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Chapter 47
고대 신.
고대부터 대륙에 존재했던 신의 ‘격’을 지닌 존재를 일컫는다.
사실 이들 고대 신의 탄생은 별의 탄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공허만이 가득한 우주에 충만한 생명력을 지닌 별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생명의 파편이 모여야만 한다.
그렇게 모인 생명의 파편 중에는 간혹 ‘자아’를 개방하는 특별한 존재가 있는데, 이들이 바로 훗날 말하는 고대 신이 된다.
별을 탄생시킬 만큼의 충만한 에너지를 가진 파편. 그렇기에 당연히 그곳에서 발아한 존재의 힘도 막강하기 그지없었으니.
대지의 근간 중 하나였던 아슈르테카 또한 과거에는 막강한 권능과 재앙을 일으키며, 고대의 인류에게 숭배를 받았던 신격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과거의 일.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믿음, 공포, 그리고 신앙이 사라져만 갔고, 신격을 이루고 있었던 그의 존재 또한 나약해져만 갔다… 라는 건 대륙이 전하는 거짓된 역사에 불과했다.
진실은 따로 있으니.
아슈르테카를 비롯한 고대 신이 힘을 잃게 된 건 갑자기 별을, 즉 대륙을 찾아온 ‘방랑자’들 때문이었다.
고대 신들이 지배하고 있던 대륙을 찾아온 방랑자들은 무차별로 아슈르테카를 비롯한 고대 신들을 습격, 대륙의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근원의 전쟁’이 일으켰다.
당연히 자신의 근원지에서 벌어진 전쟁이었기에 고대 신 모두가 자신들의 승리를 점쳤다.
그러나 방랑자들은 강력한 원군인 ‘그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고, 적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고대 신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별에 존재하는 모든 고대 신이 봉인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물론 아슈르테카 또한 다른 고대 신들처럼 봉인을 당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신격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위기에까지 봉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운명의 도움이었을까.
우연한 기회에 봉인된 그의 신전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곳에 침입한 모험가의 정기를 흡수하게 되면서 마침내 봉인을 깨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아슈르테카.
하지만 그는 봉인을 깬 것에 만족할 마음이 없었다.
어떻게든 과거의 힘을 되찾고, 각지에 봉인된 고대 신들을 깨워 다시금 별을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은밀히 광기를 퍼뜨려 대륙에 뿌리를 내린 지성을 가진 생명체, 인간들을 유인했고 그들의 정기를 흡수하여 자신의 힘을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단지 힘을 회복하는 데 집중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고대 신들의 봉인을 찾아 그것을 파괴했고, 더 이상 존재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몇몇 고대 신의 경우에는 직접 그 존재를 흡수하기도 했다.
아무리 존재가 희미해졌어도 충만한 에너지를 지닌 그들을 흡수하면서 아슈르테카의 힘은 놀랍도록 빠르게 회복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지의 정기를 빨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대지에서 탄생한 그는 대지의 정기를 흡수하여 과거보다 더욱더 완전한 존재로 거듭났다.
그것은 곧 완전한 부활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그 부활에 맞춰 나타난 미개한 대륙의 생명체를 향하여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었다.
*
공동을 장악한 수천 개의 녹색 촉수가 움직인다.
쾅, 콰콰콰콰쾅!
일반적인 촉수와는 다르다.
그 하나하나에 깃든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내려칠 때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공포에 몸을 떨어라, 어리석은 생명체야.」
환희에 젖은 의지.
나를 향해 다가오는 촉수를 무시한 채 그 의지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호오?’
제단 위.
촉수와 같이 녹색의 오라를 발산하는 존재가 보인다.
인간? 아니, 인간과는 생김새가 다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두꺼비와 인간을 섞어 놓은 두꺼비 인간이라고 해야 하려나?
마치 엄청난 힘을 손에 넣은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녀석은 자신의 힘을 마구잡이로 분출하고 있었다.
쉬이익!
녀석에게 시선을 거둔 채 쇄도하는 촉수를 바라봤다.
촤악!
가벼이 내지른 주먹에 의해 촉수는 산산조각이 나며 지면에 파편을 떨구었다.
그러나.
스스슥- 놀랍게도 대지와 접촉한 파편은 씨앗이라도 된 것처럼 다시금 자라났다.
하나가 아니다.
수백 개로 나뉜 조각 모두가 씨앗처럼 자라나 촉수가 되었다.
