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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말도 안 되는 소릴!”
잠깐 당황하던 녀석은 이내 부정했다.
“뭐가 말이 안 되는데?”
“내가 아무리 보잘것 없는 평기사라 해도 어찌 폐하의 얼굴을 모를까. 나를 농락할 생각이라면 이만 돌아가 줬으면 좋겠소. 아니, 여기서 끝장을 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화가 난 듯 다시금 눈을 감아버린다.
음. 성향과 특성을 통해 조금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조금 이상한 정도가 아닌 것 같다.
저 소름 끼치는 말투 하며,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허세가 가득한, 말 그대로 영웅병에 걸린 놈의 전형이다.
‘재능이 사기라 참는다.’
하지만 재능을 생각해서 참았다.
그렇지 않아도 인재를 찾고 있던 중이었기에 녀석의 허세는 얼마든지 받아줄 용의가 있다.
“왕 맞아.”
“...”
대답은 없다.
하하하. 고 녀석 참 귀엽네.
이런 녀석은 평생 곁에 둬서 고이고이 잘(?) 써먹어 줘야지.
스릉- 그래서 곧장 데일을 빼 들었다.
“이거 보여?”
소튼 왕국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왕의 검 데일.
“...”
하지만 녀석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데일이라고. 봐, 여기. 이게 봐로 왕을 상징하는 검 데일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왕의 상징을 들고 있어도 보질 않으니 소용이 없다.
진짜 고집 하나는 와.
진짜다. 이 녀석은 진짜가 틀림없다.
“어떤 거짓과 사탕발림으로도 나를 회유할 순 없을 테니 그만두시오. 비록 육신은 꺾였으나 마음은 꺾을 순 없으니. 그만 나를 농락하고 이제 편안한 죽음을 선사해 주시오.”
아주 지랄을 하세요.
“야, 눈 떠 봐.”
“...”
어쭈, 대답 안 해?
그렇다면.
「눈을 떠라.」
강제로 뜨게 해 줘야지.
번쩍- 녀석의 의지를 배신한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이, 이게 무슨...?!”
내 의지의 지배에 놓인 녀석은 당황하며 신음했다.
아니, 정작 놀래야 할 건 나다.
나이도 얼마 먹지 않은 것 같은 애송이 녀석의 심상이 이렇게 단단하지?
마치 단단한 바위를 지고 있는 것처럼 녀석의 의지를 지배하는 게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저 정도 심상의 무게를 이렇게 일찍 쌓았을 정도면.
‘제대로 가르치면 대륙에선 적수를 찾아보긴 힘들 것 같네.’
물론 그건 녀석을 꼬셨을 때의 이야기지만.
당황하는 녀석을 빤히 응시했다.
어딜 봐도 삶을 포기한 모습이다.
이건 뭐 당장 내일 죽을 노인처럼 힘이 없어서는.
“너 살기 싫어?”
그래서 직설적으로 물었다.
“...”
여전히 묵묵부답.
뭐, 이게 정상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테니.
하지만 나는 굳이 속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굳이 사정을 알지 않아도 녀석을 단숨에 꼬실 방법을 알고 있다.
“입 닫고 있으려면 얼마든지 닫고 있어.”
너는 말할 필요 없다.
두 눈만 똑바로 뜨고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테니.
“두 번 펼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잘 봐.”
영광인 줄 알아라.
이건 나의 자랑스러운 동료 중 한 명이 창안한, 그의 유일한 검식이니까.
녀석이 무시했던 데일을 든 채로 자세를 잡았다.
스윽- 팔을 가볍게 들어 올려 검을 검 끝이 하늘을 향하게끔 수직으로 세운다.
힘?
기세?
그 무엇도 없다.
마치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고요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스팟!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가벼이 검을 내리그었다.
“후우...”
참았던 숨을 토한 후 녀석을 응시했다.
“봤냐?”
자, 말해 봐라.
과연 대단한 재능을 지닌 넌 여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
여전히 말은 없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다르다.
녀석의 눈은 마치 꿈에서 찾던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몽롱하게 변해 있었다.
“어, 어떻게...?!”
“아직 내 말에 대답을 안 한 것 같은데. 조금 전 검식에서 무엇을 봤지?”
