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Chapter 65
「뽑아라, 그리하면 너는 나의 축복을 받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으니.」
그 의지는 무척 노골적이었다.
아마 내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훼방꾼, 그러니까 타일로와 킬리아를 하수인으로 묶어 두고 이리 유혹하는 것이리라.
내가 고작 이깟 녀석의 의지에 무너져 심령이 제압당할 일이 발생할 턱이 있겠는가.
참으로 멍청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녀석은 자기가 대륙 최고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랬겠지만.’
나는 가만히 녀석을 응시했다.
모든 아름다움을 간직한 눈부신 미녀. 하지만 그것은 녀석의 본모습이 아니었다.
아마도 인간을 쉽게 유혹할 수 있도록 거짓된 형상을 만든 것.
지이잉-
마기를 운용하여 안구에 집중했다.
그러자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진실한 형상이 나타났다.
‘눈깔 괴물이었군.’
거짓 껍질 속에 감춰진 진체는 수많은 눈이 뭉쳐진 괴물의 형상이었다.
‘잠깐? 이건 뭔가 수상한데?’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붉게 물든 눈동자 괴물. 녀석에게서 고대 신의 독특한 기운만아 아니라 신격이 느껴졌던 것.
‘어째서 이 녀석에게서 광기의 근원이 느껴지는 거지?’
처음에는 광기를 다룰 줄 아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광기를 권능으로 다루는 수준이 아니라 광기의 근원을 다루고 있었다.
그 말이 무엇이냐.
녀석에게서 신격의 힘, 광기의 신격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고대 신과 신격은 엄연히 구분되는 존재. 그 힘이 한곳에 공존할 수는 없었다.
「뽑아라… 어서… 네게 무한한 영광이 돌아갈 테니.」
자신의 의지가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충혈된 안광을 빛내며 더욱더 강렬한 의지를 보낸다.
녀석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한 채 힐끔 뒤쪽을 응시했다.
“으라라라라랍!”
괴상한 기합성을 내뱉은 타일로가 힘차게 검을 휘두른다.
위기 상황 속에서 휘두르는 검. 하지만 녀석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횡과 종베기만 수십, 수백만 번 단련했다.
단련을 통한 무의식의 영역에서 뿜어져 나오는 동작은 고작해야 5성의 경지에 이른 이답지 않은 완숙미를 뽐내고 있었다.
“제가 축복을 걸어 드릴게요!”
그리고 녀석의 뒤에서 열심히 기도를 외우는 킬리아.
아마 타일로 혼자였다면 진즉 당했겠지만 그녀의 서포트로 인해 겨우 동등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축복보다 직접 싸우면 안 됩니까?”
“아시겠지만 제가 큰 힘을 쓰기는 곤란해서 말이죠.”
“…네. 그렇죠. 죄송합니다. 제가 힘 좀 더 써 보겠습니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권능. 그렇기에 곧바로 입을 다문 타일로는 더욱더 열심히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저 정도면 꽤 수련되겠네.’
만족할 만한 광경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전투는 매일 연무장에서 대련만 한 녀석의 경지를 한층 위로 끌어올려 줄 것이다.
「무엇을 망설이느냐… 어서, 어서…….」
그리고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타일로가 아니라 여기 이 눈깔 괴물이었다.
“거참, 어지간히 재촉하네.”
「…….」
나는 녀석을 향해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어이, 고대 신 양반.”
「뽑아라… 검을 뽑아라…….」
“그거 안 통하니까 그만하고.”
「…….」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네 녀석 내 의지에 저항하고 있단 말이냐?」
“그러니까 아직도 검을 뽑지 않고 있지.”
「어떻게 그런 일이?」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그보다 고대 신 양반, 뭐 하나만 물어보자.”
나는 녀석이 대답하건 말건 내가 원하는 질문을 던졌다.
“너, 어떻게 광기의 신격을 손에 넣은 거지?”
「…….」
녀석은 다시금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놀란 감정을 내비치진 않았으나 분명 변화는 있었다.
녀석이 주변으로 확장한 기세와 의지가 몇 차례 꿈틀거렸다.
그것은 놀란 녀석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예상했던 대로 광기의 신격을 손에 넣은 것이 확실했다.