「크하하하! 소용없다. 네 녀석이 아무리 발버둥친다고 해도 대지의 힘이 부여된 나의 권능을 막을 수 없으니.」
뭐가 좋은지 아까부터 실실 쪼개는 녀석.
“확실히 귀찮긴 하네.”
그리고 녀석을 향해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아마도 녀석이 일으킨 저 촉수는 대지에 근간을 둔 권능일 터.
그렇다는 말은 대지와 접촉하고 있는 이상 무적이라는 것.
“하지만 아쉽게 됐네.”
다른 보통의 녀석들이었다면 그 괴이한 권능에 절망했을 테지만 하필 상대가 나라니.
츠츠츠츠!
아공간을 열어 꺼낸 건 스톰브링어였다.
쉬이익!
그러나 검을 꺼내기 무섭게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녀석의 촉수.
「대지의 양분이 되어라!」
녀석은 이번 일격으로 끝낼 심산인 것 같지만.
“응. 양분 안 돼.”
아마 이러한 속성 공격이 처음이었다면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전투를 통해 속성의 상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말이야.
웅웅웅!
다가오는 촉수를 바라보며 스톰브링어에 마기를 주입했다.
폭풍의 마검은 바람의 속성이 부여된 검. 대지를 잡아먹는 데는 안성맞춤인 무기였다.
「몰아쳐라.」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사나운 폭풍의 본성을 깨웠다.
그러자.
콰콰콰콰콰콰콰콰!
나를 중심으로 뿜어져 나간 칼날의 폭풍이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슥!
그 폭풍은 다가오는 모든 촉수를 분쇄했다.
베고, 베고, 베고, 또 베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로 베어 버렸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이럴 수가?!」
공동을 장식한 수천 개의 촉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그곳에 남은 건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의 경악성을 내뱉는 아슈르테카뿐.
「네, 네 녀석. 보통 녀석이 아니구나!」
수상쩍은 기운을 감지한 것일까.
스스스- 녀석이 몸을 내빼기 위하여 권능을 일으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딜!”
여기까지 와서 목표물을 놓칠 순 없지.
찰나의 순간, 의지의 영역을 확대하여 일대를 내 지배하에 두었다.
그리고 녀석이 권능을 일으킬 수 없도록 권능의 간섭을 일으켰다.
파직, 파지직!
「흡!」
권능의 충돌로 인하여 새하얀 스파크가 녀석 주변으로 튀었다.
그것은 권능의 충돌이자 의지의 충돌.
나의 훼방으로 인해 녀석은 몸을 빼려던 행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어찌 나약한 생물체 따위가 이런 힘을?!」
권능의 간섭을 받은 녀석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팟!
나는 이미 그곳에 없다.
「컥!」
녀석이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여 녀석의 목을 움켜쥐었다.
평소와 같이 마력과 의지를 흘려보내 녀석의 모든 행동을 구속하려고 했지만.
「크크크크, 어리석구나.」
마치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연기였다는 듯이 웃음을 짓는 두꺼비.
“어리석다? 네 녀석이 아니고?”
「크흐흐. 네 녀석의 강대한 힘은 나의 양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쭈우우욱- 녀석을 구속하기 위해 펼쳤던 나의 마기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호라?”
아무래도 이 녀석은 식물과 같은 존재로군.
대지에 뿌리를 박아 그 양분을 흡수하는 권능. 그 권능을 발휘하여 내 마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크하하하! 과연 강력한 힘이로다. 이 정도라면 나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으니!」
나의 마기를 흡수하는 녀석이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몸에 좋은 마기를 마구 빨아들이고 있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좋아? 그러면 더 보내 줄게.”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찌 주저할 수 있겠는가.
슈우우욱!
빨아들이고 있는 손을 통하여 더욱더 많은 마기를 흘려보냈다.
「크하하하! 좋구나!」
처음에 녀석은 좋아 죽으려고 했다.
그런 녀석을 위해 학살의 마수 한 마리를 깨웠고.
「오오오오!」
넘치는 힘에 녀석은 환호했다.
녀석의 육신은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근육질로 변했고, 그 존재감 또한 엄청나게 커졌다.
나의 마기를 흡수하여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아마 이렇게 ‘천천히’ 내 마기를 흡수한다면 녀석이 말하는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 테지.
하지만 녀석이 그러한 존재가 될 일은 없다.
“그럼 하나 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학의 마수를 깨웠다.
「이, 이런 힘이라니?!」
그러자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흘러들어 오는 마기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다.
