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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만에 절대자로 귀환-2화 (2/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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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그곳은 핏빛의 지평선이었다.

보이는 거라곤 붉게 물든 하늘과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곳. 마계의 제1계층인 핏빛 대지였다.

죽음을 먹고 사는 자들이 서식하는 죽음의 대지.

저벅- 이 황량한 땅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었다.

“셀론...”

산발한 머리, 그리고 넝마가 된 옷을 입은 아서 왕자.

그가 부축한 병사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쿠, 쿨럭!”

자신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일까?

지금껏 의식을 잃고 있었던 그가 각혈하며 정신을 차렸다.

“와, 왕자님...”

기이하게 보랏빛으로 물든 얼굴의 셀론.

마계에 남은 아서의 유일한 지기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간 왕자님을 보필하게 되어 대단한 영광...커헉!”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생명 에너지가 급속도로 빠져나간다.

핏빛 대지의 포식자 중 하나인 아라네아의 독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20년간 축적한 마기(魔氣)가 없었다면 진즉 죽음에 이르고 말았을 터.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었다.

“말하지 마라. 지금은 최대한 에너지를 아껴서...”

“하하. 이제...그만 되었습니다, 왕자님.”

아라네아의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

그건 아서도 알고 있고, 셀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애써 부정하고 있을 뿐.

하지만 이제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이제 제 소원을 말해야 할 순간이로군요. 이런 날이 오지 않기를 그렇게 간절히 빌었건만...”

함께 마계를 헤쳐온 동료들이 죽어갈 때마다 자신의 소원을 말했다.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이 먹고 싶다.

아무 생각도 없이 하루 동안 그냥 푹 자고 싶다.

가지각색의 소원. 그리고 그 소원은 끝까지 살아남아 대륙으로 돌아간 이가 지켜야 할 맹약이 되었다.

“제발, 제발 죽지 마라. 너마저 죽으면 그 많은 소원을 모두 나 혼자 이뤄야만 하지 않느냐.”

뚝- 아서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셀론과의 만남. 처음에는 그리 좋은 만남은 아니었다.

하지만 20년간 핏빛 대지를 구르면서 둘은 혈육보다 진한 정을 나누었다.

그렇기에 끝까지 함께할 줄 알았다.

수많은 동료가 죽어갈 때도, 그리고 둘만 남았을 때도.

함께 마계를 빠져나가 죽어간 동료들의 소원을 이룰 것이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유일하게 남은 친우가 죽어가고 있다.

아라네아가 내뿜은 가장 고통스러운 독에 중독된 채로 말이다.

“제 소원은...”

불룩- 배가 기이하게 불러온다.

독의 작용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증거.

이제 시간이 없었다.

“...왕자님의 행복입니다.”

대부분이 개인적인 자신의 바람을 말한 것과 달리 셀론은, 친우의 행복을 바랐다.

“죽어가는 마당이니 이제 말 놓을게. 아서. 행복해라.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손주도 보면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

고통스런 와중에 피어나는 미소.

“이 빌어먹을 녀석이...”

그 미소를 본 아서의 가슴은 찢어지고 있었다.

행복하게 살아라.

그것을 이루려면 반드시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아 대륙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셀론은 혹여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아서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렸다.

뚝뚝-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셀론의 얼굴에 떨어졌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지?”

독이 완전히 퍼진 듯 동공이 눈이 검게 변했다.

스윽-

아서는 품속에 넣어두고 있었던 아나크의 독니를 손에 쥐었다.

“부디, 부디 너만은 이곳을 빠져나가...”

그렇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하던 셀론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

친우의 죽음에 아서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부욱- 셀론은 죽었지만 배는 계속 부풀고 있었다.

남은 일은 하나. 아라네아와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아나크의 독니를 찔러 독을 주입해야 한다.

하지만 아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퍽퍽!

대신 마기를 두른 손을 이용해 땅을 팠다.

그 무엇보다 단단한 핏빛 대지의 지면이 움푹 파이며 금방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그곳에 셀론의 시신을 안치하고는 흙을 덮었다.

