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Chapter 54
달이 자신의 존재감을 빛내고 있는 어두운 밤.
“헉, 허억…….”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사내가 뛰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한 거친 숨에, 심지어 경련으로 인해 다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멈추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것처럼 사내는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운명은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엌!”
어두운 산길.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튀어나온 돌부리가 사내의 발길을 막았고.
“끄윽…….”
쓰러진 사내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돼. 가야 해… 빨리…….”
당장 일어나고 싶었으나 휴식을 맛본 다리는 좀처럼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지이익- 움직이지 않는 다리는 내버려 둔 채 팔로 땅을 짚어 기어갔다.
하지만.
푸욱!
“끄아악!”
사내의 종아리를 관통한 무언가가 지면에 내리꽂혔다.
“끅, 끄으윽…….”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지른 사내.
하지만 그는 감히 뒤돌아보지 못한 채 자신의 종아리를 응시했다.
종아리를 관통한 건 단검이었다.
보통의 단검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검신은 어딜 봐도 의식용에 쓰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뿌득.
“끄으악!”
종아리에 꽂힌 단검을 빼내었다.
그러나.
스스스- 그것은 마치 허상이었던 것처럼 검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다리의 상처도.
지금까지 그가 봤던 건 모두 환영에 불과했다.
“단순한 허상이 아냐…….”
사내는 깨닫고 있었다.
그것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 환상이지만, 마치 현실처럼 심상에 상처를 남긴다.
그렇기에 단순한 환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을,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는 것.
“알려야 한다. 반드시 이 사실을.”
일스테인 영지의 기사 조르단.
영주의 명을 받아 최근 사람들의 실종이 빈번한 카스티아 산맥을 조사하던 도중, 그는 사건의 배후, 즉 베일에 감춰진 거대한 음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의 계획을 방치한다면, 거대한 피바람이 몰아칠 터.
영지에 대한, 국가에 대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곧장 그 계획을 알리기 위한 탈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가 이끄는 병사 수십 명도 함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인원은 점차 줄기 시작해, 종내에는 그만이 남게 되었다.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숨은 추격자 때문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죽는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른다.
지금까지 도주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환영으로 괴롭히는 미지의 존재는 뒤를 돌아보는 순간, 물리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그와 함께했던 병사들 모두가 이 규칙을 어겨 죽고 말았다.
병사들의 죽음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조르단은 어떻게든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조르단 대장님.」
「우리를 버리시는 겁니까…….」
「어찌 그리 매정하십니까!」
사력을 다하여 일어서서 걸어가던 그는 죽어 버린 병사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현혹되지 마라. 어차피 그들은 죽었다.’
귓가에 선명히 박히는 그 아련한 음성을 무시했다.
대신 경련이 이는 다리를 진정시켜 가며 빠르게 발걸음을 놀렸다.
그렇게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
조르단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영지가 보인다!’
저 멀리 영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 숲의 경계만 지나간다면 영지에 도착하여 무사히 그들의 계획을 알릴 수 있을 것이다.
저벅.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다는 기쁨 때문일까.
경련은 멈췄고, 그의 걸음 또한 굉장히 빨라졌다.
그러나 잠시 후.
“…….”
안색이 굳어진 그는 걸음을 멈춘 채 정면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칠사도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줄은 몰랐군.」
어느새 정면을 막고 서 있는 이들.
검은 로브를 둘러 외형은 확인할 수 없으나 특유의 사악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네놈들…….”
그곳에서 행해졌던 의식을 주도한 자라는 것을 단 번에 알아챈 조르단.
한 명이라면 어떻게 반항이라도 해 보겠지만.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검은 로브를 쓴 사악한 존재가 무려 6명이나 지키고 있었다.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건 두려움에 질린 움직임은 아니다.
“하압!”
추진력을 얻기 위한 행동.
폭발적인 힘으로 디딤발을 디디며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정면으로 치고 나갔다.
‘뚫었다!’
마지막 힘을 아껴 두고 있었던 조르단은 환호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나 확인하기 위해 뒤로 돌아본 그 순간.
「드디어 뒤를 봤네.」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건 검은 로브를 쓴 누군가였다.
“헙?!”
그 순간,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절대로 뒤돌아보면 안 되는 ‘규칙’을 어겼다는 사실을 말이다.
푸욱!
“끄으윽…….”
환상으로 보았던 구불구불한 의식용 단검이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털썩.
온기를 잃은 육신이 지면에 허물어졌다.
「고작해야 하찮은 인간의 힘으로 사도의 법칙을 벗어날 순 없으니.」
쓰러진 조르단을 응시한 칠사도가 읊조렸다.
스스슥- 칠사도의 주위로 나머지 사도들이 모여들었다.
「꽤 애를 먹은 것 같군, 칠사도여.」
일사도의 말에 칠사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강한 의지를 지닌 자였다. 그래도 덕분에 강력한 생명의 힘을 축적시킬 수 있었지.」
그리 말한 칠사도는 조금 전 조르단을 찌른 의식용 단검을 들어 보였다.
웅웅웅!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검명을 토하는 단검.
조르단의 생명력을 한껏 머금은 단검은 조금 전보다 훨씬 강력한 살육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분의 부활이 머지않았다!」
그간 수많은 생명을 흡수한 단검.
이제 그들의 염원이 이루어지기까지 단 한 걸음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마침 잘됐군. 여기 그분의 부활을 위한 제물들이 널려 있으니.」
몸을 돌린 일사도의 시선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일스테인 영지를 바라봤다.
*
포로롱!
아침을 깨우는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
“흐아암!”
