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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1
펄럭!
바람의 흐름에 따라 펄럭이는 검은 로브.
그러나 그건 리퍼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깨끗했고, 또한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중간계에서 볼 수 없는 소재?
아니. 그 로브는 그림 리퍼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특별한 형상, 죽음의 로브였다.
모든 물리, 그리고 마법 공격을 통과 시켜 착용자를 보호하는, 명계의 십황이 아니라면 가질 수 없는 보물.
어디 그뿐인가.
인간의 뼈와는 다른, 은은한 황금빛이 깃든 뼈대.
5m가 넘는 거대한, 그리고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칠흑의 데스 사이드와 검은 불꽃이 일렁이는 특수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단지 모습을 나타낸 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감을 똑똑히 새기고 있는 그가 바로 명계의 십황 중 하나 모든 리퍼를 다스리는 영혼의 인도자 그림 리퍼였다.
‘그림 리퍼가 어째서?’
위대한 존재를 본 해골 가면의 사내, 위대한 일원에 소속된 단원인 그리스는 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 리퍼의 부하에 불과한 리퍼를 소환하는 데만 해도 엄청난 영혼의 재물을 바쳐야만 했다.
7개 세계 간의 ‘규칙’을 깨고 간섭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이들을 학살하여 모은 영혼을 바쳐 겨우(?) 리퍼를 소환하였다.
그런데 웬걸?
대륙을 통째로 갖다 바치지 않는 이상 결단코 소환될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던 존재인 그림 리퍼가 떡하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야, 그림.”
“흡!”
아서가 내뱉는 그 한 단어에 놀란 그리스가 입을 틀어막았다.
‘뭐, 뭐라고?!’
잘못 들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저 아서는 그림 리퍼를 ‘그림’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감히 명계를 다스리는 십황 중 하나에게 애칭을 부른 것이다.
‘그림 리퍼의 분노가 떨어질 것이다!’
어떻게 소환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림 리퍼란 존재는 결코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그런 그에게 그림이라니.
이제 곧 이곳은 그림 리퍼의 분노로 초토화...
「아서, 오랜만이다.」
“엌?!”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해지는 의지에 다시금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분노가 떨어지기는커녕 반가움을 표한다.
저 그림 리퍼가. 모든 영혼을 다스리는 위대한 존재가,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그가 말이다.
“너 요즘 얘들 교육 제대로 안 하냐?”
「교육? 그게 무슨 말이지.」
“너도 봤잖아. 방금 저 새끼가 내 목에 낫 들이대는 거.”
「으음...」
순간 그림 리퍼의 안광이, 심연을 품은 그 눈이 벌벌 떨고 있는 리퍼에게 향했다.
「너!」
「네, 네넵!」
그림 리퍼의 지목에 화들짝 놀라며 기립하는 리퍼.
「리퍼 몇 기지?」
「15,099기입니다!」
「15,099기? 역시 그랬군. 가장 폐급만 모였다는 문제아 기수가 아닌가.」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네 녀석만 봐도 기수 꼬락서니가 보이거늘.」
「시정하겠습니다!」
‘이건...꿈인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그리스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를 기이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영혼의 등불이라는 아티팩트를 이용하여 간신히 소환한 리퍼. 그런데 그 대단한 리퍼가, 모든 존재를 죽일 수 있는 사신이 얼차려를 받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모든 일이 부질없게 느껴지는 건 단순히 한순간의 감정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왜 나의 소환자를, 아서를 모르는 거지? 네 녀석 기수라면 분명 신병 사신 훈련소에서 따로 교육을 받았을 텐데.」
「그게...저기...」
「똑바로 말 못 하지?」
「아닙니다. 시, 실은 중요 소환자 이론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다른 생각을...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사신 생활 끝나나?」
「그, 그건...」
「쯧!」
혀를 차는 그림 리퍼.
그리고.
쿠웅!
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무섭게 가라앉았다.
그 근원은 그림 리퍼. 바람도 불지 않는데 맹렬하게 펄럭이는 죽음의 로브는 이 위대한 존재의 감정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게다가 변화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쩌적, 쩌저적-
대기에 조금씩 머물러 있던 수분이 얼어붙는다.
갑자기 한겨울이 된 것처럼 장내의 온도가 급속도로 내려갔다.
그 모든 것은 그림 리퍼의 단순한 감정 변화로 인한 것.
그림 리퍼나 되는 절대의 존재는 단순히 감정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자연을 변화시킬 정도였다.
「네 녀석, 앞으로 100년 동안 외출, 외박, 그리고 모든 휴가를 금한다.」
「위대한 존재시여, 그것만은...」
「번복은 없다. 그러니 지금 당장 명계로 돌아가 처분을 기다리도록.」
「아...!」
감히 누구의 말이라고 반항하겠는가.
