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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만에 절대자로 귀환-16화 (16/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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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15

    서걱!

    스톰브링어에 깃든 난폭한 예기가 적을 베었다.

    수백 년간에 걸친 숱한 전투로 익숙해진 행위. 그러나 지금 아서는 쓰러진 적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 수밖에 없었다.

    「왕자님...」

    그를 보며 절규하는 적.

    그는 오래전 함께 마계를 헤쳐나갔던 원정대원인 얀센이었다.

    정 많고 수다스러운 성격 때문에 원정대의 분위기를 담당했던 17살 소년. 가정 형편 때문에 팔리듯 마계 원정대에 합류하게 된 그는 스톰브링어에 가슴이 베이며 폭포수와도 같은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얀센...”

    입술을 비집고 나온 그 이름.

    하지만 아서는 언제까지 얀센을 바라볼 수 없었다.

    「어째서 혼자 살아남으셨습니까?」

    「이젠 우리를 잊은 겁니까?」

    「왜 왕자님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야만 하는 겁니까!」

    사방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이들의 절규가 들린다.

    둥글게 포위망을 형성한 그들은 얀센과 같이 소중한 원정대 동료들이었다.

    ‘아니다. 녀석들은 이미 죽었다. 이건, 이건 그저 녀석이 만들어 낸 환영에 불과하다!’

    아서는 부정했다.

    분명 실제와 같으나 이곳에 있는 게 원정대원일 턱이 없다.

    그들은 오래 전에 모두 죽었다. 빌어먹을 마계의 관리자들과 그들이 만든 허구의 세계에 사는 괴물들에 의해.

    “허상은 사라져라!”

    콰콰콰콰!

    폭풍과도 같은 기운이 사방을 휩쓸었다.

    「크악!」

    검기에 당한 원정대원, 아니 관리자가 만든 환상이 쓰러진다.

    「어, 어째서?!」

    「왕자님!」

    「저희를 잊은 겁니까...?」

    쓰러지는 그들은 절규했고, 그것은 고스란히 아서의 심상에 박혔다.

    “...”

    질끈 깨문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오랜 세월, 그리고 숱한 전투로 심상은 그 무엇보다 단단해졌다고 여겼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극복하지 못한 게 있으니. 그것은 원정대원이었다.

    수백 년이 지나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그의 심상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린 원정대원에 대한 감정이 그를 괴롭혔다.

    「나약한 자여. 그것이 환상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방에서 웅웅대는 듯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벨레드!”

    상처 입은 사자는 59계층의 관리인 벨레드의 이름을 외쳤다.

    “비겁하게 환영 뒤에 숨어 있지 말고 당장 나와 승부를 보자!”

    아서는 적을 도발했다.

    원정대원의 환영보다 초월의 영역에 있는 관리자를 상대하는 게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환영이라. 어리석구나. 그것은 짐이 만들어 낸 허구가 아니다. 짐은 모든 계층의 영혼을 관리하는 자. 네가 베어내고 있는 그들은 네가 한 때 사랑하였던, 상처를 입은 영혼이다.」

    “닥쳐!”

    하지만 아서는 부정했다.

    아니, 부정해야만 했다.

    만약 벨레드의 말처럼 이곳에 있는 모두가 진짜 원정대원이라면, 상처 입은 영혼이라면 정말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죽어, 죽어!”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던 심상에 균열이 일었다.

    한 번 균열이 일기 시작하자 거침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흐아압!”

    거친 함성과 함께 스톰브링어의 능력이 개방된다.

    콰콰콰콰콰콰콰- 검의 폭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으아악!」

    검의 폭풍에 휩쓸린 원정대원의 비명.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

    아서는 그곳에 홀로 서 있었다.

    살점 하나, 핏방울 한 점도 남기지 못한 원정대원은 모두 소멸하였다.

    “벨레드!”

    심마를 이겨낸 아서가 소리쳤다.

    이제는 벨레드. 59계층의 관리자인 그만이 남았다.

    「하하하. 나약한 자여. 짐이 내리는 그대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끝나지 않았다.

    스으으- 검은 안개와 같은 기운이 장내를 휩쓸었고.

    「왕자님...」

    「왜 우릴 죽이시는 겁니까?」

    「아픕니다...괴롭습니다...」

    「제발, 그만 죽어 주십시오...」

    안개는 원정대원을 형상화했다.

    벨레드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쿨럭!”

    심마를 이겨내지 못한 아서는 기어이 선혈을 토해내고 말았다.

    검게 죽어 있는 그것은 그의 심적인 상처를 보여주는 것.

    푹푹!

    결국, 심마에 먹힌 아서는 원정대원의 공격에 저항하지 못했다.

    「육신은 분명 초월의 영역에 도달하였으나 정신은 미숙하기 그지없구나.」

    하지만 아서는 벨레드의 말에 반응할 수 없었다.

    이미 심마에 빠져버린 그는 달려드는 원정대원의 공격을 온 몸으로 받고 있었다.

