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Chapter 43
타닥타닥-
칠흑의 어둠을 밝히는 모닥불이 타들어 가고 있다.
마계의 밤. 한기의 달이 뜬 그 밤은 너무도 춥기에 원정대원 모두가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그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한기의 달에 안전지대를 찾아서 다행이네요.”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청년.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은 그는 알로. 원정대에서 ‘해맑음’을 담당하고 있는 순수 청년이었다.
“…….”
“…….”
평소 같았으면 그 말에 맞장구를 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냈겠지만, 오늘따라 분위기는 냉랭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안전지대를 찾던 중에 원정대원 3명이 희생당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동료의 죽음은 그들에게 침울함을 안겨 줄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지.”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모닥불에 손을 가져가고 있던 아서만이 그 말을 받아 주었다.
“안 그래도 추워 죽기 일보 직전인데, 거기에 마수들까지… 어휴.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그 또한 소중한 동료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침울한 분위기가 계속될 경우, 사기에도 영향을 줄 수 있어서 그것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의도였다.
물론 속이 깊은 알로 또한 아서와 같은 생각으로 말을 꺼낸 것이었고 말이다.
“그, 그렇지.”
“하긴. 이 끔찍한 곳에서 밖을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끔찍하네.”
알로와는 달리 원정대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아서의 말에는 다들 반응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물론 그들의 처지도 안타깝긴 하지만, 지금은 산 사람의 앞길을 걱정해야 할 때였다.
“그나저나, 알로.”
“네, 왕자님.”
“과거 대륙에 있었을 때 길잡이로 생활했었다며?”
“한때는 그랬었죠.”
그냥 평범한 시골 청년으로 보이는 알로.
하지만 그의 과거는 그리 평범하지 않았다.
고대의 신비가 남아 있는 위험 장소 ‘던전’을 안내하는 던전 길잡이였던 것.
“그런데 왜 갑자기 그만두게 되었지? 과거 던전 이야길 하던 때의 네 얼굴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만.”
“…….”
아서 왕자의 말에 잠깐 과거를 회상하던 알로.
이윽고 닫혀 있던 그의 입이 열렸다.
“…제 실수로 인해 모험가였던 형이 죽었거든요.”
음파를 진동시켜 구조물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알로는 그 누구보다 유능한 던전 길잡이였다.
그래서 자만하고 말았다.
모험가인 형을 안내하는 중에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고, 고대의 유산이 깃든 망령과 수호자들에 의해 형과 그 파티는 죽음을 맞았다.
형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알로는 그 트라우마로 인해 다시는 던전을 안내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
“한 번은 그 과거를 잊으려 던전에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입구에서 펼쳐진 어둠을 보는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더라고요.”
여전히 남아 있는 형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다시는 던전에 들어가지 못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군.”
“네. 던전에 들어가려고 하면 무참히 살해당한 형의 모습이 떠올라서요…….”
“그렇군. 그럼 만약 대륙으로 돌아가게 되면 던전 길잡이를 계속할 생각이냐?”
아서가 물었다.
그건 괜한 물음이 아니라 대륙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원정대에 안겨 주기 위함이었다.
“지금 정도의 힘이라면 길잡이가 아니라 제가 직접 던전을 정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 말한 알로가 기운을 일으켰다.
화르륵!
그의 손에 피어오른 검은 불꽃.
마기로 형성한 그 불꽃은 평범한 불꽃과는 달리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강력한 권능이었다.
“만약 정말로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바람이 하나 있어요.”
“뭐지?”
“…형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던전을 직접 정복해 보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과거 있었던 그 일을, 그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알로의 바람은 오직 하나.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던전을 직접 정복하는 것.
“분명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헤헤. 감사합니다, 왕자님.”
알로는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을 밝힌 그 밤이 지나고, 원정대는 더는 알로의 밝은 웃음을 볼 수 없었다.
숲의 미로에 갇힌 원정대를 구하기 위하여 마기를 폭주시켜 자신을 희생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과거와 겹치는 상황.
