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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핏빛 대지에 밤이 찾아왔다.
대륙의 밤과는 달리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의 공간.
벌써 몇 년째 겪는 밤에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아서 왕자를 비롯한 원정대는 긴장해야만 했다.
하필 오늘 1계층의 하늘을 장식한 것이 ‘푸른 마력의 달’이었기 때문이다.
“쒸-펄. 왜 또 푸르딩딩 달이야. 진짜 빌어먹을!”
원정대의 욕을 담당하고 있는 비에리가 하늘을 보며 불평을 내뱉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푸른 마력의 달이 뜰 때마다 원정대의 누군가는 죽었다.
이 밤을 지배하는 푸른 사신은 반드시 한 명의 생명을 먹어 치워야만 활동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 좀만 더 강해지면 푸른 사신, 그 새끼만 찾아서 아주 그냥 죽사발을 만들어 버릴라니까.”
“풉! 웃기고 있네. 아서 왕자님도 감당해내지 못한 녀석을 네가 무슨 수로?”
“어? 못 할 것 같지? 딱 기다려. 마기만 좀 더 쌓으면 한 방 거리도 안 되거든.”
“븅신. 지랄하고 있네.”
비에리와 노라의 시시껄렁한 잡담을 들으며 원정대는 전진했다.
긴장은 하고 있으나 푸른 마력의 달에서도 그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건 그들에게 새로운 아티팩트가 생겼기 때문이다.
“왕자님. 조금만 더 가면 안전지대가 나올 것 같습니다.”
애늙은이 소니아의 말에 그제야 원정대는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과거에는 없었고 지금은 있는 것. 그건 바로 안전지대를 찾을 수 있는 ‘밤의 나침반’ 덕분이었다.
100개의 눈을 가진 괴수 크트랄을 처치하여 얻은 이 마법의 아티팩트는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안전지대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무리 푸른 사신이 강하다고 해도 안전지대는 모든 위협으로부터 원정대를 지켜 줄...
“비에리, 멈춰!”
무언가를 발견한 아서 왕자가 경고했으나.
“네? 어...?”
미처 눈치채지 못한 비에리는 마법 함정을 밟고 말았다.
화악- 푸른빛이 육신을 감쌌고, 이마에 특별한 표식을 새겼다.
“사신의 표식...”
푸른 마력의 달이 떠오른 날 핏빛 대지 곳곳에는 푸른 사신이 설치한 마법 함정이 활성화된다.
이 마법 함정을 밟는 순간 그 생명체에게 사신의 고유 표식이 새겨지고, 표식이 새겨진 자는 반드시 푸른 사신의 방문을 받아야만 한다.
“비에리...”
이마에 새겨진 표식을 본 원정대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표식이 새겨진 자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최대한 동료들과 떨어져 곧 나타날 사신을 홀로 맞이하는 것.
“아니, 안전지대가 근처에 있다. 아무리 표식이 새겨졌어도 안전지대로만 가면!”
아서 왕자가 어떻게든 비에리를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하아아!
사신의 숨결은 이미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쒸펄. 재수도 더럽게 없지. 왜 다른 놈들도 많은데 나냐고!”
덜덜덜- 연신 욕을 내뱉고 있지만, 죽음을 직감한 그는 몸을 떨고 있었다.
마계에 떨어진 순간, 그리고 이곳의 특징을 알게 된 순간부터 죽음을 직감하였으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에리는 용감했다.
그의 의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원정대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었다.
타타탓!
하반신에 마기를 집중하여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다.
그렇게 달려나가던 비에리는 어느 순간 멈춰 서서 뒤로 돌았다.
“왕자님. 전에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소튼 왕국 출신의 비에리가 항상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었다.
왕국의 망나니라는 것에서 벗어나 훌륭한 왕자, 모두가 우러러볼 수 있는 이가 되라고.
“하지만 그건 제 소원이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꿈꿨던 진짜 소원은...”
하아아-
한기를 품은 사신의 숨결이 마침내 비에리에게 닿았다.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서 왕자님. 부디 훌륭한 왕이 되어 소튼 왕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주십시오.”
스으으!
그리고 찾아온 푸른 사신이 망토를 덮었다.
