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Chapter 49
처음에는 이 녀석이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게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그건 확실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실 아슈르테카란 고대 신의 존재는 진즉에 소멸했다.
여기 남아 있는 이 구체는 녀석과는 전혀 별개의 존재.
쉽게 예를 들자면, 갓난아기와도 같은 상태라고 할까?
어떠한 의지도 깃들어 있지 않은, 하나의 본능만을 가진 순수한 영혼이었다.
그리고 녀석이 원하는 건 강력한 존재와의 합일.
물론 장내에서 그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별로 힘이 필요하진 않은데.’
사실 더 강해질 마음은 없다.
아니, 사실 더 강해질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더 강해질 수야 있겠군. 그게 내가 아니라서 문제겠지만…….’
내가 아닌 존재가 되면 그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심지어 지금 지니고 있는 힘만으로도 대륙을, 아니 차원을 주무를 수 있는데 말이다.
나는 가만히 칠색 광채를 뿜어 대는 구체를 응시했다.
‘어차피 다른 녀석의 손에 넘어가면 또 귀찮은 일이 발생할 수 있으니.’
보관이 불가능한 형태의 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흡수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반쯤 포기하며 그것에 손을 가져갔고.
슈우우우!
아슈르테카의 기억이, 별의 탄생부터 함께했던 근원의 파편이 지닌 모든 순간순간이 내 뇌리에 각인되었다.
아니, 그건 단지 기억의 전달뿐만이 아니었다.
“이건……?”
나를 향한 운명의 압박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조금만 방심해도 당장 내가 아닌 존재, 신격으로 만들 것만 같았던 운명의 압박이 말이다.
“이거 좋은데?”
아마도 이 근원의 힘이라는 건 내가 신의 격에 올라서지 않아도 존재를 유지할 힘을 전해 주는 것 같다.
그렇다는 뜻은.
‘대륙에 퍼져 있는 고대 신들을 족쳐 그 파편을 흡수할 수 있다면…….’
내가 아닌 존재, 즉 신격이 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운명의 압박이 거세져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란 말인가.
‘그럼 앞으로의 목표는 이것으로 하면 되겠군.’
최대한 빠르게 ‘왕국 일’을 정리한 후 원정대원들의 바람을 해결한다.
그리고 그 여정 중에 고대 신의 흔적을 찾아 그 힘을 흡수하면 끝.
“좋았어!”
머릿속에 그려진 완벽한 계획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곧장 지면을 박찼다.
*
“…….”
“…….”
정적이 휘감아 도는 장내.
예전과 같이 갑작스러운 국정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감히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스윽- 혹여 내가 손을 빼 탁자에 올릴라치면.
“헙!”
“으헉!”
화들짝 놀란 귀족들-특히 몇몇 고위 귀족들이-이 자신의 몸을 가리며 각자의 방법으로 몸을 보호했다.
누가 보면 내가 회의 때마다 사람을 패는 줄 알겠네.
“유난 떨지 마.”
지난번과는 달리 왕의 품위 따위는 버렸다.
“이번에 내가 당신들을 부른 건 지난번에 하지 못한 한 가지 사안을 공표하기 위해서야.”
얼마 전, 갑자기 용가리들이 난입하는 바람에 회의를 급하게 파했었다.
덕분에 준비했던 사안을 공표하지 못했고, 오늘에서야 다시금 국정 회의를 열어 그것을 발표하게 된 것.
“오늘부터 나는 왕위에서 물러난다.”
“네, 네?!”
“아니, 그 무슨?!”
놀란 귀족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지만 누구보다 놀란 건 바로 펠리드였다.
놀란 녀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침 잘 일어섰다.”
그리고 나는 놀란 녀석을 보며 말했다.
“펠리드 알슈타드. 지금부터 네가 소튼 왕국의 왕위를 이을 것이다.”
그건 예정되어 있었던 계획의 일부였다.
대안이 없어 억지로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왕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가진 건 오로지 무력뿐.
하지만 어디 정치라는 게, 그리고 백성을 보살피는 게 무력만으로 해결이 되겠는가.
나보다는 정세에 밝은, 그리고 누구보다 훌륭하게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는 펠리드가 왕이 되어야만 하는 게 올바른 수순이었다.
“실로 훌륭하신 결정이시옵니다.”