찌뿌드드한 몸을 깨우기 위해 힘차게 기지개를 켰다.
뿌득, 뿌드득.
모처럼 잠을 잘 자서인지 굳어 버린 몸에서 온갖 소리가 난다.
‘음. 어떻게 된 게 왕궁보다 여관이 더 편할 수 있지?’
그건 왕궁에서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이었다.
알게 모르게 화려하기 그지없는 궁 생활이 불편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명색이 왕자인데, 궁 생활이 불편하다니.
피식 웃으며 딱딱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끼익!
대충 얼굴만 씻은 채 방을 나섰다.
「마신왕이시여!」
「만수의 왕을 뵙습니다.」
방을 나오기 무섭게 달려온 건 1,315호와 그라시아스였다.
마치 내 어깨가 자기들의 보금자리인 것처럼 양쪽 어깨를 차지한 녀석들이 연신 아부 떨기에 여념이 없다.
조금은 익숙해진 일상.
녀석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1층으로 내려갔다.
“오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 식사 중이었던 두 사람, 타일로와 킬리아가 나를 반겼다.
그들의 인사를 눈짓으로 받으며 테이블에 합석했다.
“늘 드리던 걸로 드릴까요?”
익숙한 듯 다가온 여관의 직원 아르마.
험상궂게 생긴 대머리 여관 주인의 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이 밝은 미소를 띤 귀여운 아이였다.
“어, 부탁해.”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밝은 미소를 보인 아르마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바람 언덕의 쉼터 특제 스페셜 나왔습니다.”
양손 가득 들고 온 건 음식이었다.
어린 돼지를 통째로 요리한 바비큐.
양고기와 각종 채소를 버무린 스튜.
소고기와 빵을 말아 만든 비프웰링턴 등 저녁으로도 먹기 벅찬 각종 기름진 음식들을 대령했다.
탁탁.
테이블 위를 장식하는 각종 요리.
메인 요리의 가짓수만 해도 5개가 넘을 정도의 초호화 음식이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서 님, 아침부터 이리 거하게 드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며칠이나 봤으면 적응할 만도 하건만 끈질기게 물어보는군.
“자고로 음식에는 고기가 들어가야지. 고기는 푸짐하면 할수록 좋다는 말 몰라?”
“글쎄요. 이 정도면 푸짐한 게 아니라 배 터지는 정도가 아닌지…….”
하지만 난 녀석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통돼지 바비큐의 살점을 한가득 입 안에 넣었다.
“우걱우걱. 맞아요. 모름지기 고기는 푸짐할수록 좋은 법이죠. 우걱.”
의외인 건 킬리아의 반응.
생긴 것만 보면 풀잎에 맺힌 이슬만 먹게 생겼는데, 녀석의 식성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칠면조의 다리를 양손에 든 녀석은 지지 않겠다는 듯 마구 고기를 입 안에 욱여넣기 시작한 것.
매번 보는 거지만, 참으로 대단한 식성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내가 이런 식단을 정해 놓고 있는 건 ‘매일 끼니마다 푸짐하게 먹고 싶다’는 원정대원의 염원을 이뤄 주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말해 나는 먹는 것에 욕심이 별로 없다.
욕심이 없을뿐더러 먹는 것으로 에너지를 얻는 행위 자체가 불필요하기 때문에 먹는 행위가 조금은 귀찮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데 킬리아는 그러한 행위에서 상당한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이러니 인간성이 마모되는 거겠지.’
인간의 기본 욕구를 신비하다고 생각하다니.
이러니 내 인간성이 마모되는 것이며, 점차 내가 아닌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먹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입과 손을 놀려 테이블 위의 음식물을 다 먹어 치워 가고 있을 무렵.
“아서 님!”
덜컥!
여관 문이 거칠게 열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작은 영지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미모의 여인, 아니 엘프.
그녀는 테스엘 용병 길드의 1층 관리인인 미셸이었다.
“미셸?”
좀처럼 길드 밖을 돌아다니지 않는 미셸의 등장에 타일로와 킬리아가 의문 어린 눈빛을 보냈다.
“골드 랭크 이상의 용병들에 대한 긴급 소집령이 떨어졌어요.”
오슬렌 가문에서 벌어진 측정 불가의 임무를 완료하고 나서 곧바로 골드 랭크로 승급할 수 있었다.
고작 하나의 임무를 완료하고 골드 랭크로 승급해 금방 랭크를 올릴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오슬렌 가문과 같은 측정 불가의 임무가 존재하질 않았다.
모처럼 작정하고 신격을 쓸어버리려고 했건만 이적이 행해지는 임무의 경우에는 플래티넘 이상의 임무로 제한되어 있었기에 내가 접근할 수는 없었다.
해서 며칠간 자잘한 임무만 완료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긴급 소집령이 떨어진 것이다.
아마도 뭔가 큰일이 터진 게 분명하다.
“골드 랭크 이상 소집이면 무척 굵직한 임무가 나왔다는 거겠지?”
잘근잘근 씹고 있던 돼지고기를 꿀꺽 삼키며 말했고.
“위험 등급 S 이상의 임무로 짐작하고 있어요.”
“S?!”
미셸의 말에 곧바로 놀란 반응을 보이는 타일로와 킬리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위험 등급 S라고 한다면 하나의 도시가 멸망할 수도 있는 고위험 등급의 난이도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영지 밖으로 어마어마한 언데드 군대가 진군해 오고 있어요. 만약 그들을 막지 못한다면 일스테인 영지는 물론 근방의 모든 영지가 쑥대밭이 되고 말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