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 3723799
#
Chapter 16
“본래 블레니오 폐하는 현명한 왕이었습니다. 백성을 생각하는 성군이었으며, 왕권을 강화하여 귀족 중심이었던 권력을 가져왔으며 외적으로는 나라 간 외교 중립을 지키며 부강한 트리안 왕국을 만드는 데 앞장서셨지요.”
그락 요새를 점령한 후 왕성으로 가는 길.
막간을 이용해 블레니오에 대한 것을 물었고, 플레아는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폭군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내가 들었던 것과는 내용이 조금 다르다.
“지금은 그렇지만, 과거에는 전혀 달랐습니다.”
“과거에는 훌륭한 왕이었다?”
“네. 불과 1년 전만 해도 블레니오 왕께서는 성군이라 불릴 정도로 모두가 칭송하던 왕이었습니다.”
“고작 1년 만에 성군이 폭군이 될 수 있다니. 심경의 변화를 겪을 만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고?”
“제가 폐하의 곁을 항상 지켰으나 그리 큰 사건은 없었습니다.”
“글쎄.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건 모르는 법이지.”
“...다만 한 가지 의심스러운 부분은 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플레아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1년 전. 자신을 늪의 마녀라 밝힌 이가 왕께 공물을 바친 일이 있었습니다.”
마녀?
설마 내가 아는 그 마녀?
“마녀가 공물을 바쳤다? 그리고 그 공물을 받았고?”
대륙에서 말하는 마녀란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궤를 달리하는 존재다.
마나와는 다른 암령(暗靈)이라는 특별한 힘을 이용하여 술법을 부리는 이들. 다만 그 힘을 빌려오는 이가 악마, 마족과 같은 사악한 존재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보통은 마녀가 공물을 보내오는 일도 없지만, 꺼림직한 그것을 받는 일도 거의 없지요. 하지만 왕께서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후로...”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는 거로군.”
“네. 해서 늪의 마녀라는 존재를 수소문했지만, 그 어디서도 마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공물을 바친 마녀가 갑자기 종적을 감췄으면 수상하게 생각할 만하지.
“그래서. 갑자기 변한 원인은?”
“짐작 가는 바는 있습니다. 종이입니다.”
“종이?”
“정확히는 책의 한 페이지입니다. 마녀가 보낸 공물 중에 일부로 뜯어낸 것 같은 한 장의 종이가 있었는데, 왕께서는 공물 중 그것을 항상 품에 가지고 다니셨습니다. 마치 소중한 보물을 대하듯이...”
“그 종이의 내용은 확인했고?”
“그게...어렵사리 확인한 종이에는 무언가가 적혀 있다거나 혹은 그림과 같은 게 없었습니다. 그저 백지였을 뿐이지요.”
아무런 내용도 없는 종이를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닌다?
확실히 어떤 마법적인 힘이 개입한 게 분명한 것 같다.
“해서 폐하께 한 가지를 청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부탁하려는지는 빤하네.
“그 원인이 되는 물건을 없애달라는 말이겠지.”
“맞습니다. 그 원인만 제거한다면 왕께서 다시금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그건 뭐, 그때 가서 생각해 보고. 그런데 이것 하나를 묻고 싶군.”
“네.”
“만약 마녀가 준 물건이 어떤 변화를 일으켰다고 단정 지어보지. 그럼 지금 블레니오가, 그 폭군이 1년간 행한 모든 죄가 없어지는 건가?”
“...”
“왕께서 저주받은 유물에 영향을 받아 반쯤 미쳐 있었고, 이제 그것이 사라졌으니 왕은 아무런 죄가 없다. 뭐, 그렇게 되는 거냐고 묻는 것이다.”
“...”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군.
녀석은 대답하지 못하지만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저주받은 물건의 영향이든 아니든, 내게 칼을 들이민 적을 용서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지금 플레아, 네가 바랐던 왕위를 주기 위해 움직이고 있음을.”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플레아는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왕성이 보입니다!”
플레아가 모종의 결심을 했을 무렵, 마침내 멀리 트리안 왕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을 돌린 타일로와 펠리드가 다가왔다.
수많은 요새를 공략했으나 녀석들의 옷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다.
그럴 수밖에.
애초에 녀석들과 후미의 병사들은 단 한 번도 나서지 않았으니까.
“폐하. 이번에도 홀로 적진에...”
“쉿!”
입술에 검지를 가져가 타일로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리고 말없이 왕성을 가리켰다.
“음?!”
“어어?”
그제야 현실은 마주한 녀석들이 신음을 토했다.
특히 플레아.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왕성을 마주한 그녀는 낯선 광경에 눈을 찌푸렸다.
왕성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검은 안개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저게 뭐지?”
일단 플레아도 보지 못한 광경이라는 것은 명백하군.
“무척 수상쩍은 기운이로군요.”
“평생 왕성에서 살았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군요.”
펠리드와 플레아가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렇군.
처음 본다 이거지?
“대륙에서 이 빌어먹을 기운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나는 익숙하다.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불쾌한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
“폐하, 이 기운의 정체를 아십니까?”