알로는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아서는 그 찰나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기를 폭주시켜 흉측하게 변한 모습. 하지만 그 얼굴에는 평소의 알로를 떠올리게 하는 아주 밝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번쩍!
과거의 기억 속 편린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곧장 펼쳐지는 천장. 그것은 마계의 하늘처럼 황량하지도, 그렇다고 섬뜩하지 않은 아늑한 천장이었다.
“쩝.”
텁텁한 입을 한 차례 다셨다.
최근 들어 자주 꿈을 꾼다.
물론 꿈을 꾸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소중한 동료들의 끔찍한 죽음이 주를 이루었던 악몽이 아니라 그들의 바람과 관련된 꿈이 자주 나왔다.
‘아무래도 이제 정리할 때가 된 것 같네.’
내게 남은 원정대원들의 의지가 자신들의 바람을 어서 이루어 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겠지.
“에르덴, 있는가?”
항시 대기하고 있을 시종장을 불렀고.
“부르셨습니까?”
문밖에서 익숙한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곧 국정 회의를 시작할 테니 모든 귀족은 조속히 입궁할 수 있도록 명을 전해라.”
“곧바로 기별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명 하나에 왕궁 전체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그들의 발걸음을 들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오늘은 중요한 하루가 될 테니 나도 몸을 정갈히 해 둘 필요성이 있다.
“녀석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긴 하네.”
과연 이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될 펠리드. 녀석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하며 따뜻한 물이 준비된 욕조에 몸을 깊숙이 담갔다.
*
“위대한 왕, 아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장의 외침과 함께.
끼익- 열린 문을 통해 회의장으로 입장했다.
“위대하고 위대하신 아서 폐하 만세!”
“아서 폐하 만세!”
상석의 펠리드를 필두로 자리한 귀족들이 나를 반겼다.
저벅- 준비된 왕좌로 느릿하게 다가가 앉은 후.
“모두 자리에 앉으시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일부러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명이 떨어진 후에야 각자의 자리에 앉는 이들을 한 차례 바라보다가.
“아작시오 공작,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인데. 아침에 쾌변을 보지 못했소?”
어딜 봐도 자리가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아작시오 공작을 향해 물었다.
“어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자신의 기색을 드러낸다.
“폐하, 제가 한 말씀을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여는 공작.
“말해 보시오.”
물론 그러한 분위기를 진즉에 읽고 있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반응했다.
“국정 회의와 같이 중요한 왕국의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는 이리 급히 처리할 게 아니라 사전에 귀족들에게 미리 고지하여 날짜를 정하는, 즉 사전에 협의를 구하는 게 마땅하다고 판단됩니다.”
“협의?”
“그렇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선왕 때부터 있었던 관례. 폐하께서도 선왕과 같은 성군이 되시려면 귀족들과의 소통을 중시하셔야 할 것입니다.”
궤변이다.
왕이 국정 회의를 열겠다는데, 자기들이 뭐라고 협의를 바라는가.
그 같은 관례는 왕권이 추락할 대로 추락하여 생긴 굴욕적인 일.
그런데 그것을 관례라고 말하며 궤변을 늘어놓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여간 이것들은 조금만 풀어 줘도 이 지랄이라니까.’
기존 권력을 잡고 있던 귀족들을 싹 물갈이했다.
그러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그들은 과거의 귀족 중심의 체제를 원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영향에는 펠리드가 국정 전반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절대의 무력을 선보였던 내가 아니라 유순한 펠리드의 운영이 귀족들에게는 좋은 기회로 보였을 테고, 그것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지금의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펠리드를 탓할 마음은 없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건 단순히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경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는 공작이 아닌 다른 귀족들을 응시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귀족들과의 소통은 아무리 말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디 선왕과 같은 성군이 되어 주십시오.”
하나같이 개소릴 지껄인다.
아, 단 한 명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시리우스 후작, 그대의 생각은 다른 것 같은데.”
백작에서 후작의 위에 오르게 된 시리우스 후작.
오직 그만이 귀족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 말을 아끼고 있었다.