모든 생명을 빨아들이는 죽음의 망토는 그렇게 또 한 명의 원정대원의 목숨을 앗아갔다.
*
쓰읍.
어제 잠깐 비에리를 떠올려서 그런지 녀석과 관련된 꿈을 꿨다.
얼굴을 보는 건 좋지만, 그리 좋은 꿈은 아니어서 아침부터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촤르륵- 커튼을 걷어 창밖을 응시했다.
날은 이미 밝았다.
어제 좀 무리(?)를 해서 그런가. 세상 모른 채 잠을 잔 것 같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인기척을 느꼈는지 밖에서 시종장이 물었다.
“들어와.”
덜컥-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녀를 대동한 시종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난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후 첫 명령을 내렸다.
“치워.”
“네?”
“치우라고.”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
“시녀들 데리고 내 몸을 마구 닦게 할 거잖아.”
이것들이 할 일이란 게 빤하다.
저 많은 시녀와 함께 욕탕에 들어가 한바탕 묵은 때를 벗기겠지.
“폐하! 폐하의 옥체는 함부로 다루면 안 되는 귀한...”
“내 몸이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시녀들을 물려.”
“허나...”
“쓰읍!”
“아, 알겠습니다.”
내가 매섭게 노려보자 그제야 시녀들을 물린다.
어제 반란군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봤을 테니 감히 반항할 엄두가 나지 않겠지.
“시종장, 이름이 어떻게 되지?”
“에르덴입니다, 폐하.”
“음, 그래. 에르덴. 앞으로는 시녀들을 데리고 하는 이런 건 모두 생략하도록 해.”
“허나, 폐하...”
“다 허례허식이야. 내가 무슨 제국의 황제도 아니고. 게다가 우리 왕국 궁핍하잖아.”
“아!”
그 순간, 마치 단단한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에르덴이 눈을 크게 떴다.
“폐하께서 검소함을 실천하시어 모든 귀족과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주려 하고자 하신 것, 충분히 이해하였습니다.”
음?
그렇게 거창한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라 그저 남이 내 몸을 만지는 게 싫어서 그랬을 뿐인데.
“아니...”
“과연 폐하이시옵니다. 지금 당장 이 사실을 알려 새롭게 거듭날 왕실의 법도를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래.”
결국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나쁠 건 없으니 그냥 알아서 생각하게 두라지.
“그리고 아침 일정은 모두 취소해.”
“네? 폐하. 하지만 오늘은 즉위하신 지 하루가 되신...”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럼.”
매일 맞이할 왕실 일정 말고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폐-하아!”
절규하듯 부르짖는 에르덴을 피해 왕궁을 빠져나왔다.
아주 개판으로 굴러가고 있는 왕실을 정리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했지만, 내게는 아주 중요한 사명이 있다.
‘왕성 서쪽의 이루일 마을이라 그랬나?’
내가 대륙에 돌아온 가장 큰 목적.
원정대원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
비록 작은 마을이었으나 그곳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체이스.
녀석이 항상 마을의 주변 지형과 생김새 등을 상세하게 읊어줬기 때문이다.
얼기설기 지은 나무 울타리를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
따가운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가 꽂혔다.
사람 처음 보나? 왜 이렇게 유니콘 보듯이...아!
뒤늦게야 깨달을 수 있었다.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보기엔 내 복장이 너무 화려하다는 것을.
나름 점잖을 것을 걸친다고 했는데 그래도 왕의 평상복이다.
온갖 색감의 실크로 멋을 낸 그 복장을 걸치고 있으니 신기한 듯 쳐다볼 수밖에.
“흠흠.”
갑자기 옷을 바꿀 수도 없고, 헛기침을 터뜨리며 마을 사람에게 다가갔다.
“저기...”
“저, 저를 부르셨습니까, 귀족 나으리?”
내 눈짓을 받은 중년인이 얼른 다가왔다.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다음부터는 복장에 좀 더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혹시 마을 사람 중에 잔느라는 분이 있습니까?”
“자, 잔느? 잔느는 왜...?”
슬쩍 내 눈치를 본다.
아무래도 귀족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워낙 개떡 같은 일이 많다 보니 조금은 경계하는 것 같다.
“아, 제가 체이스랑 친분이 있는데 잔느님에게 전해줄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 체이스랑 친구셨습니까? 그런데 복장이 어째서...?”
