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퓨처 (1)
300만 권 달성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나갔다.
여름이 오는가 싶었더니 그것도 어느새 지나버리고 10월이 되었다.
그동안 머신건 잭도 11권이 발행되었고, 당연하다는 것처럼 이번에도 300만권이 완판 되었다.
이번엔 많은 유명만화가들에게 축전도 받았다.
그 때문에 화실 벽에는 저번에 받아온 여러 개의 트로피와 만화가들의 축전액자가 가득하다.
그리고 300만부를 찍고 나서 변한 게 있다면 한국의 여러 잡지에 우리화실이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만화잡지는 물론, 성인잡지를 비롯해 여성지, 그리고 학생잡지에도 실렸다.
거기다 방송에서도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종종 연락이 오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TV프로에 소개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하지만, 작업시간에 너무 방해되는 것 같아 인터뷰는 차차 하기로 미뤄두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선희가 가장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대학교엔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너무 많은 관심을 받으면 쌍둥이들의 학교생활에 지장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땐 인터넷이 없다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솔직히 내가 살던 시절이라면, 이런 정보는 삽시간에 퍼져서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졸업 할 때까지만 이라도 대학교만큼은 조용히 다니는 게 좋을 테니까.
소년 히어로 쪽에선 조만간 나올 12권은 320만권으로 찍자는 얘기가 나온 모양인데.
이즈미도 새로운 트로피를 만들었다고 하고.
음, 이번엔 안 갈 생각이지만.
경희는 이번에도 금으로 된 트로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평소처럼 모두가 퇴근한 저녁시간.
화실 옆방 책꽂이에서 만화책을 뒤적거리다가 보물성 자리에 빠진 책을 발견하고는 경희에게 물었다.
“보물성 1983년 10월호 없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 선희야, 너는 아니?”
경희의 말에 작업 중이던 선희가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멀뚱거리며 잠시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거 이사할 때 잃어버렸어.”
“딱 그거만?”
“응. 그거만 없어졌어.”
“어째서?”
내 물음에 선희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 그냥 없어졌어.”
“······.”
별일이다.
어떻게 그 책만 없어진 거지?
다른 거라면 몰라도, 그것만 없어졌다고 하니까 은근히 신경 쓰이네.
그런데 내 반응 때문인지 이번엔 경희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거 엄청 중요한 만화책이야?”
“아니, 뭐 그렇게 중요한 정도는 아니고.”
중요하다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
왜냐하면 내가 미래에서 들고 온 책이었으니까.
의미가 있는 책이었지만,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있었는데.
뭐 안에 들어있던 10만원은 써버렸지만.
어쩌면 이젠 의미가 없는 책이려나?
“헌책방이라도 찾아볼까?”
“아니. 괜찮아.”
없어졌으면 아쉽긴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다음날.
오전 작업을 멈추고 식탁으로 모여들었다.
평소처럼 이대봉도 점심식사시간에 딱 맞춰 코를 킁킁거리며 들어왔다.
“오, 냄새 좋다. 오늘 고기야?”
식탁에 반찬을 옮기던 경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응. 삼겹살.”
이대봉이 손뼉을 짝 치며 좋아했다.
“오늘은 정말 운이 좋네. 안 그래도 고기 먹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식탁 앞에 앉으려하자 경희가 말했다.
“손이라도 씻고 와. 상추도 있는데.”
“그건 기본이지. 들어오면서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이미 씻었지.”
그렇게 말하며 히죽거렸다.
그 모습을 본 실버가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너는 굶고 사냐? 뭐 먹을 때만 기어들어 오고 있어.”
“기어들어오긴 누가 기어들어와? 걸어 들어왔지.”
그러자 박소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 진짜. 그런 개그 하지 마.”
“재미있지 않았니?”
“전혀.”
그런데 이대봉이 행동이 좀 이상하다 싶었더니, 그의 겨드랑이에 두꺼운 책이 끼워져 있었다.
그것을 본 실버가 물었다.
“그거 뭐냐?”
“아, 이거? 만화잡지.”
그렇게 말하며 어정쩡한 동작으로 테이블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씻은 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저런 모양이다.
그나저나 뭔가 했더니 보물성이다.
“오면서 산거야?”
“헌책이야, 헌책.”
그런데 날짜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1983년 10월호였기 때문이다.
그걸 본 선희가 입에 넣은 고기를 얼른 삼키고는 눈을 껌뻑거리며 말했다.
“어? 그거, 오빠가 찾던 책.”
“뭐?”
이번엔 밥그릇을 나르던 경희도 그것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정말이네. 어제 오빠가 찾던 1983년 10월호. 어떻게 딱 이걸 가져왔어? 신기하다.”
“정말 우리 윤환이가 이걸 찾았다고? 왜?”
“오빠가 아끼는 책인데, 이사 오다가 잊어버렸거든. 딱 그 책만.”
“그래? 오, 신기하다. 이것만 잃어버렸는데 내가 가져왔으니.”
이대봉이 날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역시 나랑은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전생에 혹시 부부였을지도.”
“소름끼치는 말 하지 마.”
내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지만 이대봉은 그저 웃으며 손을 휘적거렸다.
“전생이라고 전생. 지금이 아니라.”
“그래도 소름끼쳐!”
“너무하네.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하니?”
“미친 놈. 누구라도 저렇게 반응할 거다.”
“그래도.”
“왜 실망하고 지랄이야.”
“지랄은 안 했거든!”
“그게 지랄이지. 아니긴 뭐가 아냐!”
그 때 내가 이대봉에게 물었다.