“폐하께서 국정을 위하여 회의를 주최하시겠다는데 굳이 사전 협의를 바라다니, 제가 보기엔 다른 귀족들이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닌지 저어됩니다.”
하하하.
전부터 느꼈지만, 하여간 촉이 좋은 양반이라니까.
장담하건대 이대로만 한다면 시리우스 후작은 상당히 높은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못한 나머지는 이대로 추락하겠지만 말이다.
“그 무슨 말을!”
“시리우스 후작! 말이 지나치시오!”
곧장 반발하여 일어나는 머저리들.
역시 이것들은 구제할 가치가 없는 쓰레기들이다.
「앉아.」
그래서 곧장 의지를 전달했고.
쿵!
그 엄청난 무게감을 이기지 못한 녀석들은 마치 누군가 내리누른 것처럼 급하게 자리에 앉았다.
“권력이란 게 참으로 대단해.”
입을 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작시오 공작에게 다가갔고.
스윽- 그리고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얼마 전까지 왕권을 어지럽히던 클루이안 공작가와 그와 뜻을 함께한 귀족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그리고 건방지게 국경을 넘어오려는 트리안 왕국의 병력을 모두 물리친 내가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권력에 눈이 멀어 이리 건방을 떨 수 있다니 말이야.”
솔직히 말해 어이가 없었다.
내 손짓 하나면 죽어 나자빠질 나약한 존재들 아닌가.
아무리 내가 활약하는 그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다고 해도 소문은 들었을 터인데 어찌 이렇게 건방을 떨 수 있지?
“아, 혹시 그건가? 그래도 왕국의 중요 귀족인데, 우리가 다 함께 의견을 모으면 아무리 왕이라도 쉽게 그 뜻을 거부하진 못하겠지. 그렇지 않아도 최근 귀족을 물갈이하여 왕국의 사정이 힘든데 우릴 어떻게 하겠어?”
녀석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하다.
문제는 내가 녀석들이 의도한 대로 상황을 흘러가게 둘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정신 차려, 병신들아!”
콰아아아!
위협하듯 기세를 흘려보냈다.
고작해야 일부의 기세에 불과했으나.
“크윽…….”
“으으으…….”
녀석들은 그것도 감당하지 못한 채 몸을 떨며 식은땀을 쏟아 냈다.
“내가 너희를 어찌하지 못할 것 같아?”
그리 말하며 아작시오 공작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 커컥!”
저항할 수 없는 힘에 허공에 들려진 공작을 차갑게 응시했다.
조금만 힘을 준다면 녀석의 목은 쉽게 꺾일 것이다.
「죽여!」
「그 하찮은 목을 비틀어 버려!」
마수를 깨우지도 않았지만, 녀석들이 남긴 흔적이 속삭였다.
‘아니.’
이들이 건방을 떤 건 사실이나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이들의 목숨보다는 내 인간성이 더 중요하다.
원정대원들의 바람을 들어주기 전까지 나는 내가 아닌 어떤 존재가 될 수 없다.
쿵!
손아귀에 힘을 풀자, 지면에 떨어진 공작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감히 나에게 대항하지 마라. 앞으로 소튼 왕국은 절대적인 왕권이 지배할 테니 너희는 그저 성심을 다해 왕을 보좌하면 된다.”
그리 말하며 기세를 더 높였다.
“내게, 왕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는 살의를 담아 회의장에 넓게 퍼뜨렸다.
「…너희는 다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울 수 없는 낙인을 귀족 녀석들에게 새겼다.
“며,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납작 엎드린 귀족들이 덜덜덜 몸을 떨며 간청했다.
녀석들의 정신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었으니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더 이상 딴생각을 품지 못할 것이다.
팟!
그것을 확인한 후에야 기세를 거두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리고 내가 준비한 건 이게 끝이 아니다.
“펠리드에게 왕…….”
막 그 말을 끝맺으려던 찰나의 순간.
「소튼 왕국의 왕 아서. 일족의 규율에 따라 용살자인 그대를 처벌하겠다!」
회의장을, 아니 왕국 전체에 울리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