그 증거로 녀석의 몸은 근육질이 아니라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힘을 품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럼 하나 더.”
그리고 파괴의 마수를 깨웠다.
「크허허허헝!」
나의 심상에서 세 마리 마수가 울부짖었고.
「우우웁!」
그 엄청난 힘은 고대 신 따위가 감히 버텨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부욱!
녀석의 육신은 넘치는 내 힘을 감당하지 못한 채 팽팽하게 부풀어 버렸다.
마치 두꺼비가 바람을 넣어 양 볼을 부풀리는 것처럼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이 정도 힘도 못 받아 낼 거면 꺼져.”
그리 말하며 한순간에 엄청난 마기를 흘려보냈다.
「으으윽!」
고통으로 가득 찬 마지막 비명.
그것이 고대 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유언이었다.
퍼퍼퍼펑!
넘치는 내 마기를 감당하지 못한 녀석의 육신이 터져 버렸다.
솨아아- 물론 허공에 흩어진 마기는 주인을 향해 되돌아왔고, 나는 그것을 온전히 흡수하였다.
고오오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것.
그것은 칠색의 광채를 발산하는 영롱한 파편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드래곤 로드가 말했던 녀석의 핵. 고대 신을 이루는 근원일 것이다.
스릉.
곧장 로드가 전해 준 신룡검을 뽑아 들었다.
“…….”
잠시 그 검과 파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죽고 싶으면 뭔들 못 하겠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신룡검을 파편에 찔렀다.
콰직!
파편에 깊숙이 파고든 신룡검은.
화아악!
황금빛의 광채를 발산하였다.
처음에는 옅은 빛이었던 광채는 점차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이내 공동 안을 전부 잠식했다.
그리고 잠시 후.
…….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서도, 아슈르테카의 근원인 생명의 파편도, 그리고 신룡검도.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흔적이 사라지고 말았다.
슈슉!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간을 넘어 모습을 드러내는 이가 있었다.
“이런 혜안이 있으시다니!”
“과연 로드이십니다.”
색색의 머리칼을 자랑하는 미남미녀들.
그들은 바로 용족이 자랑하는 12장로, 그리고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로드 아나키리안이었다.
“초대 로드께서는 자신의 영혼을 희생하여 신룡검을 만드셨지. 그분이 자신의 영혼까지 바쳐 가며 검을 만든 이유는 단 하나. 훗날 대륙의 균형을 위협하는 존재 둘을 동시에 봉인하기 위한 것.”
아나키리안은 아서에게 거짓말을 했다.
신룡검이 발휘하는 봉인의 힘은 찔린 대상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한 사용자도 포함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잠재력을 높게 본 초대 로드의 안배였다.
언제고 대륙을 위협하는 강대한 적이 나타나거든 초월의 힘을 얻은 인간에게 그 임무를 맡겨 신룡검과 함께 봉인하라는 것.
혼돈을 품은 강력한 인간을 저지함과 동시에 강대한 적도 봉인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의 계략이었다.
“생각보다 강력한 자 같은데, 혹 돌아올 염려는 없겠습니까?”
걱정됐던 4장로가 물었다.
“걱정하지 마시게. 신룡검의 힘은 그 두 존재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차원의 미로로 이끌었을 테니.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닌 이상에야 그 미로를 빠져나올 순 없을 것이야.”
아나키리안의 말에 다들 안심이 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아와라, 신룡검.”
이제는 미로 속을 헤매는 신룡검을 회수하는 일만이 남았다.
물론 그 일은 무척 쉽다.
그의 의지와 연결된 신룡검을 다시금 부르기만 하면 된다.
“…….”
하지만 신룡검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지만 닿으면 곧장 돌아와야 할 신룡검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
“무슨……?”
계속 의지를 보냈다.
분명 답은 있었다.
신룡검은 어떻게든 그의 손에 돌아오기 위해 답을 보내고 있었지만, 마치 무언가에 의해 저지당하고 있는 것처럼 미로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서, 설마?!”
그 순간, 아나키리안을 한 가지 의구심에 생각이 미쳤고.
「이따위 건방진 짓을 벌였으니 죽어도 할 말은 없겠다, 그렇지?」
그들에게 전해지는 단호한 의지.
그리고.
찌이익!
차원의 경계를 종이처럼 찢고 모습을 드러내는 이가 있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통수거든. 그러니까 너희는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더 강력한, 마치 절대자와 같은 기운을 발산하는 인간 아서.
그가 맹수와 같은 눈빛으로 12장로와 아나키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