.
“그 정도도 견디지 못하는 게 뭐? 위대한 존재? 아주 지랄이 났네, 지랄이 났어.”
퍽!
멍하니 서 있는 녀석에게 발길질했다.
별다른 힘이 담기지 않은 공격. 하지만 이미 의식이 사라져 버린 녀석은 그 간단한 동작도 피하지 못한 채 바닥을 뒹굴었다.
퍼퍼퍽!
바닥에 쓰러진 녀석을 수차례 짓밟았다.
피가 터지고, 타액이 흘러나와 지면을 적신다.
조금 전과는 달리 아몬은 기적과도 같은 재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한하다고 생각한 고통의 정수가 어느새 바닥이 나 버렸기 때문이다.
스으으-
주변을 맴도는 이 빌어먹을 힘은 결계만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정도만 남아 겨우 형상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합!”
쨍그랑!
그리고 겨우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결계도 내 기합성에 의해 소멸하고 말았다.
그제야 원래의 공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헙!”
나와 아몬을 발견한 난쟁이 3황자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귀, 귀인이시여. 갑자기 사라져 깜짝 놀랐습니다.”
조금 전과는 달리 경외감이 깃든 눈빛으로 바라보는 3황자.
타이탄을 비롯하여 미지의 존재인 마신마저도 제압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당연히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으악! 이, 이자는…….”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아몬을 본 녀석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괜찮아. 이 겁쟁이 녀석의 의식은 사라졌으니까.”
그리 말하며 아몬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
의기양양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달리 엉망진창으로 당한 채로 여전히 쓰러져 있다.
“결국, 너희 마신들도 더 강력한 힘 앞에서는 아주 나약한, 그리고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구나.”
과거 녀석은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하찮은 벌레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어느새 거대한 존재가 되어 자신을 압도하리란 것을 말이다.
“흥미가 사라졌다. 이제 그만 사라져라.”
수천 번 반복되는 죽음과 고통을 통하여 어느 정도의 기운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의식을 버린 장난감 육신에 더는 볼일이 없었기에.
서걱!
신살의 검 미스틸테인을 생성하여 녀석의 머리통을 베었다.
툭, 데구루루-
잘린 목이 몇 바퀴 지면을 굴렀고.
완전히 생명을 잃어버린 녀석의 진체, 그리고 존재는 검은 연기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아니, 그냥 허공에 흩날린 게 아니다.
쿠우우우우!
돌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허공에 흩날리던 검은 연기는 미지의 힘에 의해 소용돌이치며 특정한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호오?”
마침내 완성된 것.
그것은 눈동자였다.
허공에 생성된 거대한 눈동자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번뜩!
이내 나를 주시했다.
「72마신… 소멸… 레메게톤… 마신왕의… 시험이… 때를」
눈동자를 통하여 한 줄기의 의지가 전해진다.
하지만 그것은 무척 불안하여 제대로 된 의미를 전달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레메게톤?’
얼마 전 1,315호를 통해 들었던 단어였다.
72마신을 제압하여 초대 마신왕이 된 솔로몬. 그가 만든, 그의 권능이 깃든 신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곧 너를 찾으리라!」
처음에는 제대로 된 의미를 전달하지 못했던 의지.
하지만 마지막 순간 나를 찾겠다는 말을 전했고.
푸스스스-
이내 연기로 화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찾긴 뭘 찾아. 내가 찾아 주마.”
누군지 모르겠지만 녀석이 날 찾을 필요는 없다.
내가 지금 당장 녀석을 찾아낼 테니까.
파아앗!
연기가 모두 사라지기 전, 의지를 확장하여 연기와 연결된 기운의 출처를 찾았다.
지잉, 지이잉-
근원을 향해 찾아가던 나의 의지를 방해하는 게 있었다.
‘어딜!’
어림없는 일.
나는 그 방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의지의 영역을 확장해 사라져 가는 연기와 연결된 근원을 찾으려 했지만.
「서두르지 말라.」
근원을 향해 다가가던 찰나 들려오는 의지.
「아직은 때가 아니니. 그러니 기다려라. 때가 되면 내가 너를 찾을 것이니.」
조금 전과 비슷한 맥락의 의지를 전했고.
팟!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존재하던 의지의 근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물론 그와 동시에 눈동자를 이루던 검은 연기도 사라졌는데.
‘이건… 심상치 않은데?’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동자를 통해 나를 들여다본 이가 누군지 모르겠으나 내 의지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내 의지를 피하여 몸을 숨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범상치 않은 수준을 나타내는 것.
설마 대륙에서 내 이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를 만날 수 있을 줄이야.
‘신격인가? 아니면 고대 신?’
뭐,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내 행사를 방해하는 존재라면 없애면 그만이었다.
“그래. 만날 날은 기대하고 있으마.”
완전히 흩어져 버린 검은 안개 너머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기운에 의지를 전했다.
그렇게 완전히 사라진 기운을 뒤로한 채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는 3황자를 응시했다.
“으으으…….”