파파팟!

형태만 갖춘 봉분에 글씨가 새겨진다.

『편히 쉬어라, 나의 벗 셀론 공작.

-아서-』

평소 대륙으로 돌아가면 공작이나 시켜달라고 떼를 쓰던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휘이잉-

핏빛 대지에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일반적인 바람과는 다르게 아주 불쾌하고, 끈적한 바람.

마지막 동료 셀론의 죽음과 함께 아서는 이 광활한 대지에 혼자 남게 되었다.

앞으로 몇백 년이 지나도 벗어날지 모르는 끝없는 공간에 말이다.

“엄마가 해준 밥을 먹는다.”

하지만 그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다.

“부모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에게는 죽어간 동료 999명의 소원을 이뤄야 하는 사명이 있다.

사사삭!

끊임없이 동료들의 소원을 중얼거리고 있는 아서를 덮치는 것.

그건 셀론의 시신을 뚫고 나온 거미, 아라네아의 새끼였다.

아라네아의 독은 강력한 맹독임과 동시에 생명체의 에너지를 갉아먹고 생명을 잉태하는 번식 행위기도 하다.

그렇기에 아나크의 독을 이용해 시신을 녹여야 하지만, 마지막 남은 친우를 한 줌 독수로 만들 수는 없었다.

“...고향의 연인에게 기다리지 말라고 해야 한다.”

여전히 동료들의 소원을 중얼거리는 아서.

스팟- 마치 넋을 잃은 듯한 그의 손이 춤을 추며 아라네아의 새끼를 베어냈다.

육안으로는 쫓기 힘든 절정의 움직임.

“...반드시 살아남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20년 동안 그 누구보다 성장한, 사실상 원정대의 최고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아서는 수백 마리에 달하는 아라네아의 새끼를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섰다.

*

번쩍-

느껴지는 기척에 눈을 떴다.

하필 잊히지 않는 악몽과 함께 나타나다니.

누군지 모르겠지만, 오늘 네 녀석의 육신을 갈갈이 찢어...응?

뒤늦게 누워 있는 곳이 척박한 마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난 돌아왔었지.

그제야 엿 같았던 지옥에서의 첫날을 지워버리며 차분히 주변을 살폈다.

흐릿하지만 내 기억 속에 있던 바로 그 방이다.

마계를 헤매던 유일한 원정대가 아니라 소튼 왕국의 1왕자인 아서의 방. 그것도 기억 속에 있는 방과 구조나 배치 하나 달라지지 않은 채였다.

“이게 말이 되나?”

분명 나는 마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대충 마계의 낮과 밤이 100,000번 이상 변하는 것을 샜건만, 대륙의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았다.

심지어 귀환했을 때 나는 수백년 전, 처음 마계 포탈로 이동했을 때의 옷과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고는 얼마나 놀랐던지.

하지만 마계에서의 경험은 내 심상을 무엇보다 단단하게 만들었다.

곧바로 평온을 되찾은 나는 한 가지 추론을 내렸다.

바로 마계와 대륙은 시간의 축이 다르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마계에서 몇십 년, 아니 설사 몇백 년을 마계에서 보냈어도 대륙의 시간은 고작해야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결론이었다.

“나쁠 건 없잖아?”

마계의 시간대로 흘렀다면 날 기억하는 이 하나도 없을 텐데, 오히려 잘됐으면 잘됐지, 나쁠 건 없다.

“아, 맞다!”

잠깐 멍해 있다가 번뜩 떠오른 생각에 서랍의 메모지를 꺼냈다.

빼곡하게 적힌 글씨는 마계에서 함께했던 동료들의 소원 목록.

슥슥- 그중 하나에 두 줄을 그었다.

『하루 동안 아무 생각도 안 하고 푹 자기.』

어제 하루 푹 쉬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푹 쉬었으니 노일 녀석의 소원은 이룬 셈이다.

“쯧. 전부 이런 쉬운 소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소원 한 개를 이뤘지만, 아직 이뤄야 할 게 998개나 남았다.