「…너, 필멸자가 아니로군. 누구지? 판테온이냐 아니면 판데모니움……?」
또 나왔다.
장난의 신격이 언급한 바 있는 판테온과 판데모니움이란 명칭이 말이다.
“전부터 자꾸 언급하던데 그 판테온과 판데모니움이 대체 뭐 하는 곳이지? 예전에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 최근에는 자주 듣게 되어서 말이야.”
신격과 관련된 건 분명한데 뭐 하는 곳인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 아니, 어떻게? 그렇다면 필멸자가…….」
“그래. 필멸자 맞아. 순수 대륙 혈통. 너희가 말하는 필멸자 맞으니까 묻는 말에 대답하지?”
「건방지구나!」
쿠쿠쿠쿵!
녀석이 기세를 일으키자 사방이 매섭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내가 필멸자라는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태도가 돌변한다.
녀석들이 얼마나 인간을, 필멸자라는 존재를 하찮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근데 괜찮겠어? 내가 이 검을 뽑아 주지 않으면 너도 곤란할 텐데?”
나는 은근슬쩍 녀석의 형상을 관통한 검을 쥐었다.
파지직!
내 손길을 거부하듯 청색의 스파크가 튀었지만 어림도 없지.
파직, 파지지직!
그 스파크를 무시하며 검을 손에 쥐었다.
「봉마검을……?」
조금 전과는 달리 확연히 놀라는 녀석.
그도 그럴 게 검의 저항을 간단히 풀어 버린 것이다.
만약 그 힘에 저항하지 못했다면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숯불구이가 됐을 테지만 고작 저 정도 힘이 날 어찌할 수는 없었다.
「말해라, 필멸자.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지?」
“말했잖아. 판테온과 판데모니움. 네가 방금 말한 그 두 조직에 대한 것.”
녀석의 목숨을 담보로도 협상할 수 있을 테지만 또 신격이나 되는 녀석들 정도면 자존심이 상당해서 그 입을 열게 하는 게 쉽지 않다.
목숨을 담보로 한 협박보다는 정당한 대가를 한 거래라는 방식이 그나마 녀석들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너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사실 무슨 말을 해도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너희가 믿을 턱이 없는 거 다 알아. 그러니까 그냥 속는 셈 치고 한번 질러 봐. 어차피 너도 내가 아니면 봉인을 풀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녀석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건 없다.
애초에 어떤 말을 한다 해도 녀석이 믿지 않을 게 빤하니까.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니라 녀석이라는 점이다.
판테온, 판데모니움.
그 명칭에 대한 게 궁금하긴 하지만 사실 그리 급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나와 비교해 녀석은 어떤가.
봉인의 검을 통해 전해지는 시간의 흐름이 무척 길다.
오랜 세월 동안 이 저택 지하에 갇힌 채 발버둥 치고 있었을 터.
이 봉인에서 풀려날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시도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
「…판테온은 만신(萬神)이 모인 단체, 즉 만신전(萬神殿)이다.」
그리고 입을 여는 고대 신.
“만신?”
「그렇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격을 얻은 신격들이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만든 단체라 할 수 있지.」
오호라?
설마 신격들에게도 소속된 단체가 있는 줄은 몰랐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만났던 신격들 대부분이(아니 전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별종들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존심 강한 녀석들이 단체를 만들었다고?
“그런데 방금 말한 그 질서라는 게 무엇이지?”
「네가 원하는 건 판테온과 판데모니움, 그 명칭의 정의가 아니었던가?」
“그렇긴 한데, 이 정도 궁금증은 해결해 줄 수 있잖아?”
「불필요한 질문은 받지 않겠다. 네가 원한 건 어디까지나 그 두 명칭에 대한 정의였으니.」
하여간 이 녀석들 잔머리는 어지간히 잘 굴린다니까.
“그래. 뭐, 일단은 그렇게 넘어가자.”
아직 필요한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 당장은 화를 돋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판데모니움은?”
「그들 또한 판테온과 같이 신격이 모인 단체다. 하지만 질서를 수호하려는 그들과 달리 ‘혼돈’을 추구하기에 서로 가는 길이 완전히 다르지.」
“질서와 혼돈이라. 그러면 판테온과 판데모니움은…….”