녀석을 옥죄고 있는 건 존재의 무게.
비록 일부에 불과하나 눈동자에 실린 존재의 무게에 짓눌려 공포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딱!
나는 녀석을 위해 손가락을 한 차례 튕겼다.
“허억!”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 3황자.
“지, 지금 무슨 일이……?”
“별거 아냐.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 있어서.”
“그럼 그, 그는 사라진 겁니까? 실로 가공할 만한 힘이 느겨지는 존재였습니다.”
이해한다.
아마 다른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눈동자가 방출하는 기운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의식이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난쟁이 3황자는 나름 심지가 굳은 녀석.
그렇기에 절대적인 존재의 무게에 노출되고서도 용케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아, 물론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공포에 잡아먹혀 조금 전 아몬처럼 바보가 되었겠지만 말이다.
“완전히 사라졌으니 걱정 말고.”
“그,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3황자.
나는 녀석을 한 차례 응시한 후 입을 뗐다.
“자, 네가 말한 대로 황제와 황태자를 죽였다. 이제 네가 황제가 되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은 더는 없는 거겠지?”
“아!”
그제야 생각난 것일까.
거듭 일어난 일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3황자의 시선이 차갑게 식은 황제와 황태자를 응시했다.
“당신들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약속하겠습니다. 당신들과 같이 미련한 황제가 되지 않겠다고.”
처음에는 미약한 슬픔이 보였으나 이내 그것을 극복했다.
‘저 정도 심지면 알아서 잘 다스리겠네.’
황좌란 건 본디 철혈의 자리.
저 정도로 굳은 심지와 두뇌를 지니고 있다면 난쟁이들의 황금 시대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계산을 끝내야지?”
나는 녀석을 지그시 응시했다.
내가 녀석을 도운 이유는 난쟁이들의 번성을 위해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녀석이 내게 매력적인 제안을 했고, 그것을 받아들인 것.
그러니까 이제는 녀석이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할 때였다.
“네, 말도 안 되는 제 부탁을 들어 주셨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 드리겠습니다. 설사 그것이 제게 위해가 되는 일이라 해도 말입니다.”
“아서라. 위해는 무슨. 내가 바라는 건 하나야.”
“말씀해 주십시오.”
“대륙에서, 아니 역사상 최강이 될 만한 무구를 제작하는 것.”
마족들도 인정하는 이 난쟁이 녀석들이라면 분명히 그 뜻을 이뤄 줄 수 있을 것이다.
“흐음…….”
하지만 녀석은 내 말에 턱을 쓰다듬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인상을 찡그린 채 녀석을 재촉했다.
“아니요.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르아 둔에 대단한 재능을 지닌 최고의 대장장이가 존재하니 말입니다.”
“호오, 그래?”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난쟁이 3황자가 이리 자신감을 보일 정도면 확실히 대단한 대장장이가 있는 건 틀림없는 것 같다.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 그게 뭐지?”
“대륙 최고, 아니 역사상 최고의 대장장이는 존재하는 건 사실이나 무구를 제작할 때 중요한 건 대장장이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알고 있다.
최고라 단언할 수 있는 무구를 만들 때 중요한 요소에는 그것을 제작할 대장장이도 있지만.
“재료입니다. 최고의 대장장이가 최고의 재료를 만져야만 최고의 무구가 나오는 법.”
“모르아 둔에는 최고의 재료가 없는 건가?”
“흠. 물론 아주 많은 재료가 존재하는 건 사실입니다만 최고라 단언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귀인께서 원하시는 게 역사상 최고의 무구라면 그에 걸맞은 재료를 사용해야겠지요.”
나는 만족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약 녀석이 재료에 대한 언급 없이 최고의 무구를 제작하겟다고 말했다면 당장 그 목을 비틀어 버렸을 것이다.
그 말처럼 최고의 재료가 없다면 최고의 무구를 제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녀석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후.
콰아아아!
좀처럼 공개하지 않는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촤아아악!
그곳을 통해 무수히 많은 무언가가 지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지면을 장식하는 그것을 본 3황자는 놀라다 못해 경악한 얼굴로 지면과 나를 번갈아 응시했다.
“최고의 재료? 내가 장담하는데 여기에 있는 재료 중에 최고라 부르지 못할 건 없을걸?”
아공간에 보관하고 있던 그것은 능히 ‘보물’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수십만 년에 한 번 떨어진다는 미지의 금속인 마계의 별.
환계에서도 가장 튼튼한 재질로 알려진 레비아탄의 뿔.
억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겨우 한 방울 떨어진다는 태초의 눈물.
마계의 1지대, 그곳의 심장부에 봉인되어 있었던 현자의 돌 등.
세상 어디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온갖 진귀한 보물과 재료가 가득 널려 있었다.
“어때? 재료는 충분한 것 같아?”
그 모든 재료를 바닥에 쏟아 낸 후 물었고.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재료를 가지고 최고의 무구를 제작하지 못한다면 당장 혀를 깨물고 자살을 해야 할 것입니다.”
넋이 나간 3황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황홀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