물론 이번처럼 쉬운 소원도 있지만, 또 굉장히 어려운 소원도 있으니 살아가는 동안 다 이룰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똑똑-

상념에 젖어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1왕자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문 너머로 들려오는 앳된 소녀의 음성.

제길. 갑자기 눈물이 찔끔 흐른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웬 미친놈인간 싶겠지만, 같은 인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

그 빌어먹을 지옥에서는 찢어질 듯한 비명과 온갖 괴성밖에 듣지 못했으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1왕자 전하?”

“그래. 들어와.”

덜컥- 문이 열리고 시녀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갈색 단발머리에 주근깨가 알알이 박혀 있는 어여쁜 소녀.

흠. 마계에 있을 땐 대륙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예쁜 여자를 모두 만날 테다, 그리 다짐했건만 막상 보게 되니 별 감흥이 없다.

마계 나이로 치면 몇백 살이다.

이런 꼬맹이를 보고 이상한 마음을 품는다는 건 지금의 내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덜덜덜- 그런데 이 녀석, 나를 보기 무섭게 몸을 떨어댄다.

“내가 두려우냐?”

“아, 아닙니다! 천한 것이 어찌 감히...”

아니긴.

당연히 무섭겠지.

과거의 나는 시녀들에게 있어선 저승사자와도 같은 인물이었으니까.

떨고 있는 시녀의 몸을 훑었다.

드러난 팔뚝만 봐도 곳곳에 멍이 들어 있다.

아마 옷을 벗게 되면 온몸이 멍과 상처로 얼룩져 있을 터.

흠짓-

그런 내 시선을 오해한 녀석은.

“버, 벗겠습니다...”

익숙한 듯 옷을 벗기 시작했다.

“되었다.”

나는 녀석의 손을 잡아 만류했다.

“그간 미안했다.”

그리고 과거의 내가 행했던 일에 대해 사과했다.

이건 진심이다.

마계에서의 생활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과거의 나는 어땠을까?

당시 내린 결론은 스스로 혐오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쓰레기였다.

‘아서 왕자님. 언제 정신 차리실 겁니까. 소튼 왕국의 백성으로써 왕자님에게 소원을 말하겠습니다. 부디 모두가 우러러보는 왕자가 되십시오. 제발 이제 정신 좀 차리고 말입니다.’

그래서 비에리 녀석이 그런 소원을 말한 것 같다.

일반 백성답지 않게 소튼 왕국에 대한 애국심이 넘치는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저,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미천한 제게 무슨. 당치도 않습니다.”

하지만 내 사과에 오히려 민망할 정도로 반응한다.

아마 이건 또 무슨 장난을 치는 건가 싶을 거다.

“당장 믿어달라는 건 아니다. 천천히 지켜보면 알게 될 것이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많이 다르단 사실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녀석의 불안을 가증시킬 뿐.

그렇기에 앞으로 지켜봐달라는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

의문을 지우지 못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녀.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곤.

“씨, 씻으시겠습니까?”

“씻긴 씻을 건데 혼자 씻을 테니까 일 봐.”

“네, 네?”

“혼자 씻을 거라고.”

“존귀하신 분께서 어찌. 그 일은 마땅히 제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매섭게 째려보자 움찔 몸을 떤다.

어이쿠, 잘못하면 울겠다.

“혼자 씻는 게 편해서 그러니까 잠시 대기하고 있어. 할 일 없으면 이거라도 먹던가.”

아침마다 제공되는 과일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어찌 미천한 제가...”

“말끝마다 미천은 무슨. 사람이 다 똑같지, 누구는 황금 똥을 싸는 줄 아나.”

“...”

표정을 보니까 진짜 왕족은 황금 똥을 싸는 줄 아는 것 같다.

“됐다. 어쨌든 혼자 씻을 테니까 대기하고 있어.”

“저, 전하!”

뭐라 말하려는 녀석을 두고선 욕실로 이동했다.

굳이 도움을 받아도 이상한 건 없지만, 오랜 시간 동안 남의 수발을 받지 않다 보니 혼자 하는 게 편하다.