뒤늦게 부릅뜬 두 눈이 내게 향했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제 번뇌를 베었습니다.”
말투는 어느새 존댓말로 바뀌어 있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공간과 시간을 베는 것까지야 예상했는데 심참(心斬)을 봤다고?
“어떻게, 어떻게 그리 완벽한 일검을 펼칠 수 있는 겁니까? 그, 그것을 저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말이 많아졌다.
조금 전 펼친 그 일검은 녀석이 꿈에 그리던 신의 한 수에 가장 가까웠을 테고 당연히 그것을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다.
이유는 모르나 삶을 포기했던 녀석의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지펴버린 셈.
“배우고 싶어?”
“배우고 싶습니다. 강력히 배우고 싶습니다. 저도 그 경지에 도달하고 싶습니다.”
“그럼 간단해. 당분간 내 밑에서 기사가 되어 일할 것.”
“...그렇게 하면 저도 그 일검을 펼칠 수 있는 겁니까?”
“그야 네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렸지. 여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 말에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그런데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누구시기에 이런 놀라운 경지에...”
“말했잖아.”
그리 말하며 푸른 마나를 뿜어대는 데일을 흔들었다.
“왕이라고.”
“어헉!”
그제야 데일을 확인한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팔 다리를 덜덜 떤다.
이제야 자기가 얼마나 막 나갔는지 짐작한 것 같다.
*
왕궁의 알현실.
“도대체 언제까지 날 기다리게 할 셈이오!”
좀처럼 소릴 내지 않는 그 공간에 성난 사내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지, 진정하시오, 셸린 백작.”
“폐하께서 곧 당도하실 것이니 진정을...”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흥분한 듯 얼굴이 시뻘게진 사내가 소릴 높였다.
비대한 몸집에서 쉴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땀으로 범벅인 이. 그는 소튼 왕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트리안 왕국의 셸린 백작이었다.
왕국의 사신 자격으로 왕궁에 도착한 그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감히 왕국의 사신을 이따위로 맞이해?’
그의 상식으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사신이 도착하기 무섭게 두둑한 뇌물과 환영 행사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드러난 현실은 전혀 달랐다.
환영 행사는커녕 벌써 3시간째 알현실에서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
“클루이안 공작가는 이리 대하지 않았거늘...”
어쩔 수 없이 클루이안 공작가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그가 사신으로 왕국에 도착했을 때 클루이안 공작가는 두둑한 돈주머니와 함께 거창한 연회를 베풀었다.
그래서 이번 사신 파견에도 은근 기대하며 도착했건만 이게 뭔가.
생각과 전혀 다른 홀대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장내에서 가장 높은 작위의 시리우스 백작은 곤란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어흠! 내 왕국으로 돌아가면 폐하께 소튼 왕국의 진심을 전달할 테니 어디 두고 보시오.”
그 말에 귀족들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같은 왕국이라고 해도 소튼과 트리안 왕국의 위상은 상당히 달랐다.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로 인해 마음먹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순식간에 소튼 왕국을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
물론 전쟁이라는 것이 그렇게 아무렇게나 벌일 수 있는 게 아닌 데다가 여러 정치적 목적이 결부되어 있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상대적으로 소국인 소튼 왕국으로선 인근의 트리안 왕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폐하는 언제 입궁하신단 말인가!’
덕분에 셸린 백작을 맞이한 귀족들은 죽을 맛이었다.
일체 권한도 없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아서 왕을 기다리는 것뿐.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셸린 백작의 안색이 붉어지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을 무렵.
“아서 델 알슈타드 폐하 드십니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서 왕이 입궁하였다.
“폐하를 알현합니다!”
“폐하를 알현합니다!”
장내의 모든 귀족이 상체를 깊숙이 숙이며 예를 표했다.
오직 한 명, 셸린 백작을 제외하면 말이다.
단단히 화가 난 그는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하여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왕을 맞이하였다.
*
‘하! 이 새끼 봐라?’
고개를 빳빳이 든 뚱보 녀석을 응시했다.
셸린 백작이라고 했던가?
건방지게도 녀석은 내 시선을 피하지도 않은 채 분노한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쯧. 이게 다 공작과 아버지의 업보로다.’