    ‘끝인가...?’

    더는 생을 이어갈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벨레드의 함정이라도 해도 한 번 꺾인 의지를 일으켜 세우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서는 그렇게 심마에 잡아 먹히고 있었다.

    「포기하시는 겁니까?」

    “?!”

    의식이 심연에 녹아들 무렵 들려온 음성.

    고개를 든 아서는 다른 원정대원과 달리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셀론?!”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셀론.

    창을 꼬나쥔 그는 슬픈 눈빛으로 아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찰나에 불과했다.

    「왕자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육신을 유린하기 위해 다가온다.

    콰직!

    육신에 꽂힌 검과 창을 부러뜨리며 몸을 일으킨다.

    “...아직 나는 이뤄야 할 게 남아 있다.”

    심마는 떨쳐냈다.

    균열은 오히려 오히려 그의 심상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으며, 의지는 하나의 검과 같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계속 일어나봐야 고통만 더...」

    “닥쳐, 이 씨발 새끼야!”

    거친 욕설을 내뱉은 아서는 의지를 일으켰다.

    쿠쿠쿠쿵!

    놀랍게도 그의 의지는 59계층의 핏빛 하늘을 가득 메우는 거대한 검을 만들어냈다.

    「뭐, 뭣이?!」

    자신의 영역 가득한 절대적인 의지에 벨레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나약한,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인간의 의지가 이토록 강렬할 수 있단 말인가?

    “어디 한 번 살려봐. 네 녀석이 죽어서도 살릴 수 있는 지 두고 볼 테니.”

    원한이 가득 담긴 아서의 일갈과 함께.

    콰콰콰콰콰콰쾅!

    마침내 첫선을 보인 대살상의 검 모글레이가 59계층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

    칼의 노래, 모글레이에 깃든 기억의 편린이 내 심상에 멋대로 침입했다.

    음.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괜히 요즘 사람이 좀 감상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마, 맙소사!”

    모글레이가 만들어낸 참상을 본 플레아가 입을 가리며 경악한다.

    흘깃 그 반응을 보다가 정면, 트리안 왕국의 병사들을 바라봤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죽음을 경험한 병사들이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발현한 모글레이는 녀석들을 덮치지 않았다.

    정확히는 살짝 빗겨서 떨어뜨렸다는 게 맞을 것이다.

    일부러 빗겨나가게 한 의지의 검은 대지에 거대한 흉터를 남겼다.

    마치 전설에나 나올 법한 거신(巨神)이 검을 그어버린 것처럼 새겨진 흉터는 율리스 백작을 비롯해 인근에 있는 수백의 병사들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켰다.

    저벅-

    넋이 빠진 병사들을 향해 걸었다.

    “...”

    감히 그 누구도 내 걸음을 제지하지 못했다.

    마치 시간이 멈췄는데 홀로 움직이는 듯한 광경을 자아내며 느릿하게 걸어갔다.

    “짐이 아량을 베풀었다. 그럼 너희가 해야 할 일이 뭐지?”

    오만하게 선 채로 단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다.

    터텅!

    그 한 마디에 각자 손에 든 무기를 지면에 떨구는 병사들.

    “항복하겠습니다.”

    “폐하의 처분을 따르겠습니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깊숙이 부복한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내게 투항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대지의 흉터를 보게 된다면 없던 항복도 생겨날 판이다.

    “폐하!”

    후미에서 병사들을 챙기고 있던 펠리드와 타일로가 다가왔다.

    “하하하. 포로를 챙기셨군요.”

    무려 5천 명의 포로를 확인한 펠리드가 함박 웃음을 짓는다.

    “플레아님.”

    “네, 네?”

    그리곤 넋이 나가 있는 플레아를 불렀다.

    “트리안 왕국의 병사들이 투항했군요.”

    “네. 폐하의 놀라운 위용을 확인하였으니 당연히 항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그런데 어쩝니까. 이 많은 포로를 우리 왕국에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슬쩍 눈치를 준다.

    내 동생이라 말은 안 했지만, 참 똘끼가 넘치는 녀석이다.

    “아!”

    뒤늦게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플레아.

    “시간만 주신다면 포로 비용을 지불해 이들을 모두 구제하겠습니다.”

    “당연히 넉넉히 시간을 드리지요. 특별히 서약만 하신다면 지금 당장 포로를 인도해드릴 수 있는데 어떻습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포로 비용 지불에 관한 건이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장담하는데 저 영악한 녀석은 빠르게 흘러가는 이 시간을 이용해 가장 비싼 값에 포로들을 강매(?)할 것이다.

    아무래도 현재 왕국의 재정 상황이 그리 좋지 않으니 나름 신경을 쓰는 거겠지.

    역시 집안 살림은 저렇게 똑또한 녀석에게 맡겨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폐하, 도대체 이게 무엇입니까?”

    타일로였다.

    반쯤 넋이 나간 녀석은 대지에 새겨진 흉터를 바라보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보면 몰라. 검법이잖아.”