불안한 눈동자의 플레아가 물었고.
“마기다.”
“마기?!”
경악하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설마 그 마족들이 발휘하는...?”
“뭐, 그렇지. 펠리드, 타일로.”
“예, 폐하.”
“진영을 구축해라. 누구도 왕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변을 포위하도록.”
“그럼 폐하께서는?”
“뭘 물어? 진입한다.”
콰앙- 지면을 박차며 빠르게 왕성에 진입했다.
“폐-하아!”
뒤에서 타일로가 나를 애타게 불렀지만, 무시했다.
공간을 넘어 순식간에 성문 앞에 도착했다.
스으으- 검은 안개, 정확히는 마기가 넘실대며 내 접근을 경계했다.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기자.
츠츠츠츠츠!
마기가 물리력을 행사하며 접근을 방해했다.
“꺼져!”
파리를 쫓듯 가벼운 손짓.
파앙!
그것으로 간단히 마기의 방해를 뚫었다.
쯧! 마기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더럽게 허약한 녀석인 건 분명한 것 같다.
고유 결계 상태가 이리 부실해서야 원.
콰콰쾅!
앞을 막은 성문을 가볍게 부순 후 마침내 결계 안에 발을 들였다.
“후읍!”
이 공기, 이 온도, 이 습도.
미약하긴 하지만 내 뇌리에 남아 있는 기운이다.
“안드로말리우스!”
마계의 1계층, 핏빗 대지의 관리자였던 안드로말리우스.
그 씨부럴 녀석의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으으으...”
“위대한 왕 블레니오님을 위해...”
익숙한 기운을 만끽(?)하고 있는 내 주위로 마기에 지배된 이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결계에 가득 퍼진 마기에 취한 자들.
아마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를 것이다.
“쯧!”
가볍게 혀를 차며 정신을 집중했다.
스으으- 왕성 전체를 내 의지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리고.
“빙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기의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팟!
의지가 움직이기 무섭게 육신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었다.
콰앙!
앞을 막는 벽을 허물자 보이는 곳은 왕궁의 알현실이었다.
“무엄하다!”
“위대한 왕이 계신 곳이다. 예의를 갖춰라!”
붉은 카펫의 양옆으로 도열한 귀족들이 내게 호통을 친다.
그런데 상태가 좀 이상하다.
누군가는 팔이 4개, 또 누군가는 눈이 8개다.
아니, 팔이나 눈, 다리 개수가 늘어난 건 양반이지.
대부분 귀족이 곤충과 강제로 합성해놓은 것과 같은 기이한 형체를 띠고 있었다.
“아주 심하게 마기를 흡입하셨구만.”
받아들일 수 없는 마기를 흠뻑 들이긴 대가다.
물론 녀석들이 마기를 마시고 싶어서 마신 건 아닐 거다.
마기의 근원이 되는 존재와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일 터.
나는 변이한 귀족들을 무시한 채 왕좌에 앉은 사내를 응시했다.
“...”
팔에 턱을 괸 채로, 나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흠. 사도 나부랭이였나?”
그래. 뭘 기대했냐.
마신 녀석들은 내 손에 전부 소멸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아마 저 녀석은 마신들이 대륙에 남긴 어떤 유물을 취하여 그 힘을 일부 받았을 것이다.
“뭘하고 있느냐. 침입자를 죽여라.”
“예, 폐하!”
녀석의 명령에 주위의 귀족들이 달려든다.
서걱!
손날을 검처럼 펴서 가장 먼저 달려드는 녀석의 목을 날렸다.
“그렇지 않아도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더럽거든?”
마기에 침식당해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귀족을 죽이는 데 망설일 이유가 없다.
“크아악!”
“키익!”
피를 봤기 때문일까.
광분한 녀석들이 사방에서 달려든다.
“구제할 수 없으니 그냥 죽어라.”
손날을 빳빳이 세운 채로 반월을 그렸다.
스윽- 의지로 벼려진 반월형의 기가 달려오는 귀족 무리를 관통했고.
툭, 투툭!
육신에서 분리된 머리가 떨어졌다.
“겁 없이 덤벼대면 이렇게 되는 거지. 안 그래?”
그리고 왕좌에 앉은 블레니오를 응시했다.
“...네 녀석, 누구냐?”
“네가 그토록 무시하던 소튼 왕국의 왕.”
“그 망나니 왕자? 그럴 리가?!”
매번 이런 반응, 이제는 좀 지겹다.
“...설마 네 녀석...?”
의심의 눈초리.
녀석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겠다.
“내가 마신 녀석들의 사도 노릇이나 할 짬으로 보여?”
“감히!”
마신을 무시하는 발언 때문인지 분노한 녀석이 마기를 일으켰다.
화르륵!
허공에 생성되는 5개의 거대한 녹색 화염구.
보통의 화염과는 다른 그것은 마계의 불길을 끌어온 것이었다.
“마신을 모욕하고도 살아남으려 하지 마라.”
일갈한 녀석이 내게 불덩이를 날렸다.
