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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9
황실 내 마련된 황비 헬리에의 방.
쾅!
평소에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숙의 공간에 울려 퍼지는 둔탁한 소음이 있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뾰족한 음성의 주인공.
그건 항상 냉정한 태도로 일관하던 헬리에 왕비였다.
테이블에 앉은 그녀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라는 폐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황비의 언성에도 담담히 차를 마시고 있는 건 그녀의 아버지인 율리안 공작이었다.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말입니다!”
언성은 더욱 높아진다.
“저기 내 아들 글레이드가 사지가 찢긴 채, 그곳이 뜯긴 채 누워있어요. 그런데 이대로 가만히 있으라니. 폐하도 정녕 제정신이란 말입니까!”
“쉿!”
율리안 공작이 입에 손을 가져갔다.
“황비님, 황실 안입니다. 말조심하십시오.”
황제의 눈과 귀가 가득한 곳.
그의 험담을 하기엔 너무도 위험한 장소였다.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그 아서라는 작자를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 진정 못 합니다. 당장, 지금 당장 그 녀석을 찢어 죽이지 않으면 이 마음의 울분을 삭일 수 없단 말입니다.”
헬리에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태어날 때부터 공작가의 영애로 온갖 이쁨과 사랑, 그리고 권력 속에서 살았다.
황비가 된 이후라고 달랐겠는가?
그야말로 절대의 권력을 휘두르며, 그 누구에게도 모진 소리 한 번 듣지 못했건만 무뢰한에게 뺨을 맞았다.
그것만으로도 대역죄였는데, 아끼는 아들 글레이드가 사지와 성기가 뜯긴 채 병신이 되어버렸다.
아서, 고작해야 소튼이라는 소국의 왕에게 말이다.
당장 병력을 일으켜 왕국을 정벌해도 모자랄 판에 불문에 부치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폐하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생각? 고작 소국의 왕이 두려워 머뭇거리고 있는 게 아니고요?”
“마마, 진정하십시오.”
낮은 음성.
어느새 날카롭게 변한 율리안 공작의 눈이 헬리에를 응시하고 있었다.
“...”
그제야 뜨끔한 황비는 말을 아꼈다.
그 누구보다 공작을 잘 알고 있는 황비. 그렇기에 그가 지금과 같은 눈을 빛내고 있을 때는 행동을 조심해야만 했다.
율리안 공작은 남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냉철하고, 또한 사이한 인물이었으니까.
“흥분을 좀 가라앉히셨습니까?”
“네. 하지만 아직도 그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비록 불문에 부치라는 황제의 명령이 있었다지만, 이대로 이번 일을 묻을 생각은 없었다.
“그자는 쌍룡을 단번에 제압할 정도의 실력자. 복수를 실현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폐하께서도 다방면의 조사가 필요해 불문에 부치라 명하신 것이 아닙니까.”
“...”
공작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황비는 그저 그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아버지.”
“네, 마마.”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하나요?”
“무엇을 말입니까?”
“위대한 일원.”
“...그것을 어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을 부릅뜨는 공작.
“설마 제가 그들의 존재를 모를 거로 생각하셨나요?”
“...”
“그들이 돕는다면 아무리 쌍룡을 베어 낸 그 자라 해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마마 그들은...”
“대가는 제가 지불하겠어요.”
“...거기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놀란 공작이 되물었다.
누구도 모를 비밀이라고 생각했건만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갔단 말인가.
“아무리 쌍룡을 단숨에 처치할 수 있는 자라고 해도 위대한 일원과 공작가의 암비(暗飛)들을 동원한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 말이 틀렸나요?”
복수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로 공작을 바라본다.
“허허.”
그리고 공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마마의 정보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군요. 도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니 자연스레 정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더군요.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을 뿐이에요.”
“장하십니다. 무릇 높은 자리에 있으면 있을수록 주위의 정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중요하지요. 예,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장하다는 듯 황비를 응시하돈 공작은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위대한 일원과 암비라. 확실히 그 정도 전력이라면 그자를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대가가 상당하다는 걸 명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움직일 자신이 있냐?