“펠리드 왕자님이라면 누구보다 폐하의 뜻을 이어 올바른 정치를 이끌어 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 전의 당황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마치 이것이 참된 결정이라는 듯 화색을 띠며 반기는 귀족들.
‘너희들 속셈을 누가 모를 줄 알고?’
하여간 단순한 녀석들 같으니.
녀석들은 내가 왕위에서 물러날 경우, 유약한 펠리드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는 폐하의 그 뜻을 받아들일…….”
“펠리드.”
귀족들과는 달리 왕위를 잇지 않겠다고 선언하려던 펠리드.
하지만 내가 녀석의 말을 끊었다.
“너 스스로도 알고 있겠지만, 너는 성군(聖君)이 될 자질을 타고났다. 무릇 왕이란 천명이 있어야 하는 법. 나같이 사람 때려잡는 녀석보다는 천명이 있는 네가 왕이 되어 선정을 펼치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지 않겠느냐.”
줄곧 장난처럼 임해 왔지만, 이번에는 진심이다.
그리고 그 뜻은 나의 바람만이 아니라 소튼 왕국 출신이었던 비에리와 체이스 등 일부 원정대원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왕자님, 더는 소튼 왕국이 무시당하지 않도록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일에 적합한 이는 펠리드였다.
“하지만…….”
“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다. 내 비록 왕위를 물려주기는 하나 여전히 너의 곁에서 왕위를 보좌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왕위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나는 대공으로, 왕가의 어른으로 남아 펠리드를 보좌할 것이다.
“그러니 네가 평소 꿈꿔 왔던 이상을 마음껏 펼쳐 봐라. 너라면 틀림없이 부강한 왕국을, 모두를 어우를 수 있는 좋은 왕이 될 수 있을 거다.”
물론 그 꿈을 펼치기 위한 사전 준비, 드래곤의 보물을 쥐여 준 뒤였다.
녀석은 그것이 왕국의 재정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아니.
그 막대한 보물은 온전히 녀석의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이 못난 동생은 그 뜻을 따르겠습니다.”
나의 확고한 뜻을 알았는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무릎을 꿇는 펠리드.
“그래. 너라면 내 진심을 알아주리라고 생각했다.”
믿음과 확신이 담긴 시선은 아끼는 동생에게서 이내 믿을 수 없는 무리, 귀족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너희들.”
고오오오!
그리 말하며 적의나 살의가 아닌, 모든 것을 무릎 꿇리는 절대적인 위엄을 발산하였다.
“내가 저번에도 경고했지. 너희의 역할은 왕권을 위협하고 억압하여 너희들 뜻대로 조종하는 게 아니라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보좌하는 것이라고.”
“그, 그렇습니다. 폐하.”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존재감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귀족들이 합심하여 답한다.
“다시금 머릿속에 새겨 두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비록 왕위에서 물러났어도 여전히 너희를 지켜보고 있음을.”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확실히 존재의 각인을 새겼으니 허튼수작을 부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파하겠다.”
공표할 모든 걸 알렸으니, 그것으로 회의를 파했다.
각자 자신의 자리를 찾아 떠나갔고, 펠리드는 망부석처럼 그곳에 남아 멀어지는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
북적북적.
밤이 되었지만, 왕성 안은 여전히 꽤 소란스러웠다.
그 모든 건 나로 인해 비롯된 일.
갑자기 열리게 될 대관식을 준비하기 위해 모두들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홀짝.
나는 시종을 시켜 준비한 과일을 안주 삼아 포도주를 마셨다.
곧 있으면 떠나야 하는 왕성.
마계에서 돌아온 순간부터 참으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었지.
똑똑-
막 감상에 빠져들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다.
“폐하, 펠리드 왕자님께서 뵙기를 요청…….”
“들어오라고 해.”
시종장의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채 허가했고.
끼익- 곧 문을 열고 펠리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앉아라.”
“네.”
순순히 내가 권한 자리에 앉은 녀석.
쪼르륵. 마련된 잔에 포도주를 반쯤 따랐다.
“제가 올 걸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눈치를 못 챌까 봐?”
“그렇군요. 과거의 형님이셨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지.”
그것도 아주 많이 말이다.
홀짝- 녀석은 내가 따른 포도주를 삼켰다.
“정말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별다른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달라질 수 있습니까? 아니, 도대체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은 어떻게 된 겁니까?”
녀석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폭풍과도 같은 질문을 쏟아 냈다.
아마 이번 기회를 통해 자신의 의문을 모두 풀 생각인 것 같았다.
