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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안드로말리우스.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비록 녀석을 소멸시킨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모습은 내 뇌리에 강렬히 남아 있다.
그것은 녀석이 지배하는 1계층에서 모든 동료를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상대했던 마신 중 가장 어려웠던 상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강함만으로 따진다면 서열 1위의 ‘바알’이 가장 강했다.
그 녀석은 창조의 영역에 다다른, 그야말로 신이라 부를 만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안드로말리우스는 내가 상대해야 했던 최초의 마신.
가장 나약했던 시기에 만난 존재였기에 체감상 더 강한 상대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확실히 알 수 있다.
블레니오에게 강림한 저 존재는 예전 내가 알던 그 안드로말리우스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 비슷한 기운을 풍기고는 있지만, 과거의 그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계약을 이행하겠다.」
완전히 핏빛으로 물든 섬뜩한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죽어라!」
녀석의 손에서 나온 검은 가시 채찍이 내 몸을 휘감았다.
“고통의 가시?”
「호오. 고통의 가시를 알고 있느냐?」
모를 리가 있겠냐.
한 번 쏘이면 죽기 전까지 계속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느끼는, 안드로말리우스가 누군가를 고문할 때 자주 사용하던 무기다.
‘이것 봐라?’
하지만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고통의 가시로 만든 채찍은 얼마든지 양산할 수 있는 무기에 불과하니까.
「나약한 자여. 영원한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거라.」
꽈악- 녀석이 손에 힘을 주었고, 내 몸을 휘감은 고통의 가시가 육신을 조였다.
“고통은 무슨.”
「음?!」
하지만 내가 영원한 고통에 몸부림칠 일은 없다.
내 육신을 보호하고 있는 건 검붉은 형상의 투기의 갑옷.
단탈리온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깨달은, 의지의 극이 만들어낸 형상.
「투, 투기의 갑옷?!」
놀란 녀석이 소릴 지른다.
관리자 중에서도 소수의 이들만이 다룰 수 있는 투기의 형상을 인간 따위가 다루고 있으니 깜짝 놀랐을 것이다.
“흡!”
한 차례 힘을 주어 투기의 갑옷을 팽창시켰고.
투툭!
내 육신을 감싸고 있던 고통의 채찍을 끊어버렸다.
「어찌 인간 따위가 투기의 갑옷을?」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나 죽인다는 마신 어디 가셨나?”
의문에 대한 답을 해줄 이유는 없다.
다만 내게 필요한 건 녀석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건방진!」
파앙!
녀석이 뿜어낸 마기가 충격파처럼 장내를 휩쓸었다.
물론 내 투기의 갑옷에 닿은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지만.
팟- 찰나의 순간 녀석이 사라졌다.
「여기다!」
등 뒤에서 나타난 녀석이 고통의 채찍을 휘둘렀다.
쐐애액!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쇄도한다.
‘일단 사용 능력은 비슷한데...’
그러나 과거 안드로말리우스와 비교하면 격이 다르다.
쾅- 마투기를 두른 주먹으로 채찍을 쳐냈다.
아무리 궤적이 변화를 준다 해도 내 감각을 속일 순 없다.
「흥!」
콧방귀를 낀 녀석의 육신이 다시금 사라졌다.
팟.
오른쪽에서.
파팟!
왼쪽에서.
파파팟!
하나가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리저리 공간을 옮겨 다닌다.
‘공간 뛰어넘기.’
그것은 안드로말리우스의 고유 권능인 ‘공간 뛰어넘기’다.
공간과 공간 사이를 마음껏 넘나들 수 있는 녀석의 그 능력으로 인해 과거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직도 치가 떨릴 정도다.
물론 지금의 내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쾅, 콰쾅!
시야의 사각을 노리는 공격을 쳐낸 후.
아공간을 열어 손잡이부터 검신까지 일체형으로 만들어진 자색의 검 하나를 꺼냈다.
「아공간?!」
내 전용 아공간을 보더니 화들짝 놀란다.
아마 녀석은 놀라기 위해 이곳에 소환된 게 아닐까?
「어떻게 인간 따위가 아공간을...?」
“거참, 말끝마다 인간, 인간. 하여간 너희는 판에 박힌 것처럼 왜 이렇게 똑같은 말만 반복하냐?”
과거 상대했던 72마신 모두 나약하니 필멸자니, 인간이니, 이런 말을 자주 사용했었다.
괜히 불쾌한 기억이 떠오른다.
슥!
그 감정을 그대로 담아 검을 내리그었다.
「크큭. 그깟 인간의 검으로 나를 잡을 수...」
푸확!
그러나 녀석은 말을 잇질 못했다.
갈라진 가슴팍에서 새어 나온 검은 피 때문이다.
「...무, 무슨?! 분명 공간을 뛰어넘었건만.」
“그래. 그래서 공간 자체를 아예 갈라버렸지.”
「뭣이?!」
“혹시 아는지 모르겠네. 바리사다(Balisarda)라고.”
나는 녀석에게 미끼를 던졌고.
「바, 바리사다? 설마 사라진 관리자의 신물(神物)을 말하는 것이냐?」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맞아. 이게 서열 29위의 마신 아스타로트가 지니고 있던 신물 바리사다다.”
나는 녀석이 보란 듯 바리사다를 흔들어 보였다.
자, 얼른 더 떠들어 보렴.
네 녀석이 뭐하는 녀석인지 대충 파악해야 할 것 같거든.
「어떻게 사라진 신물을? 아니, 그것은 너희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게 아니다.」
조금 전 당황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붉다 못해 당장에라도 피를 쏟을 것처럼 붉어진 혈광.
그것은 녀석의 탐욕을 상징하고 있었다.
뿌득, 뿌드득.