그 의미를 담은 공작의 시선에.
“저의 모든 걸 바쳐서라도 복수를 실행할 겁니다.”
이건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그자, 아서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이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그를 죽여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체할 필요 없이 곧장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말한 공작이 물러났고, 넓은 방 안에는 헬리에 황비 혼자만 남았다.
꽈악- 손톱이 파고들도록 두 주먹을 꽉 쥐는 황비.
‘두고 봐라. 네 녀석의 가족, 친척, 그리고 네 백성들 모두의 사지를 찢어발길 테니.’
원한과 증오로 가득 찬 헬리에 황비의 눈동자는 복수라는 일념으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
“그라탄. 어째서 가만히 있으라는 거냐.”
마치 별을 박아넣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를 지닌 흑발의 사내가 정면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에는 왕좌에 기대어 편히 앉아 있는 임펠 제국의 황제 그라탄 겐 퓨리온이 있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광경 같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놀랍게도 흑발의 사내는 대 제국의 황제를 향하여 반말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물론 제게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슈아드님.”
만인의 위에 있는 제국의 황제가 반말을 들은 것으로도 모자라 경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계획?”
그 상황이 익숙한 흑발의 사내가 물었고.
“최근 그라이튼 공작가의 행보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으음. 하긴 그 음흉한 녀석이라면 무슨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지.”
“하하. 그렇습니다. 율리안 공작. 그가 외부 세력과 결탁하여 영 좋지 않은 일을 꾸미서 있어서 말이죠.”
“그래? 그럼 내게 말하지 그랬어. 그냥 쓸어버리면 되는데.”
수백 년간 임펠 제국의 기둥이었던 그라이튼 공작가를 쓸어버리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다른 누가 말했다면 허풍도 그런 허풍이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눈앞의 슈아드라면 다르다.
“어찌 그런 하찮은 일에 제국의 수호자인 슈아드님을 동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를 동원한다면 단숨에 공작가를 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어디 세상일이라는 게, 정치라는 게 그리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인가.
여러 이해 관계가 복잡히 얽혀 있어서 단순히 무력만 사용해 해결할 수 없다.
아예 대륙 전체를 쓸어버릴 수 있는 절대의 힘이 있다면 모를까.
“그래서. 공작 녀석의 수상쩍은 움직임과 이번 일이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데?”
슈아드의 물음에 황제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바로 이이제이(以夷制夷)입니다.”
“이이제이?”
“하하하. 한 세력을 이용하여 다른 세력을 견제한다는 격언입니다.”
“한 세력을 이용해 다른 세력을 견제한다...? 아, 설마?”
“네.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소튼 왕국의 왕을 이용하여 공작가의 세력을 약화할 작정입니다.”
본인도 상당히 분노할 만한 상황에서도 이번 일을 불문에 부치라 했던 이유는 조금 전 말했던 이이제이를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최근 위험할 정도로 세를 확장하기 시작한 공작가.
때문에 언제고 한 번 경고를 해주려 했는데, 마침 이번 사건이 터진 것이다.
황비가 끔찍이 아끼는 3황자가 당한 사건이니만큼 공작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설 수밖에 없을 터.
쌍룡이라는 제국의 두 인재를 단숨에 처치할 만큼의 실력자와 공작가가 충돌한다면 분명 양측은 심각한 피해를 입을 테니.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지요.”
황제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쯧. 잔인한 녀석 같으니. 아들이 저 지경이 됐는데도 정치를 생각하고 있다니.”
“하하. 황제라는 자리가 어디 보통의 자립니까. 이 자리를 보전하려면 인간이 아닌 철인(鐵人)의 길을 걸어야지요.”
본래 황제가 걷는 길은 부모도, 형제도,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비정의 길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현 황제인 그라탄은 역대 그 누구보다 황제의 품격을 갖춘 존재라 볼 수 있었다.