어떻게든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저자세로 나갔던 공작, 그리고 아버지가 행한 일의 결과였다.
사실 말을 안해서 그렇지 현재 상황이라면 소튼은 트리안 왕국의 속국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대가 트리안 왕국의 사신인가?”
나는 속내를 감춘 채 물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그런데 아직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신을 대우하는 방법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사신을 대우하는 방법?”
“거창한 것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국가를 대표하여 온 사신을 4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다니. 제가 이 섭섭한 감정을 그래도 보고한다면 소튼 왕국에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을 텐데 그것을 어찌 감당하시려 하십니까.”
하하하.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막 나가네.
아무리 소국이라지만 일국의 왕인 나를 공개석상에서 나무란다고?
도대체 아버지와 공작은 평소 어떤 모습을 보여줬기에 이 새끼가 이렇게 막 나올 수 있는 걸까.
슬쩍 주위 귀족들을 훑었다.
녀석들은 일개 사신에게 모욕당한 왕보다 사신의 기분이 상한 것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쯧. 아무래도 이 왕국은 뿌리부터 갈아엎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사신행의 목적은 무엇이지?”
더는 녀석의 불만을 듣기 싫어 본론을 물었다.
분위기를 봐서는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단은 아닌 것 같고, 분명 뭔가 음흉한 목적으로 방문한 것 같은데.
“흠흠”
헛기침으로 주위의 이목을 자신에게 쏠리게 만든다.
“이번에 우리 트리안 왕국과 북쪽 야만인들과의 전쟁이 가시화되고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북쪽 야만인들이라면 바르바 왕국인가?
평소에 감정이 좋지 않더니 결국 한바탕 할 생각인가 보군.
“모르고 있었소만?”
“최근 그들이 국경을 넘어 왕국의 영지를 약탈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위대한 왕 그레고릭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시어 북쪽 야만인들에 대한 엄벌의 철퇴가 내려질 예정입니다.”
흠. 바르바 왕국이라면 쉽지 않을 텐데.
다른 건 몰라도 그쪽 전사들의 용맹함은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편이라서.
“해서 우리 트리안 왕국의 보호를 받는 소튼 왕국에서도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바라는 것이오?”
“그레고릭 폐하께서는 소튼 왕국의 궁핍함을 생각하시어 노역에 필요한 사내 3천 명과 전방에서 고립되어 힘쓰고 있을 병사들을 위로할 계집 1천 명, 그리고 1만의 병사들이 먹을 식량 50일 치를 보내라 명하셨습니다.”
“아, 아닛!”
“그건 좀...”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눈치 보기 바쁘던 귀족들도 경악했다.
“이 정도면 그리 무리한 요구가 아니니 최대한 빠르게 조달해야만 할 것입니다. 허나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잠시 말을 흐린 녀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뒷일은 어떻게 될지 다들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하겠습니다.”
명백한 협박에 귀족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멀쩡히 잘 살고 있는 백성들을 노역꾼, 그리고 창부로 만들어 조달해라?”
“그렇습니다. 우리 트리안 왕국의 보호가 있기에 소튼 왕국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이를 위해 협조하는 건...”
“응. 안 해.”
더는 녀석의 개소릴 들어줄 생각은 없다.
“너희가 일으킨 전쟁에 협조할 생각 없으니까 얼른 그 더러운 엉덩일 들고 여기서 꺼져줬으면 좋겠는데.”
“폐, 폐하!”
“조금만 진정을...”
“하하하하하!”
돌연 큰 웃음을 터뜨리는 셸린 백작.
“지금 그 발언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트리안 왕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런 소국 따위는...”
스팟!
내 손에서 피어난 검광이 녀석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고.
툭- 조금 전까지 더러운 개소릴 지껄이던 목이 분리되어 지면을 굴렀다.
“아아!”
“폐하, 이 무슨!”
경악하는 귀족들.
사신을 죽인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재수 없는 대가리 잘 보관해둬. 사신을 보내서...아니다. 내가 직접 트리안 왕국으로 찾아가서 건방진 사신을 보낸 것에 대한 책임을 추궁할 테니.”
처음에는 그래도 좋게 받아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지들이 무슨 제국의 황제라도 되는 냥 생각하는 머저리들을 참교육할 시간이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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