“하하하. 오해할 만하죠. 귀족은 아닙니다. 그냥 하던 장사가 잘돼서 한 벌 빼입어 봤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귀족들이 방문할 때면 늘 사건 사고가 많아서. 게다가 잔느를 찾는다니 깜짝 놀랐지 뭐야.”
“귀족 녀석들이 하는 게 다 그렇죠.”
“쯧. 이게 다 위에 놈들이 왕국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서 그래. 대표적으로 그 망나니 1왕자가 있지. 에이, 왕자는 얼어 죽을. 그놈이 얼마나 미친놈이냐면...”
하하하.
여기서 내 이야기를 들으니 감회가 새롭네.
아마 외진 마을이라 그 망나니 왕자가 왕이 된 줄 모르고 있겠지?
“...글쎄 시녀의 옷을 벗겨서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게 하고는...”
이건 좀 과장되긴 했네.
이 양반 기억해 뒀다가 언젠 한 번 왕궁으로 초대해야겠다.
“...그랬었지. 아, 그런데 자네가 뭘 찾는다고 했지?”
“아, 예. 잔느님을 뵙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잔느라면 저기 직진해서 왼쪽으로 돌아봐. 작은 집 하나가 있는데 거기가 잔느의 집이니까.”
“예. 감사합니다.”
수다쟁이 중년인을 뒤로한 채 그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나아가자 정말 아담한 집 한 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잔느의 옷가게』
누가 봐도 잔느가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간판.
똑똑- 복장을 점검한 후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고생을 했기 때문일까.
조금은 걸걸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체이스의 친구 아서라고 합니다. 혹...”
체이스라는 말을 내뱉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체이스? 체이스의 친구라고?!”
열린 문에서 나타난 건 하얗게 머리가 새버린, 낡은 회색의 옷을 입은 중년의 여인이었다.
분명 듣기로는 이제 44살이 되었다고 했는데, 겉만 봐서는 60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탁탁- 그녀가 손에 집고 있는 지팡이였다.
지팡이를 더듬거려 지형을 살피는 행동, 그리고 초점이 잡히지 않은 갈색 눈동자.
‘어머니는 맹인이예요. 본래는 멀쩡하셨는데 어렸을 적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그녀는 맹인이었다.
“어머님, 처음 뵙겠습니다. 체이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서라고 합니다.”
“아서? 내 기억에 아서라는 친구는 없는데...”
“하하하. 아마 그럴 겁니다. 제가 예전에 좀 질이 좋지 않은 행동을 많이 해서 말이죠. 아마 어디 가서 대놓고 친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런! 아무리 그래도 친구를 부끄러워하면 안 되지. 내 체이스가 돌아오는 대로 단단히 혼을 내줄게요.”
처음 봤을 텐데도 체이스의 친구라는 말에 기껍에 받아주신다.
“그런데 어쩌나. 우리 체이스가 한 동안 자리를 비울 사정이 생겨서...”
“네. 마계 원정대의 병사로 차출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 알고 있었나요?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지 뭐예요. 용사님과 함께 마계를 정벌할 수 있는 영광이라니. 내가 자랑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 체이스가 어렸을 때부터 몸도 잘 쓰고 건강해서...”
이어서 체이스에 대한 칭찬을 잔뜩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요, 어머니. 마계 원정대는 결코,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닙니다.
모두를 개죽음으로 이끌 자살 원정대죠.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삼켰다.
이것은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 것.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에그머니. 내 정신 좀 봐. 손님이 왔는데 너무 서 있게 만들었네. 어서 들어와요.”
“하하. 안 그래도 발이 아프던 참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평민들이 입을 법한 거친 옷감과 그것을 꿰멜 각종 도구로 가득하다.
‘어머니가 눈은 보이지 않으셔도 손재주가 남다르시거든요. 아마 마을에서 제일 옷을 잘 지으실 거예요.’
체이스가 했던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다.
완성된 옷을 보니 맹인이 만들었다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제가 들른 건 다른 게 아니라...”
미리 아공간에서 꺼내둔 그것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시장하죠?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아침에 끓여놓은 스튜가 있으니까.”
“...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아침을 먹기도 전이었고, 체이스의 유품을 돌려주는 것과 별개로 그것은 녀석의 소원이기도 했다.