“뭐, 나는 그런 네가 나쁘지 않아. 오히려 네가 있어서 이렇게 제국이 굴러갈 수 있는 거니까.”
누군가는 비정할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슈아드는 흡족한 듯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성장을 바라보았기에 어엿한 황제의 품격을 갖춘 그를 보는 게 대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어디 저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모든 게 제국의 수호자인 슈아드님께서 뒤를 받쳐주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지요.”
황제는 신뢰가 가득 담긴 눈으로 흑발의 사내, 슈아드를 응시했다.
부모도, 형제도 믿을 수 없으나 눈앞에 있는 이, 슈아드는 다르다.
오직 그만이 황제 그라탄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
파앗!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무리.
쉬이익-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너무도 가볍게, 그리고 쾌속하게 속도를 내며 나아가고 있었다.
“정지!”
엄청난 속도로 나아가던 그들은 멀찍이 보이는 마을을 발견하고서는 멈춰 섰다.
보통의 임무를 수행할 때라면 목적 달성을 하기 전까지 최대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마을이나 민가를 그냥 지나쳤겠지만.
“공작님의 명은 소튼 왕국의 모든 것을 멸하는 것. 지금부터 작전을 수행한다.”
지금은 다르다.
떨어진 명령은 소튼 왕국의 모든 것을 멸하는 것.
그렇기에 이동하면서 보이는 모든 마을, 그리고 그곳에 있는 생명체를 학살한다.
“크큭. 너희는 나설 필요 없다.”
검은 잠입복을 입은 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전 먼저 나서는 이가 있었다.
화르륵- 녹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등불을 손에 쥔 이.
기이할 정도로 삐쩍 말랐으며 해골 가면으로 얼굴을 감춘 그는 느릿한 속도로 선두에 섰다.
‘기분 나쁜 녀석.’
그를 바라보는 이들이 하나같이 얼굴을 찡그렸다.
공작의 명으로 함께하고 있었지만, 그는 절대 친분을 쌓을 수 없는 부류였다.
스으으- 주위에서 풍겨 나오는 사이한 기운, 그리고 역한 냄새.
마치 시체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으흐흐. 오늘 영혼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겠군.”
하지만 불편한 기색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손에 든 등불을 높게 들어 올린다.
【ٸٹثیخښش】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의 언어, 신비한 힘을 품은 말을 내뱉자.
사아아아!
손에 든 등불에서 번져 나온 녹색 불꽃이 거대한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것은 거대한 낫.
사신의 낫이라 불리는 사악한 주술이 발현된 것이었다.
“크흐흐. 잘 먹겠습니다!”
콰콰콰콰!
영혼을 먹는 사신의 낫이 마을을 향해 떨어진다.
“응. 못 먹어.”
막 낫이 마을에 닿으려는 순간.
콰앙!
한 차례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파스스- 그리고 강력한 힘이 부여된 사신의 낫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무로 돌아갔다.
“뭐, 뭣?!”
너무도 간단히 소멸한 자신의 권능을 어이없게 바라보는 해골 가면의 사내.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저벅-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청색 머리칼의 사내를 말이다.
“너, 너는?!”
사내를 확인한 이들이 경악성을 내지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사내는 바로 지금 이들이 움직인 이유, 척살 명령을 받은 목표였기 때문이다.
스릉-
하지만 당황한 것도 잠시.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며 전방을 주시한다.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홀로 목표가 나타났다면 해야 할 일은 단순했다.
“목표를...”
제거한다.
그리 말하려던 그들은 뒷말을 잇질 못했다.
콰앙!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다가온 아서가 해골 가면의 사내를, 목표를 함께할 조력자를 바닥에 내리 꽂았기 때문이다.
“그라이튼 공작가의 개. 너희는 오늘 모두 죽는다.”
고오오오-
엄청난 존재감이 주변 일대를 장악한다.
“그리고 이 일을 사주한 공작가와 황비, 그년도 오늘을 넘기지 못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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