“말했잖아. 마계로 떠난 지 수백 년 만에 차원을 넘어 대륙으로 돌아왔다고.”
나는 한 번도 그 일에 대해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다만 주위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았을 뿐이지.
“정말 그게 사실이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네가 잘 생각해 봐.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게 달리 어떤 것이 있는지.”
“…그렇군요. 네,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말도 안 되지만 그렇게 퍼즐을 맞추지 않으면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영특한 녀석은 그러한 사실을 단번에 깨달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합니까?”
“아마 내가 대륙으로 돌아오기 위해 사용했던 힘이 차원 간의 시간을 왜곡한 것 같긴 하다만. 뭐, 나라고 그 현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겠냐.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지.”
차원의 간섭, 그리고 그 시간의 차이는 신격에 도달하기 직전인 나도 잘 모르는 어려운 세계관이다.
그것이 내게 해가 되었다면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애썼을 테지만 뭐, 굳이 해가 될 일이 없으니 신경 쓸 이유가 있나?
“음. 그럼 마계에서의 생활은 어떠셨습니까. 정말 마계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죽음의 대지인가요?”
“뭐, 비슷하긴 하네. 그런데 말이다. 마계는 죽음의 대지만이 아니라 총 72계층의…….”
나는 이야기보따리를 열심히 풀어놓았다.
그렇게 녀석과 함께 포도주를 음미하며 마계에 대한 화제로 날이 샐 때까지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펠리드 폐하, 만세!”
“현명하고 어진 왕에게 축복을!”
“새로운 시대에 영광이 있으리라!”
멀리서부터 들리는 건 사람들의 환호성이었다.
대관식은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그들은 새로운 왕의 즉위를 축복하고 있었다.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다, 펠리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으니 녀석이라면 틀림없이 위대한 왕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녀석이 걷는 길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지금 당장은 어렵다.
내게는 반드시 완수해야 할 소명이 있다.
“자, 어서 가시죠.”
“모험이라니. 마인을 죽이는 원정 외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꽤 두근거리는데요.”
문제는 그 여정에 불필요한 인원이 참가했다는 것이다.
“너희는 대체 왜 따라가겠다는 건데?”
옆에 나란히 선 두 녀석, 타일로와 킬리아를 응시했다.
“그야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신 분이 폐하… 아니 대공 전하 아니십니까. 멋대로 제 인생을 바꾸셨으니 당연히 저를 끝까지 책임지셔야지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하하하. 뭐, 어떻습니까. 어찌 됐든 분명한 사실은 전하와 저는 떨어질 수 없는 운명으로 묶인 몸이라는 겁니다.”
오해를 살 만한 몇몇 말을 제외하면,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 있다.
‘펠리드의 곁에 두기 위해서는 실력을 더 쌓기도 해야 하니.’
녀석은 합격.
그렇기에 녀석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킬리아를 응시했다.
“너는 왜?”
내 물음에 녀석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아시잖아요. 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
안다.
얼마 전까지 녀석에게 기생했던 악령들이 멋대로 신성력, 아니 신성력을 가장한 생명 에너지를 사용해 버려 킬리아의 생명은 길어도 1~2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전하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싶어요.”
아무리 내 감성이, 인간성이 메말랐다고 하지만 곧 죽을 사람이 저렇게 부탁하니 이건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그럼 너희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깨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미꾸라지와 곰돌이 인형에게 물었다.
「마신왕께서 가시는 길에 어찌 제가 빠질 수 있겠습니까.」
「만수를 지배하는 왕의 여정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녀석들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목적이야 뻔하지.’
어떻게든 내 옆에서 머무르며 환심이라도 사보려는 심산이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이놈들은 나의 무력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 가자.”
곧 결정을 내렸다.
모자라지만 검의 천재.
당장 1년 뒤 죽을지 모르는 성녀.
최상위 마족 1,315호와 한때 대륙을 피로 물들였던 암룡 그라시아스.
이 얼마나 훌륭한 파티란 말인가.
아마 이 조합을 본다면, 모험가 파티를 꿈꿨던 ‘아르벨’ 녀석이 무덤에서 뛰쳐나왔을지도 모를 일.
“그런데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문득 궁금한 듯 타일로가 물었고.
“용병 길드.”
나는 간단히 답했다.
용병 길드. 그곳은 원정대원 중 하나였던 아스웰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