‘돌아가면 뭐 할거냐고요? 헤헤. 일단 푹 쉬고 싶고,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가 끓여준 스튜가 먹고 싶어요. 비록 고기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웬만한 스튜보다 훨씬 맛있거든요.’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체이스의 소원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항상 녀석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엄마가 해준 스튜가 먹고 싶다고.
어쩌면 죽기 전의 소원도 어머니의 스튜를 먹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잠깐 기다렸고.
“자, 어서 들어요.”
어머님은 내 앞에 스튜를 가져다 놓았다.
“...”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 스튜가 아니라 스프였다.
아침에 먹다가 남은 것으로 추정되는 그것은 물을 너무 많이 부어서 색도 흰색이 아니라 투명하게 변해버린 상태였다.
“어머님, 이건...”
“물량이 적당한지 모르겠네요. 아침에 잠깐 일을 하다가 조금 태워버렸거든요.”
아마 스프와 스튜 냄비를 착각한 것 같다.
울컥. 나도 모르게 가슴에서 올라오는 그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수저를 들었다.
“아닙니다. 딱 맞네요.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들어요.”
어머님은 마치 아들이 먹는 것을 지켜보듯 옆에 앉아 있었다.
방금 끓여서 따뜻한 수프를 입에 가져갔다.
뚝뚝- 그 순간 나도 모르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스프 위로 떨어졌다.
“어때요? 맛이 있나요?”
“...네, 어머님. 제가 먹어본 스튜 중에 가장 맛있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내가 다른 건 못해도 스튜만큼은 자신 있어요. 우리 체이스도 이 엄마의 스튜를 항상 찾곤 했답니다.”
“...그렇군요. 정말, 정말 맛있습니다, 어머님.”
밍밍해야 할 스프는 짰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내 눈물이 간을 맞춰버렸기 때문이다.
본래는 아들의, 체이스의 죽음을 알리려고 생각도 했지만,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눈물로 간이 된 스프를 떠넘기며 어머님이 들려주시는 체이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잘 먹었습니다.”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스프를 모두 먹었다.
“그리고 이것.”
품속에서 보관하고 있던 조각상을 꺼냈다.
“이건...?”
그건 어머님의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진 나무 조각상이었다.
“예전에 체이스가 엄마에게 주고 싶다고 깎아 놓은 게 있어서요. 아시다시피 녀석이 어머님을 닮아 손재주가 좋거든요. 마침 마을에 들를 기회가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마계에서 체이스가 항상 품에 넣고 다니던 조각상이었다.
틈날 때마다 그것을 깎으며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그것이 녀석이 남긴 마지막 유품이었다.
“체이스가? 하긴 우리 아들이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죠.”
활짝 웃는 어머님을 보니 어쩐지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
후에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과연 내가 그 진실을 전해줄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지금은 사실을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머님은 한참 동안 조각상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마치 그 조각상을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이.
“음? 그런데 여기 뭔가 글씨 같은 게 새겨져 있는 것 같은데...”
어머님이 나에게 조각상을 건넸다.
“글을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읽어줄 수 있을까요?”
“네. 제가 읽어드릴게요.”
그건 나도 몰랐던 것이었다.
글씨가 새겨진 건 밑면이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어설픈 글씨체.
글을 몰랐던 체이스가 과거 나에게 배웠던 유일한 글귀였다.
“녀석. 또 언제 글을 배워서는. 아이고 주책맞아라. 늙으면 눈물이 많아져서...”
훌쩍이며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님.
나 또한 그런 어머님을 보며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럼 종종 들르겠습니다.”
“그래요. 우리 아들의 친구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체이스의 소원을 들어주었으니 이제는 떠나야 할 때.
하지만.
쾅!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훼방꾼으로 인해 나갈 수 없었다.
“제리온 남작님의 명이다. 모든 영지민들은 세금 50%를 당장 내놓아라!”
어딜 봐도 귀족의 시종 같아 보이지 않는 건달 둘이 몽둥이와 나이프 든 채로 행패를 부리려 한다.
“어머님. 아무래도 제가 드려야 할 선물이 하나 더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겁을 먹고 움츠려 있는 어머니를 향해 말한 후 뒤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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