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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2
“만수의 왕? 아니, 이것들은 나만 보면 왕이라고 하네.”
소튼 왕국의 왕이야 내가 했다고 치자.
그런데 마신왕에 마왕에 이제는 만수의 왕?
아니, 내가 달라고 한 적도 없는 왕 호칭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누가 보면 왕에 엄청 집착하는 변태인 줄 알겠네.
「유계의 모든 환수를 제압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만수의 왕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는 오직 위대하신 분에게만 허락된 것입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녀석은 감히 내 눈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말했다.
음. 녀석이 없는 말을 한 건 아니다.
실제로 마신 녀석의 함정에 빠져 마계에서 유계로 강제 이동됐었고, 그곳에 있던 환수를 닥치는 대로 쥐어팬 시절이 있었다.
‘지겹게 싸우긴 했지.’
그건 정말 끝도 없는 전투였다.
내 생을 돌이켜 봤을 때 가장 원 없이 치고받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유계는 불살(不殺)의 영역.
고통은 있으나 죽지는 않는 장소였기에 계속 달려드는 환수들을 상대로 끝나지 않는 전투를 계속해야만 했다.
물론 그중에는 눈앞의 그라시아스도 있었다.
그 많은 환수 중에서도 녀석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던 건 주제도 모르고 까불다가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존심을 꺾지 않다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맞게 되자 울면서 ‘형님’하던 게 엊그제 일인 것 같은데.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경악하다 못해 놀라 자빠지려는 마녀.
모든 것을 바쳐 소환하려 했던 존재가 한낱 인간에세 굽신거리고 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어째서 위대한 암룡이 고작 인간 따위에게...?」
그 말에 납작 엎드려 있던 그라시아스가 고개를 들어 마녀를 응시했다.
「고작 인간?」
쿠쿠쿠쿠-
감추고 있었던 기세가 사납게 퍼져 나간다.
「네까짓 벌레 녀석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이분은 만수의 왕이며 유계를 평정한 유일무이한 절대자시다.」
「만수의 왕? 절대자?」
워낙 경황 중이라 사태 파악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야야, 됐어. 뭐하러 그런 걸 설명해. 곧 죽을 녀석에게.”
어차피 이슬처럼 사라질 운명. 굳이 내 위대함을 설명할 이유가 있을까?
「...네 녀석. 대체 뭐 하는 녀석이지?」
나를 빤히 바라보는 마녀의 인형.
아무리 인형이라지만 목이 저렇게 꺾인 상태로 바라보고 있으니 조금 징그럽긴 하다.
“방금 그라시아스가 대충 말해준 것 같은데?”
「만수의 왕. 유계의 지배자라는 말을 나보고 믿으란 말이냐?」
“내가 말한 것도 아니고 녀석이 말한 건데 믿지 못할 이유라도?”
「...」
“그냥 믿기 싫은 거겠지. 믿으라고 강요할 마음은 없으니까 마음대로 생각해.”
지잉-
때마침 내 감각을 파고드는 것.
그것은 지금까지 인형이 하는 헛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이유기도 했다.
「어떻게 암룡을 구워삶았는진 모르겠으나 기고만장하지 마라. 내가, 위대한 일원들이 너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반드시 피의 보복이 있을지니.」
“피의 보복은 개뿔.”
인형 뒤에 숨어 있다고 아주 신이 났지?
“나중에 보지 말고 지금 당장 보자고.”
그리 말한 후 마기를 일으켰다.
【공간 이동】
원하는 좌표의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 이동의 발현과 함께.
슈슉!
내 육신은 공간을 뛰어 넘었다.
주변 사물이 재배치되어 다시금 온전한 형상을 이루었을 때.
“이, 이럴 수가?!”
갑자기 등장한 날 보며 비명을 지르는 건 인형이 아닌 마녀의 본체.
그리고 놀라는 녀석을 향해 망설이지 않고 손을 썼다.
“커, 커컥!”
목을 움켜쥐어 가벼이 허공에 들어 올렸다.
“인형 뒤에 있다고 마음껏 지껄이더라? 내가 널 찾지 못할 것 같았지?”
그건 네가 아직 진정한 실력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 거란다.