마기의 집중과 함께 육신이 변화했다.
연약한 피부는 마치 곤충의 외피처럼 단단하게, 손과 발은 길쭉하게, 그리고 칼날과 같이 날카롭게 변했다.
‘외형도 좀 닮았고.’
과거 상대했던 안드로말리우스와 외형은 흡사하다.
완전한 변태를 한다면 더 확실히 알아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마계가 아닌 이상은 그 진체(眞体)를 확인하는 건 힘들 터.
「신물을 내놓아라!」
변태를 마친 녀석이 협박한다.
“응. 못 가져가.”
육신의 변태로 자신감이 상승했을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적당히 알아볼 걸 봤으니 폭력을 행사해야 할 순간이다.
“합!”
기합성과 함께 숨겨두고 있었던 마기를 방출했다.
콰아아아- 무한한 내 마기가 성난 파도와도 같이 주변을 휩쓸었고.
콰챵!
팽창하는 마기를 이겨내지 못한 고유 결계가 박살났다.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은, 고작해야 기세를 방출하는 것만으로 결계가 깨어지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뭐, 뭐?」
안드로말리우스라 주장하는 녀석이 경악했다.
“놀라기는 아직 이를 텐데?”
마기를 방출한 건 비단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바리사다에 마기와 의지의 합작품, 마투기를 주입했다.
웅웅!
검신은 미친 듯 떨리며 자색 빛은 더욱 선명해진다.
「베어라.」
마기와 의지가 담긴 일격.
서걱!
「크악!」
공간 그 자체를 베어버리는 바리사다의 권능을 흘리지 못한 녀석의 팔이 떨어졌다.
그리고.
서걱, 서걱!
「끄으윽...」
나는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고 녀석은 저항하지 못한 채 팔과 다리를 모두 잃었다.
이야기를 듣는 데 필요한 건 머리뿐. 그렇기에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히 정리했다.
「이 기운은...다, 당신은 설마...?」
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벌레 보듯 나를 바라보던 녀석의 태도가 바뀌었다.
말투는 물론 나를 바라보는 입에서 녹색 타액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설마 그걸로 정신 놨냐?”
고작 팔과 다리가 잘리는 고통에 마신을 자처하는 녀석이 정신을 놓는다고?
이건 좀 예상과는 다른 분위기로 흘러가는데?
털썩!
하지만 다음 순간 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이 자존심 강한, 안드로말리우스라 자처하는 마족 녀석이 몸뚱이를 기울여 부복의 자세를 취했다.
「미, 미천한 종이 위대하고 위대하신 마신왕을 배알합니다...」
눈물 콧물을 질질짜며 감동에 겨워한다.
"뭐, 뭐? 마신왕?
그런데 갑자기 이 녀석이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 거지?
*
칠흑에 물든 공간.
누구도 찾아올 수 없고,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심연 속에서 그녀는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구원해줄 수 있는 건 기도뿐.
오직 그것만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인 것처럼 그녀는 기도했고, 또 기도했고, 또 기도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화악!
창공에서부터 환한 빛이, 따스한 기운을 품은 빛이 그녀를 포근하게 감쌌다.
「때가 왔다.」
심연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음성에 그녀는 반응했다.
‘어떤 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녀가 물었고.
「악의 별이 대륙에 떨어졌으니.」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아니, 그건 한둘이 아니었다.
「마침내 마왕이 강림하였다.」
마왕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감았던 눈을 떴다.
화악- 그것은 평범한 눈동자가 아니었다.
마치 광휘를 박아넣은 것처럼 그녀의 눈동자는 밝은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를 비추고 있는 머리 위의 광명처럼 말이다.
「마왕은 악의 정점.」
「그 사악한 힘은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시체가 산처럼 쌓이며.」
「가엾은 인간들을 도탄에 빠뜨릴 것이다.」
마치 세뇌하듯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리고 그 속삭임이 이어질수록 그녀의 마음, 무의식 깊숙한 곳에 마왕이라는 존재에 대한 분노가 커져만 갔다.
「광명의 사도 킬리아 에스텔라여. 맹약을 이행할 때다.」
「지금 당장 트리안 왕국으로 이동하여 악의 근원을 제거하라!」
‘위대하신 분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기도를 위하여 두 손을 모으고 있던 그녀가 마침내 손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사아아아- 오직 칠흑만이 존재하던 주변의 풍경이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 모든 게 변했고.
“끄으윽...”
가장 먼저 들려온 건 고통에 찬 신음이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가 눈앞의 적, 마인(魔人)을 응시했다.
회색에 가까운 피부와 날카로운 송곳니. 그리고 언제든 살점을 떼어낼 것만 같이 길게 솟아난 손톱. 무엇보다 사악함이 물든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심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광명의 심판을 받아라!”
그녀의 손에 들린 모닝 스타가 그대로 마인의 정수리를 가격했다.
콰직!
엄청난 힘이 실린 그 일격에 마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허연 뇌수를 흘린 채로 즉사하고 말았다.
마인을 상징하는 보라색 피가 순백의 갑옷, 그리고 얼굴에 튀었지만, 그녀는 닦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사륵- 시야를 방해하는 금발을 위로 쓸어넘긴 그녀는 주위 상황을 관찰했다.
“끄악!”
“꺼윽...”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물론 그건 그녀의 동료들인 광명의 심판관들이 아닌 절망의 군도를 불법 점거하고 있던 마인들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위대한 이들의 뜻에 따라 절망의 군도 정화도 끝이 나간다.
“킬리아 에스텔라. 광명의 성녀로서 대륙의 위협이 될 악을 제거하겠습니다.”
광명의 성녀 킬리아 에스텔라.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여섯 개의 별, 육망성(六芒星)의 일인 중 하나인 그녀가 트리안 왕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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