솨아아- 마도 공학으로 만든 호스에서 나오는 뜨끈한 물이 몸을 적신다.

아아, 이것이 문명이라는 건가.

역시 사람은 문명 속에서 살아야 하나 보다.

빌어먹을 마계에서는 씻는 물을 구하기는커녕 먹는 물도 구하기 힘들었는데.

묵은 때를 벗겨낸 후 욕실 밖으로 나왔다.

“저, 저저저, 전하...!”

갈아입을 옷을 들고 있던 시녀가 깜짝 놀라며 말을 더듬는다.

“왜?”

“모, 몸에...”

“몸에 뭐? 혹시 덜 씻긴 데라도 있어?”

내 몸을 둘러봤지만,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저, 전하의 옥체에 휴, 흉터가!”

아!

그제야 녀석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온몸을 빼곡히 덮고 있는 흉터. 그건 불과 하루 전의 내게는 없었던 상처일 테니 말이다.

“아, 이거?”

변명하려고 하는데 딱히 할 말이 생각이 안 난다.

대륙 사람들은 내가 1초 만에 포탈 밖으로 나왔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네?”

설명해 봐야 입만 아플 테니 그냥 넘어가련다.

“이건 너만 알고 있어. 괜히 소문이 나면 네가 좋을 건 없으니까.”

내 몸에 흉터가 빼곡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내 개인 시녀인 녀석에게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눈치를 보니 소문이 날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녀석에게서 옷을 받아들였다.

“오늘 일정은?”

“아침에 체력 단련 후, 오후에는 대륙의 정세에 관하여...”

음.

각오는 했지만. 막상 빡빡한 일정을 들으니 살짝 당황스럽다.

“설마 그걸 다 들어야 하는 건...”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하기 위하여 방법을 물으려 할 때였다.

“형님.”

멀리서 나를 향해 손짓하는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로릭?”

족제비처럼 생긴 금발 사내는 로릭 엘슈타드.

클로에나 3왕비 태생으로, 나의 배다른 다섯 번째 동생이다.

솔직히 과거에는 아주 많이 싫어했던 녀석이지만, 지금은 아무나 다 반갑다.

녀석이 반가울 정도면 아마 지나가는 똥개도 반갑지 않을까?

“형님. 여전히 굼뜨시군요.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준비를 마치지 않으신 겁니까?”

음. 취소.

역시 이 녀석은 좋아하려고 해도 좋아할 수 없다.

“모처럼 만에 만끽하는 휴식이니 푹 쉬어야지. 로릭, 너도 늙어서 고생 안 하려면 충분한 휴식을 즐겨주는 게 좋을 거다.”

“하하. 아직도 그 소릴 하는 겁니까?”

그래. 안 믿기겠지.

정작 나도 잘 믿기지 않는데 너라고 별수 있겠냐.

“마계에서 몇백 년을 보냈다니. 하여간 형님의 망상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게 우리의 관계다.

망나니짓으로 모두의 신임을 잃은 나. 그리고 그런 형을 짓밟으며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걸 즐기는 머저리 동생.

“그건 됐고. 무슨 일이지?”

“...”

하지만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은 로릭이 시녀를 바라봤다.

“편히 대화 나누십시오.”

왕궁에서 살면 눈치가 빨라야 한다.

로릭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읽은 시녀가 공손히 머릴 숙이며 물러났다.

명색이 1왕자인 내가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시녀가 물러난다.

이 상황만 봐도 왕궁에서 차지하는 내 비중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알 수 있다.

“형님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충고? 말해 봐라.”

“형님. 왕궁을 떠나주십시오.”

귀환하기 무섭게 반가운 소식을 들려주네.

“나보고 왕궁을 떠나라?”

“그렇습니다. 형님도 눈치가 있다면 알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어떠한 선택을 하셨는지.”

“잘 모르겠는데?”

“하하하! 여전히 눈치가 없으시군요. 아니, 억지로라도 남기 위해 멍청한 연기를 하는 겁니까?”

귀여운 녀석.

조금만 더 귀여웠다간 안면에다 주먹을 꽂아 넣겠네.