나 같이 마기를 신묘하게 다룰 줄 아는 이를 만나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결된 마나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스으으- 마기를 주입하여 녀석의 암령을 제압했다.
“커컥!”
발버둥을 치며 암령을 발휘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내 손에 잡히면 아무리 강력한 마녀라 해도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니까 말이다.
녀석의 목을 움켜쥔 채로 주변을 돌아봤다.
조금 어두운 실험실. 온갖 희귀 재료와 더불어 짐승, 마물, 그리고 인간의 사체가 섞인 키메라의 실험 흔적이 보인다.
“쯧. 마녀나 흑마법사 녀석들이 하는 짓이란 게 다 이따위지.”
이 쓰잘데기 없는 실험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을까.
심지어 그것이 조릭 형님의 가족이 될 뻔했다고 생각하니 단단히 열이 뻗친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키메라 실험을 하든 인간의 영혼으로 환수를 소환하든 별로 개입할 마음은 없었어.”
내가 무슨 전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영웅도 아니고, 일일이 악당들을 찾아 그들을 소탕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넌 건드리지 말아야할 사람을 건드렸어. 하! 지금 생각해도 열 받네. 감히 조릭 형님의 가족을 건드려? 씨발,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형님의 죽기 전 부탁을 못 들어줄 뻔했잖아!”
뿌드득!
“컥!”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녀석의 목이 기이하게 돌아갔다.
“그냥 죽어!”
조금은 고통스럽게 죽여볼까도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가학적인 취미는 없다.
뿌득!
그래서 곧장 힘을 주어 목뼈를 작살냈다.
툭.
힘없이 늘어진 시신이 지면에 허물어진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사아아아-
눈, 귀, 코 등 신체의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하여 회색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지금의 모욕을 반드시 갚아줄 테니...」
암령이라는 힘, 그리고 주술은 끈질김의 힘이다.
죽여도 죽인 게 아닌 게 얼마든지 다른 육신에 빙의하거나 혹은 마련한 인형을 통해 부활할 수 있는 것.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회색의 연기가 바로 그 끈질김의 원천이다.
이미 사방으로 넓게 흩어져버리고 있는 회색 연기.
아마 보통의 상황이라면 만질 수도, 그리고 물리력을 가할 수도 없는 연기를 보며 발을 동동 굴러야 정상이겠지만.
“미안하지만, 너에게 다음은 없어.”
원한이 사무친 여인을 살려두는 건 나도 조금 무섭거든.
「처음 그의 검은 무디고 보잘것없었다.」
고요한 호수와도 같았던 의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셀 수 없이 많은 낮과 밤이 지났을 때 그의 검은 잘 벼린 보검이 되어 있었고.」
우우웅!
내 의지가, 그 무한한 힘이 날카로운 보검 한 자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또 셀 수 없이 많은 낮과 밤이 지났을 때 그의 검은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명검이 되었다.」
스으으-
모든 것을 베는 날카로운 예기가 장내를 지배하며 살얼음판으로 만들었다.
아니, 그건 단순한 예기가 아니었다.
회색 연기가 더는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일정한 영역을 차단하는 결계를 형성하는 힘.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억겁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그의 검은 유일한 존재마저 벨 수 있는 신살(神殺)의 검이 되었다.」
파지직!
엄청난 기운의 발생으로 인해 스파크가 튄다.
그리고 그 스파크가 모두 사라질 무렵 날카롭게 벼려진 명검은 마치 가지가 뻗어난 것처럼 기이한 형태로 변해 있었다.
「이럴 수가! 이건, 이건...아니야! 그럴 리...」
그 기운을 감지한 마녀가 경악하며 자신의 의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응. 봐줄 수 없어. 사라져.”
내 의지로 벼려낸 검, 신살의 의지를 실은 미스틸테인(Misteltein)을 쏘아 보냈다.
허공을 선회하던 미스틸테인은 이내 한 곳을 향해 맹렬하게 나아갔고.
푸욱!
분명 연기밖에 없는 빈 공간을 갈랐을 뿐인데 마치 살갗을 꿰뚫은 소음이 울려 퍼졌다.