“그거 어디서 났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이대봉이 곧 힘없이 대답했다.
“오다가 우연히 얻은 거야.”
“얻어? 누구한테?”
“어떤 고물상 할아버지한테.”
그 순간 온몸에 솜털이 삐죽 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물상 할아버지?”
“응. 리어카를 힘들게 밀고 가시 길래, 내가 밀어드렸지.”
이번엔 머리털이 곤두서는 기분이다.
“그, 그래서?”
“고맙다고 이걸 주시더라고. 그래서 받아온 거야. 그런데 진짜 신기하다. 딱 이 책을 네가 찾고 있었다니. 그럼 너 줄까?”
“혹시 그 할아버지 다른 건 안 주셨어?”
“다른 거?”
“어. 뭐 마실 거라거나.”
내 말에 잠시 생각하던 이대봉이 깜짝 놀랐다.
“너, 어떻게 알았어? 그 할아버지 이것도 주던데.”
그렇게 말하며 그의 주머니에서 혹시나 싶었던 물건이 툭 튀어나왔다.
역시 박카스 병이었다.
이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다.
“그거 절대로 먹지 마.”
“뭐? 벌써 마셔버렸는데.”
“진짜?”
“어. 이것 봐.”
뚜껑을 돌리더니 아래로 탈탈 턴다.
빈병이다.
“맞지?”
“······.”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나와 같은 일이 벌어지진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봉도 과거로 날아갔을까?
그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거 버릴 때가 없어서 그냥 가지고 왔······.”
“어디서 만났어?”
“뭐?”
“그 고물상 할아버지.”
“아, 저기 저쪽 만우이발관 옆 골목에서.”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야, 윤환아! 갑자기 왜 그래!”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마당으로 나온 뒤 대문을 열고 이대봉이 알려준 골목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그곳에선 결국 고물상 노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물어봤지만, 노인을 본 사람은 없었다.
*
모두가 퇴근하고 난 저녁시간.
소파에 앉은 채로 낮에 이대봉이 두고 간 보물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1983년 10월호.
가지고 있던 책은 잃어버렸고, 그것을 이대봉이 가지고 들어왔다.
같은 책인지 어떤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우연이라고 하기엔 좀 꺼림칙하다.
만지는 것이 꺼림칙해서 테이블에 놓아둔 채로 쳐다보고만 있으니 그게 신기한지 부엌에서 나온 경희가 한마디 던졌다.
“구멍 나겠다.”
“어?”
“구멍 나겠다고. 왜 그렇게 심각하게 노려보고 있어?”
“뭐, 그냥.”
“하긴, 나도 좀 신기하긴 했어. 오빠가 찾던 만화잡지를 딱 가지고 들어왔을 때 닭살 돋는 기분이었으니까. 너도 그렇지?”
선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응.”
“거봐. 선희도 저렇게 생각하잖아.”
그렇게 말하더니 내 눈치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왜 찾는 거야? 오빠가 아는 사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뭔가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뭔가 더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곧장 선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신기한 우연이긴 하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징조가 아닐까?”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선희에게 경희가 뭔가 손짓을 했다. 그러자 선희가 입을 열었다.
“좋은 일이 생길 징조야.”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인다.
뭐, 선희에게 연기를 바라는 건 무리지.
아무튼 그런 쌍둥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고 있자니 애잔함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내가 웃으니 경희는 안심이라는 표정이다.
선희도 그렇고.
그래서 곧장 보물성을 집어 들었다.
그래, 이게 뭐라고.
그냥 만화책일 뿐인데.
박카스야 이대봉이 먹어치워 버렸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고.
그냥 털어버리는 게 속 편하지.
책을 펼쳤다.
내용이야 뭐, 처음 보는 게 아니니 특별할 건 없다.
그렇게 무심하게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멈칫했다.
책의 중간에 뭔가 끼워져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설마.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다.
긴장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책 사이에 꽂혀있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멈칫했던 내가 그제야 한숨을 푹 쉬었다.
뭔가 했더니, 선희의 일러스트였다.
“선희야, 이거 네 그림 아니냐?”
“응. 아까 보다가 끼워둔 거야. 책갈피로.”
“아.”
하긴, 평소에도 자신의 그림을 책갈피 대용으로 자주 사용하고 있으니.
역시 그저 우연일 뿐인 건가.
확률이 낮긴 해도 복권보다야 확률은 높지 않을라나?
뭐, 이걸 확률로 따지는 건 내 머리로 불가능하지만.
그때 언제 다가왔는지 맞은편 소파위에 백설기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리고는 묘한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저 녀석.
또 저런 눈빛으로 날 보고 있네.
계속 보고 있으면 뭔가 기분이 나른해지는 기분이랄까.
뭐, 그냥 기분 탓이겠지.
어쨌거나 이젠 집으로 갈 시간이 됐다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집으로 갈·····.”
그렇게 말하며 발을 뻗는데 발에 뭔가 묵직하며 둥근 것이 밟힌다.
그 순간.
“어?”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리고는 두 다리가 앞으로 나가며 몸이 기우뚱했다.
“어, 어?”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내 머리가 돌아가며 아래를 향했다.
그리고 얼핏 발에 밟혔던 물건이 보인다.
바로 박카스다.
그리고 이것이 처음 왔을 때 본체가 당했던 일이라는 것도 떠올랐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아차렸다.
아직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쌍둥이들이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몸이 살짝 떠오르나 싶더니 곧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동시에 내 머리에 큰 충격이 전해졌다.
소파 테이블 모서린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며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이렇게 죽는 거 아니야?
그럼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