“지랄하고 있네.”
마신도 직접 죽인 마당에 모욕도 못하랴.
콰콰쾅!
육신은 이미 폭발의 영향범위에서 벗어나 블레니오에게 당도했다.
“흡!”
“놀라긴 아직 이를 텐데?”
녀석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지이잉- 막 주먹이 녀석의 안면을 가격하기 전, 기이한 저항감이 발생했다.
마족이 발현할 수 있는 고급 기술 중 하나인 ‘마갑(魔鉀)’이었다.
마기를 몸 주변에 둘러 거의 모든 물리력을 차단하는 기술.
보통은 그로 인해 공격을 방어할 수 있겠지만, 나한테는 안 통하지.
퍽-“컥!”
내 주먹은 마갑을 무시한 채 녀석의 안면에 정확히 꽂혔다.
모든 마기를 뚫는 기술인 마투기가 안드로말리우스의 사도 따위가 구현한 마갑에 막힐 턱이 없다.
“이놈!”
그래도 나름 사도랍시고 얼른 정신을 차리며 마기를 발현한다.
콰콰콰!
마기의 파도가 몰아닥친다.
굉장히 열받은 듯 상당한 마기를 부여하여 쏟아부어 파괴의 힘을 행사했다.
솔직히 실망이다.
마계에서 보아온 사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
촤악!
손날을 이용해 그대로 마기의 파도를 갈라버렸다.
“크아악!”
마기의 파도를 가른 예기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블레니오의 가슴팍을 깊게 베었다.
“놈!”
무적이라 생각했던 공격이 파훼되자 눈깔이 돌아갔다.
콰쾅, 콰콰쾅!
녀석은 자신에게 주어진 마기를 마법으로 구현하여 내게 쏘았다.
불덩이, 얼음덩이, 바람의 칼날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나.
스윽!
나의 간단한 손날베기에 모두 소멸할 뿐이었다.
“어찌, 어찌 인간 따위가 이런 힘을?!”
거듭된 공격을 모두 파훼하자 놀란 녀석이 눈을 부릅 떴다.
특유의 나른함은 모두 사라졌고, 그 감정을 대신한 건 경악뿐이었다.
“너도 인간이거든. 사도가 됐다고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게 웃긴다?”
“짐은 마신의 선택을 받은, 대륙을 지배할 몸이거늘...”
정신이 나간 듯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다.
하긴. 수백 년간 심상을 단련하지 않은 인간이 마기를 받아들이는 건 무척 위험한 일.
특히 마신 정도 되는 존재의 마기를 ‘일부’라도 받아들이면 저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것이다.
“으아아아아!”
급격한 심경의 변화는 마기의 폭주를 일으켰다.
콰앙!
녀석의 육신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촉수의 형태로 변하여 주변을 마구잡이로 공격했다.
“볼 건 다 본 것 같으니...”
혹여나 뭔가 다른 게 있나 싶었다.
하지만 역시 녀석은 안드로말리우스의 일부 힘을 부여받은 사도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마계에서 보았던 사도와는 비교하는 게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만 죽어라.”
플레아의 부탁이고 나발이고, 마신의 사도가 된 녀석을 살려줄 마음은 없다.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는 귀족의 검 하나를 집었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스팟!
가볍게 횡으로 그었다.
그것은 타일로가 그토록 바라던 완벽한 베기, 무결점의 검.
“어떻게...?”
마기의 폭주가 멈춘 블레니오가 날 바라보고 있다.
“끝났다. 이제 더는 너를 괴롭히는 타락의 의지는 없을 테니 편히 쉬어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툭- 멀쩡히 붙어 있던 녀석의 머리가 지면을 굴렀다.
“쯧. 그러게 모르는 사람이 물건을 주면 함부로 받으면 안 되지.”
플레아가 말했던 그 종이가 아마 녀석을 사도로 타락시켰을 터.
분에 넘치는 힘을 탐한 대가는 비참한 죽음뿐이다.
아, 물론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래도 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네 운명인 것을 어쩌겠냐.
블레니오의 죽음을 확인한 후 등을 돌렸다.
마기의 근원을 제거했으니 이제 곧 왕성도 정상을...
「크큭. 나약한 자여, 그러게 진즉 육신을 넘기라 하지 않았느냐.」
생각지 못했던 낮은 음성이 파고들었다.
발을 멈춰 세운 채 몸을 돌렸고.
쿠쿠쿠쿠쿠쿠!
어마어마한 마기의 폭풍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뿌드득!
떨어진 목을 몸에 이어붙이는 블레니오, 아니 그에게 강림한 어떤 존재.
「계약은 이루어졌다. 나 72마신의 일원인 안드로말리우스는 계약에 따라 복수를 이뤄주겠노라!」
잠깐?
안드로말리우스?
내가 아는 그 핏빛의 대지, 1계층의 관리인 안드로말리우스?
그럴 리가!
“누구세요?”
보고 보고 또 봐도 녀석은 내가 아는 그 안드로말리우스와는 전혀 다른 기운과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