리퍼 15,099기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였다.
모처럼 중간계에 왔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야 할 상황.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고개를 들어 한 곳을 바라봤다.
「인간! 네 녀석 때문이다. 네 녀석이 날 소환하지만 않았다면, 아니 그림 리퍼님의 소환자를 죽이라는 명령만 하지 않았어도!」
칠흑에 물든 안광에서 불꽃이 피어오른다.
치지직-
“끄윽!”
그리고 그 눈빛은 그리스의 이마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남겼다.
「명심해라. 네가 죽음에 이른 그 순간 반드시 내가 네 녀석을 찾아올 것이다. 네 영혼은 명계에 정상적으로 인도되지 못할 것이며 영원의 고통 속에서 존재를 잃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리퍼가 발휘할 수 있는 고유의 권능 중 하나인 영혼의 낙인.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리퍼의 분노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영혼의 낙인이 찍힌 대상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반드시 낙인을 남긴 리퍼의 방문을 받게 될 것이며 그 영혼은 영원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아아...”
사령술사인 그리스는 영혼의 낙인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절망에 빠진 채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에게 죽음은 안식이 아니라 영원한 고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흥!」
펄럭!
영혼의 낙인을 남긴 리퍼는 로브를 펄럭이며 명계로 돌아갔다.
저벅- 넋이 빠진 그리스를 향해 다가오는 이.
“아이고, 이를 어쩌나.”
안됐다는 듯 혀를 차는 그는 바로 아서였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존재.
그러나 그리스는 다가온 아서를 보면서도 어떠한 적의를 품을 수 없었다.
고오오!
그의 옆, 엄청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그림 리퍼 덕분이었다.
그의 소환자, 게다가 친분까지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그 어떤 발악도 소용이 없었다.
“...대체 네 녀석은 누구지?”
단지 궁금할 뿐이었다.
도대체 뭐 하는 존재기에 그림 리퍼를 소환했으며 그와 친분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흠. 영력(靈力)을 다루는 자가 아서를 모른단 말이냐?」
아서를 대신하여 대답한 건 그림 리퍼였다.
「아서는, 그는 명계의 십황과 전속 계약을 맺은 이며 아무런 대가 없이 십황을 소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
그림 리퍼의 소개에 입을 벌리는 그리스.
전속 계약이라니. 그것도 명계의 지배자인 십황 모두와 전속 계약을 맺는 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일일이 설명하고 그래.”
손사래를 친 아서가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디뎠다.
느릿하게 걷는 듯했으나 어느새 그리스의 면전에 당도한 아서.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리스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씨익 웃었다.
“너의 영혼의 낙인을 지워줄 수도 있는 존재기도 하지.”
“영혼의 낙인을?!”
절망에 빠져 있던 그리스의 눈동자에 잠깐이나마 희망의 빛이 일렁였다.
“물론 그 대가로 네가 소속된 위대한 일원인가 뭔가 하는 곳의 정보를 불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이미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 신세인 그리스는 아서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
“...이상이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해골 가면, 아니 자신을 그리스라 밝힌 녀석을 응시했다.
표정이나 흐트러지지 않는 기세를 봤을 땐 거짓 정보는 아니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림. 거짓은?”
곧장 그림 리퍼에게 물었다.
명계에서도 특별한 존재에 속하는 녀석은 상대의 말에서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 사실이다.」
“그렇군.”
그제야 지금껏 말한 그리스의 정보를 머릿속에 새겼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는 게 별로 없네?”
일단 진실인 건 확인했으나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다.
녀석이 알려준 정보는 무척 단편적이어서 인물이나 세력을 특정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습니다. 위대한 일원은 철저한 점조직. 단장을 제외한 그 누구도 단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 또 누가 속해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하긴.
지난번에 보여준 행태부터 시작해 보통의 조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예 못 쓸 정보만 있는 건 아니니까 나름 만족한다.
“그럼 이제...”
녀석이 간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빤한 것.
“그림.”
「알겠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칠흑의 데스 사이드를 든 그림.
스팟!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인 녀석의 데스 사이드가 그대로 그리스를 베었다.
그러나 녀석의 육신에는 어떠한 피해도 가지 않았다.
다만.
치이익- 이마에 새겨진 영혼의 낙인이 사라질 뿐이었다.
“됐다! 자유를...!”
털썩!
하지만 영혼의 낙인이 지워진 녀석은 이내 쓰러졌다.
데스 사이드가 벤 것은 그리스의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었다.
특히 그림이 손에 쥔 ‘생사(生死)의 낫’은 영혼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권능의 무기.
비록 영원한 고통에서는 벗어났으나 녀석의 영혼은 구제될 수 없는 완전한 무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했던 약속은 영혼의 낙인을 지워주는 것뿐.