    “제가 생각하는 검법과 폐하가 생각하시는 검법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쯔쯔. 그러니까 네가 안 되는 거야?”

    “무엇이 말입니까?”

    “미리 한계를 짓고 있잖아.”

    “한계...?”

    “그래. 검법은 그저 검을 휘두르는 행위다. 그런 식으로 한계를 미리 정해 놓는데 어떤 발전과 성장이 있겠냐?”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르지 않습니까?”

    “현실은 이렇다, 이상은 이렇다. 도대체 누가 그걸 정해놨지? 가능성은 무한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한계를 짓지 마. 네 심상을 무한히 확장하여 제한을 두지 않는 것. 그것이 의지를 움직일 수 있는 첫 걸음이니까.”

    물론 녀석이 이 심오한 뜻을 알아들을 턱이...있나?

    “...”

    몽롱한 듯 넋이 나가버린 눈빛.

    쉼없이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마계에서 수없이 겪은 저 증상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이 미친 재능 같으니. 그걸 주워 먹은 거야?’

    그냥 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뭐랄까. 3살짜리 꼬맹이에게 심오한 제왕학에 관한 한 구결을 들려준 정도?

    그런데 그걸 주워 먹는다.

    세상에 많은 천재들이 있다지만, 이 새끼는 진짜가 틀림 없다.

    “폐하...”

    “쉿!”

    플레아가 다가왔으나 깨달음을 얻는 중인 타일로를 배려하여 그 자리에서 이동했다.

    “무슨 일이지?”

    “펠리드 왕자와 포로 협상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끝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펠리드를 응시했다.

    찡긋- 저 짓거릴 하는 걸 보니 꽤 후한 값을 약속받은 것 같다.

    “비록 정예 병력은 아니나 5천의 병력을 잃었으니 그들도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이제 병력을 정비하여...”

    “정비?”

    “당연히 폭정을 끝낼 반군을 조직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얘가 못하는 말이 없네.

    “짐이 분명 지금 너의 바람을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네?”

    “트리안 왕국의 폭군 블레니오의 목은 오늘이 지나기 전에 지면을 구르게 될 것이다.”

    이래 뵈도 할 일 많은 사람이야.

    고작 트리안 왕국의 왕을 잡는 데 하루 이상의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

    트리안 왕국의 알현실.

    중요 귀족들이 모두 모인 그 자리는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폐, 폐하!”

    그리고 그 불안의 원인을 든 전령이 알현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래, 어떻게 됐느냐?”

    “겨, 결과는?”

    귀족들의 물음에 전령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꿀꺽!

    갑작스러운 침묵에 여기저기서 마른침을 삼킨다.

    표정만 봐도 결과를 알 수 있으나 막상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희망의 끈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적 병력이 지금 막 그락 요새를 함락...시켰습니다.”

    하지만 전령은 그들에게 절망을 선언했다.

    “아!”

    “결국...”

    소튼 왕국으로 보낸 5천의 병력이 당했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한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왕국 간 길목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가 있어 섣불리 그들이 왕국을 넘보진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비잔, 크라튼, 베오딘, 그리고 왕성의 마지막 보루인 그락 요새마저 함락되었다.

    “허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대체 정찰병들은 무얼 하고 있단 말이냐. 적의 규모를 파악해야 할 것이 아니냐!”

    4개 요새가 함락될 때까지 적의 규모라든지 병력을 이끄는 장군이라든지, 알려진 바가 단 하나도 없었다.

    정찰병을 보내는 족족 연락이 끊겨버린 탓이다.

    “모두 조용해라.”

    좌불안석인 귀족들을 진정시키는 나른한 음성.

    “폐하, 그러나...”

    “짐이 조용하라 하였다.”

    피가 묻은 것처럼 붉은 머리칼과 뚜렷한 이목구비.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나른함이 깃든 눈동자에는 누구도 모르는 혈광이 숨어 있었다.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왕좌.

    그곳에 앉은 사내가 바로 현 트리안 왕국의 정점인 블레니오 돈 디미트리 왕이었다.

    “짐이 있는 이상 누구도 이 왕좌를 넘보지 못할 테니 안심하라.”

    장내의 이들 중 유일하게 태연한 모습을 보여왔던 그가 왕좌에서 일어나자.

    고오오오!

    마치 검은 안개와도 같은 음습한 기운이 장내를 장악했다.

    “오오! 위대한 왕이시여!”

    불안과 긴장에 휩싸여 있던 귀족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블레니오 왕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다.

    생기가 돌던 눈동자는 흐릿하게 변했고, 육신은 마치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떨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현상.

    “짐은 마신의 선택을 받은, 대륙을 지배할 몸이니.”

    그리 중얼거리는 블레니오의 이마에 붉은 혈선이 그어졌다.

    기하학적인 문양. 그것은 마계를 지배하는 72마신 중 하나, 서열 72위의 마신 단탈리온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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