「그렇다. 너희는 모르겠지만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 두 신격의 모임은 끝나지 않는 영원한 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제야 머릿속이 조금은 환해졌다.
서로 다른 길을 추구하는 신격의 모임 두 곳. 그곳이 판테온과 판데모니움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보는 신격들마다 전부 그 이름을 들먹이더니.’
신격이 길바닥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흔한 것도 아니고, 두 단체에 속하지 않은 신격으로 의심되는 자 나를 보게 되었으니 그 이름을 들먹일 수밖에 없었던 것.
「자, 네가 원하는 판테온과 판데모니움에 관한 정보를 주었다. 이제는 약속을 이행해야 할 때다.」
“물론 그렇지.”
순간 녀석을 약 올려 볼까도 생각했지만 관뒀다.
파지직!
손아귀에 힘을 주자 푸른색 스파크가 더욱더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나의 행동을 막으려는 듯 필사적인 저항이 계속되었다.
비단 물리적인 힘만 들어온 게 아니다.
「물러나라… 그는 광기를 삼킨 존재… 그 봉인이… 대륙이 위험…….」
봉인의 검 안에 깃든 의지가 전해졌다.
다급한 그 음성은 고대 신이 풀려나는 것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안심하쇼. 녀석이 여기서 나가 설쳐 댈 일은 없을 테니.’
하지만 그 의지를 무시했다.
어차피 녀석을 몸 성히 보낼 생각은 없다.
내가 봉인을 푸는 건 내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한 것.
쑤욱!
저항을 무시한 채 검을 빼내었고.
「마침내, 마침내 봉인이 풀렸구나!」
자신을 속박하는 봉인의 검에서 벗어난 고대 신, 녀석은 자신의 손과 발을 살피며 환희에 젖었다.
쿠쿠쿠쿠쿠!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기세가 사방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호오?’
과연 다르다.
일단 진체인 것도 있지만 얼마 전 만났던 장난의 신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미증유의 힘.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너, 신격을 먹었구나?”
「…….」
내 말에 일단 침묵한 고대 신.
「크하하하하하!」
콰아아아아!
녀석의 웃음과 함께 엄청난 파동이 사방을 휩쓸었다.
물론 그 영향권에 쓸리지 않도록 타일로와 킬리아는 나의 의지로 보호한 상태였다.
「꽤 보는 눈이 있구나. 그렇다.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신격 하나를 먹어 치웠지. 그 덕분에 녀석의 권능은 나의 것이 되었고, 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었다.」
어쩐지 공존할 수 없는 힘이 동시에 느껴지더라니.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진 모르겠지만 녀석은 신격을 흡수하여 그 권능을 고스란히 흡수한 것 같다.
‘어쩌면 고대 신에게는 신격을 흡수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지 모르지.’
그리고 녀석은 신격을 흡수하여 자신이 아주 대단한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는 중이다.
「크하하하! 멍청한 녀석. 네가 지금 어떤 존재를 풀어 줬는지 깨달았느냐? 너의 무지한 행동으로 인하여 대륙은 파괴될 것이다. 감히 나를 업신여긴 모든 생명체를 멸할 것이며 그 시작은 바로 네 녀석이…….」
“응, 아니야.”
진부한 녀석의 대사는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
「켁!」
곧장 다섯 마리의 마수를 깨운 나는 녀석의 목을 움켜쥐었다.
“고맙다. 네가 신격을 흡수해 준 덕분에 나도 맛있게 식사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의지에 속박된 녀석이 발버둥 친다.
꽤 강렬한 저항이다.
과연 신격을 흡수한 것만큼 저항하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지만.
“나를 만난 걸 불행으로 생각해라.”
녀석은, 고대 신은 내가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을 막아 줄 아주 좋은 영양제.
「크허허허헝!」
그렇게 나머지 두 마리의 마수를 모두 풀었고.
뚝!
일곱 마리의 마수를 모두 깨운 나는 완전한 하나의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죽어라.」
내 의지와 함께.
파스스!
녀석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형상은 그 의지를 거역하지 못한 채 소멸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