녀석을 살려준다거나 편히 죽여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수고했어. 그만 돌아가도 좋아.”
나는 그림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는 녀석은 쉽사리 엉덩일 떼질 않았다.
「아서.」
“왜?”
「무슨 일을 벌일 작정이지? 설마 중간계도 그곳처럼...」
“멸망시킬 거냐고?”
「...그렇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중간계를 멸하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싶어서 묻는 것이다.」
아무리 전적이 있다지만, 이게 사람을 뭐로 보고.
“내가 무슨 피에 미친 살인마냐. 그렇게 함부로 세계를 멸망시키게.”
「처음 봤을 땐 넌 분명 피에 미친 살인마였다만?」
“...”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에 살짝 뜸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아니야. 그때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던 거고. 중간계는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서 그럴 일은 없어.”
「지켜야 할 사람들이라. 그렇군. 과거 말했던 그 원정대의?」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다. 혹 네가 그때처럼 미쳐 날뛰는 게 아닌지 걱정되어서 말이다.」
“누굴 애 취급을 하고 그러네.”
「당시 내가 봤을 때 너는 심상이 완성되지 않은 완전한 꼬맹이였다. 물론 지금은 징그러운 녀석이 다 됐지만.」
“그래, 그러시겠지. 그나저나 빨리 가. 지금 너랑 노닥거릴 시간 없어.”
나를 노리는 자객을 정리했으니 이제 그것을 사주한 녀석들에게 합당한 벌을 내려줘야 할 때다.
명계로 돌아간 그림의 빈자리를 응시하다가 이내 마기를 발현했다.
슈슉!
주변 사물이 빠르게 바뀌었고, 어느새 내 육신은 보이지 않는 눈을 붙여둔 대상 중 하나인 율리안 공작의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왔군.”
그런데 공작의 반응이 예상외다.
저택에 마련된 연무장 중앙, 그곳에 선 이 음흉한 늙은이는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하게 반응했다.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나?”
“조금 전 암비의 죽음을 확인했으니 당연히 다음은 내 차례가 아니겠는가.”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제국의 공작이라 이건가?
“그럼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도...”
“후후. 그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로군. 죽음의 무대에 온 것을 환영한다.”
갑자기 늙은이의 태도가 바뀌었다.
파아앗- 그리고 영역을 확장하여 연무장 전체를 뒤덮는 기이한 힘.
“이건?”
그건 조금 전에도 경험한 바 있는 결계였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마나를 불안정하게 하는 효과보다 더욱더 강력하다는 것.
“멍청한 녀석. 네 녀석은 스스로 무덤으로 들어온 것이다.”
뚝!
마나의 흐름이 완전히 끊겼다.
결계 안에서는 마나를 이용한 어떠한 능력, 권능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이 뭐냐.
순수하게 육체적인 능력으로만 겨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라, 나의 전사들이여!”
공작의 웅후한 외침과 함께.
척척척.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내는 수십 명의 건장한 사내들.
쨍그랑-
그들은 각자 손에 쥐고 있던 색색의 포션을 들이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결계로 인해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니 특별한 효과의 포션을 통해 근력, 순발력, 지구력 등을 높인 것.
꿈틀꿈틀!
근육이 미친 듯이 부푸는 거로 봐서는 생명력을 갉아먹는, 아주 지독한 효과의 포션인 게 틀림없었다.
“네 녀석을 위해 준비한 무대는 아니나 상황이 다급하니 어쩔 수 없지. 그러나 너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확실히 상당한 준비성이긴 하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무대.
그리고 생명력을 대가로 하는 강력한 효과의 포션을 마신 수십 명의 베테랑 검사.
암비가 준비한 전략도 심상치 않은 것이었는데, 이번 전략은 정말 필승의 전략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허, 거참.”
그리고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살려달라고 해도 늦었다. 자, 나의 전사들이여 감히 우리 공작가에 대항한 죄인을 처형...”
늙은이 공작의 말이 끝나기 전.
스팟!
한줄기 선이 된 것처럼 빠르게 움직인 나는 전사 하나를 눈앞에 두었다.
“황당해서 정말.”
정말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퍽!
거력이 실린 내 주먹에 전사의 머리가 잘 익은 수박처럼 깨졌다.
“무슨?!”
“어, 어찌...?”
놀라운 그 움직임에 당황하는 공작과 전사들.
“에라이 븅신들아. 이걸 함정이라고 준비했냐?”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나는 마계에서 수백 년간 죽을 고비를 넘기는 혹독한 수련을 쌓은 몸이다.
그런데 고작 포션 몇 모금 빤 녀석들이, 고작해야 십수 년 수련한 녀석들이 내 수련의 성과를 어찌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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