「끄윽...」
그리고 들려오는 마녀의 신음.
아무리 형체가 없어도, 모든 물리와 마법 공격을 피할 수 있다고 해도 신살의 검을 피할 순 없다.
「어떻게...이런 힘을...?」
“너도 수백 년간 지옥에서 굴러봐. 미치지 않고 멀쩡히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 정도 힘을 가질 수 있을 테니.”
물론 그건 불가능의 영역이겠지만 말이다.
파앙!
곧 힘을 잃은 회색 연기가 안개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조금 전과는 달리 그것은 마녀의 힘이 사라졌음을, 그녀가 소멸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흠...”
마녀를 소멸시킨 후 잠깐 주변을 살폈다.
끔찍한 연구 결과물. 이것이 놔두거나 다른 이에게 넘어가봐야 좋을 게 없으니.
“읏...”
마기를 모아.
“...차!”
폭발시키듯 한 번에 내뿜었다.
콰콰콰콰!
마치 폭풍과도 같이 사방으로 뻗어나간 마기는 소멸의 힘을 담고 있었고.
파스스!
닿는 모든 것을 한 줌의 먼지로 만들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났을 때 내가 서 있는 곳은 실험실이라 불릴 만한 곳이 아니게 변했다.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는 휑한 공간.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실험실의 연구 결과는 물론 나의 흔적마저도 모두 지워버렸다.
이제 할 일은 끝.
「만수의 왕이시여.」
아니, 아직 이 녀석이 남았구나.
흠. 이 녀석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
"일단 같이 가자."
당장 시간이 없으니 일단은 함께 이동하는 게 좋겠다.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똥개마냥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녀석과 함께.
【공간 이동】
공간 이동을 펼쳐 실험실에서 벗어났다.
*
한바탕 소란이 끝난 직후의 실험실 안.
콰아아!
마력의 집중과 함께 공간과 공간을 지나다닐 수 있는 포탈이 열렸다.
붉은 마나를 담은 포탈의 생성과 함께.
저벅- 한 사람이 그곳에서 걸어 나왔다.
“...”
사자를 형상화한 은빛 가면을 쓴 그는 사태를 파악하듯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무런 흔적도 없는 실험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실험실은 온갖 너저분한 재료와 사체로 가득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재료는커녕, 실험실이었다는 것 자체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사내는 깊은 의문이 빠졌다.
벨로아의 생명 신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선 곧바로 이동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위대한 일원 중 하나인 회색의 마녀가 당했다는 사실도 믿어지지 않았다.
‘일단은 흔적부터.’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곤 마나를 일으켰다.
【기억의 탐색】
곧장 8써클 마법 기억의 탐색을 펼쳤다.
대지, 공기 등 특정한 공간에 남은 흔적을 탐색하는 고등급의 마법.
“음?!”
하지만 이내 사내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의 탐색을 펼쳤음에도 나타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것처럼 실험실 안에 있던 모든 흔적이 백지처럼 사라져버렸다.
“어떻게?”
9써클 마법을 난사라도 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토록 깨끗하게 모든 흔적이 사라질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실험실 안이 너무 깨끗했다.
9써클 마법이 난사되었다면 이곳이 이토록 멀쩡한 형상을 유지하진 못했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미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겠군.”
예감이 좋지 않다.
대계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 지금 변수가 발생하다니.
얼른 이 일을 위대한 일원들에게 알려 이에 대해 대비할 수 있도록 알려야 할 것이다.
【공간의...】
마나를 집중하여 포탈을 열려던 사내.
하지만 그가 마법을 완성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잡았다, 요놈!”
“컥!”
마치 마술처럼 그의 앞에 나타난 아서가 목을 움켜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 손길에 의해 맥이 풀리듯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마나를 일으킬 수 없는 상태가 된 사자 가면의 사내는 힘없이 들어올려져 발버둥 쳤다.
“내가 맹세했거든. 조릭 형님의 가족을 건드린 모든 개자식을 정리하겠다고.”
맹수와도 같은 눈빛을 빛낸 아서.
짧은 대화를 통해 마녀 벨로아의 배후에 세력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 그는 흔적을 지운 채 지금껏 잠복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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