“눈치가 없으니 내가 말하죠. 이미 왕위 계승권은 라휀 형님에게 넘어갔으니 괜히 왕국의 이미지를 추락시키지 말고 조용히 떠나라는 말입니다.”

“라휀이 왕위에 올라서는 게 방해되니 이제 그만 꺼지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거 라휀 의견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라휀 형님은 모자란 형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허나 동생의 도리로, 왕국을 걱정하는 우국지사의 마음으로 해가 되는 형님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주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내뱉는구나.

처음에는 이 밉상 녀석도 귀엽게 느껴졌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이 녀석은 진짜다.

구타를 유발하는 재능이 참 탁월한 것 같다.

“우국지사는 염병. 내가 네 수작을 모를 줄 알고?”

어떻게든 날 쫓아내고 그 공을 인정받아 한자릴 해 먹겠다는 속셈이겠지.

“염병이라뇨. 형님. 언사가 너무 지나치신 것...”

“지나치긴 개뿔. 지금 1왕자 앞에서 왕궁을 떠나라고 하는 네가 심할까, 아니면 참다 못해서 말하는 내가 지나칠까? 동생아, 동생아, 머리가 있다면 생각을 하고 사는 게 어떠냐.”

화가 났는지 녀석의 눈썹이 출렁출렁 춤을 춘다.

열받으면서도 조금은 당황했을 것이다.

과거에는 어떤 심한 말에도 헤실헤실 웃으며 자리를 피하는 데 급급했으니까.

아마 내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왕위에는 관심 없어. 그간 해온 짓이 있는데 왕위까지 탐내면 길 가다가 벼락 맞아 죽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누려야 할 건 포기할 생각이 없거든. 그냥 이대로 가만히 두면 돼. 이 형님은 말이다, 등 따습고 배부르게,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쉬고 싶단 말이다. 그러니까 내 휴식을 방해하지 말고 그만 꺼져주는 게 어떨까?”

새끼야, 이 정도 했으면 이제 알아들어라.

“아뇨. 형님은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녀석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형님이 남아 있으면 적통에 문제를 삼는 이들이 반드시 나올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왕국의 정세가 힘든 상황. 힘든 이때 형님이 희생하여...”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희생?

지랄하고 자빠졌네.

내가 그 빌어먹을 희생 때문에 마계에서 몇백 년을 굴렀는데.

“적통에 문제를 삼아? 당연하지. 내가 1왕자니까. 아무리 모자라도 1왕자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그런데 왕위까지 양보하고 이 모든 걸 다 버리고 떠나라고? 이 새끼야, 너 양심은 있냐?”

“이게 다 왕국을...”

“왕국은 지랄. 야, 솔직히 말해. 어떻게든 날 쫓아낸 공을 인정받아 한자리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그만 나대. 나도 슬슬 참기 힘드니까.”

“...참기 힘들면 어쩌려고?”

자, 이제 본성이 나올 시간이지?

꽈악- 녀석이 내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머리는 나쁜데 몸은 그나마 쓸 수 있어서 기사 수업을 열심히 받았던 것 같다.

대륙의 기준으로 10성(星) 중 1성의 경지는 된다고 했던가?

“이야, 이러다 한 대 치겠다?”

“한두 번 맞는 것도 아니잖아?”

아, 그랬었나?

“늘 이랬어. 너는 꼭 맞아야 정신을 차리더라고!”

그리 말한 녀석이 주먹을 휘두른다.

퍽!

그리고 정확하게 복부에 꽂혔다.

물론 내 배가 아니라 로릭 녀석의 배에 말이다.

“커헉!”

녀석의 등이 새우처럼 휘어졌고.

털썩- 이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아무리 육체를 단련했어도 고작해야 1성의 경지. 수백 년간 단련한 내 주먹을 견딜 수 있을 턱이 없지.

“이 싹퉁머리 없는 새끼, 형님을 뭐로 알고. 오늘 제대로 정신교육 좀 시켜주마.”

당분간은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안 되겠다.

아무래도 오늘 서열 정리를 확실히 해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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