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423화 (423/425)

만화 단행본의 왕 (7)

두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그때, 야지마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가볍게 인사를 하더니, 곧장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그 애 만화 정말로 선생님 눈에 괜찮아 보였습니까?”

마치 스파이라도 된 것처럼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폼이 우습다.

내가 말했다.

“보셨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방금 나간 저 친구가 저희 팀이라서.”

“아.”

“저 녀석 담당이었던 작가가 얼마 전에 연재가 중단되어서 상황이 좀 나쁘거든요.”

알 것 같다는 생각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지로가 다가와 야지마를 막아서며 말했다.

“선배. 지금 뭐하세요?”

“뭐하긴, 텐겐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그 말에 지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는 날 돌아봤다.

“무시하셔도 됩니다.”

“재능 있어요. 엄청나게.”

아무튼 내 말에 야지마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텐겐 선생님이 말씀하시니까, 어쩐지 믿음이 가네요. 요즘 괜찮은 신인 찾는 게 어려웠는데.”

뭐, 성실함은 장담할 수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야지마가 계속 말을 이었다.

“오쿠노에게 무조건 붙잡으라고 말해 줘야겠어요. 아참 그리고 다음에 또 여유가 되시면······.”

“선배.”

“아, 미안.”

야지마가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슬쩍 물러섰다.

그때 편집장과 부편집장이 다가왔다.

두 사람이 우리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오랜만이시네요. 텐겐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곁에 있던 선희도 머리를 꾸벅 숙인다.

그런 선희를 신입으로 보이는 직원들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때 편집실로 양복을 입은 중년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을 본 직원들이 인사를 하며 주변으로 물러섰다.

누군가 했더니 여기 임원들이다.

우리를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히로유키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

호텔의 레스토랑.

도쿄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창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낮엔 미쯔다쇼텐의 별관에서 행사가 있었다.

300만 부 달성 기념패를 받은 것으로부터, 만화계의 유명 인사들도 꽤 모였었다.

소년점프와 소년매거진 쪽 유명만화가들 몇 명도 왔었다.

물론 소년 히어로는 당연한 일이고.

키도나 니시다도 마찬가지.

나야 뭐, 기회다 싶어서 그들의 사인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덕후의 기질이 나온 탓이다.

그런 내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만화가들도 흔쾌히 사인을 해줬다.

물론 간단한 그림을 곁들여서.

집에 가면 무조건 액자로 만들어야지.

어쨌건 요즘 우리 작품에 관심을 가지는 여러 회사의 대표들도 만났다.

프라모델, 문구, 그리고 애니업계 사람들도.

덕분에 얼떨결에 명함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이번 행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건 누가 뭐라 해도 선희였다.

자칭 팬이라는 사람들이 선희에게 사인을 받으려 몰리는 바람에 이곳에서도 사인회가 열리고 만 것이다.

내게 사인을 부탁한 사람들은 사인을 해준 만화가들 빼고는 없었지만.

뭐, 꼭 부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

콜록.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뒤 이곳에서 쉬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이곳에 있는 손님들은 우리에게 관심 없어 보이는 게 다행이고.

그렇게 레스토랑을 둘러보다가 맞은편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선희가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쪽쪽거리며 그림을 끄적거리고 있다.

이 와중에도 그림에 빠져있는 선희를 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손으로 턱을 괴며 선희에게 말했다.

“이럴 땐 좀 쉬엄쉬엄 해라. 안 피곤해?”

“안 피곤해.”

머리도 들지 않고 대답한다.

그런 녀석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하긴 이게 선희답긴 하지.

선희가 뭘 그리나 싶어서 봤더니, 콘티다.

“원고 안 밀렸잖아. 콘티는 집에 가서 해도 될 텐데.”

“오빠 요즘 바쁘잖아. 신작대비 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신작을?”

그 말에 선희가 멈칫하더니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니야?”

“아, 뭐. 준비는 해야겠지.”

하지만 당장은 생각해 둔 이야기가 없다.

솔직히 차기작을 할 기회가 있을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런데 선희가 그런 날 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그리고는 곧장 머리를 갸웃거렸다.

“왜?”

“혹시 어디가?”

움찔.

“가긴 내가 어딜 가?”

나도 안 갔으면 좋겠다만.

아무튼 내 말을 들은 선희가 안심한 표정이 되더니 다시 그림에 열중했다.

그날 이후.

나 역시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그냥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뭐 기억은 더 뚜렷해지고 있어서 신경이 전혀 쓰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나저나 언제부터였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

처음엔 분명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매일 했던 것 같은데.

이젠 오히려 갑자기 내가 살던 시절로 돌아가 버릴까봐 걱정을 하고 있으니.

이래서 정이 무서운 건가보다.

그때였다.

“우연이네요. 여기서 만나고.”

누군가 했더니, 이즈미였다.

선희는 그런 이즈미를 한번 힐끔 봤다가 다시 그림을 그린다.

그런 선희의 반응에 코끝을 찡그렸던 이즈미가 다시 날 쳐다봤다.

“반갑다는 인사 정도는 해주는 게 예의 아닌가?”

“반가워요.”

“엎드려 절 받기네요.”

“네?”

“뭐. 한국에선 이렇게 표현한다고 들어서.”

“아.”

머리를 끄덕이자 선희 곁에 슬그머니 앉으려 했다. 그러자 선희가 슬쩍 두 개의 의자를 차지하며 앉는 걸 방해했다.

그러자 의자에 앉지 못한 이즈미가 다시 일어났다.

찌푸린 얼굴로 잠시 선희를 쏘아보던 이즈미가 내 쪽으로 오며 말했다.

“그럼 그쪽 옆에 앉을게요.”

그때 선희가 서둘러 손을 뻗어 이즈미의 팔을 붙들었다.

“아야얏!”

이즈미가 선희 곁으로 끌려가며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강제로 선희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즈미가 버럭 소리쳤다.

“아프잖아!”

“······.”

하지만 선희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선희를 보던 이즈미가 콧등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이런······.”

뭔가 더 말하려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려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날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여동생이 거치네요. 다른 쪽 동생은 친근하던데.”

“쌍둥이지만 성격은 전혀 달라서.”

“그런 것 같군요. 전 다른 쪽 동생 성격이 더 마음에 드는데.”

“나도 마음에 안 들어.”

선희가 한국어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이즈미가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뭐라고 말했어요? 나에게 욕 한 거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뭐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선희를 돌아보며 말했지만, 역시 선희는 별다른 대꾸도 없이 그림만 그리고 있다.

“아, 진짜.”

그렇게 말하며 투덜거리던 이즈미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이내 뭔가를 떠올린 표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축하해요. 300만 부.”

“덕분에요.”

내 말에 이즈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지금 그거 고맙다는 뜻?”

“네. 맞아요.”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의외네.”

“나카야 씨가 많은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니까.”

내 말에 이즈미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리고는 표정에 장난기가 어렸다.

“구체적으로.”

“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뭐가 고마웠느냐고요.”

“이것저것.”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즈미가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역시 말뿐이잖아.”

“뭔가 바라는 게 있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말하던 이즈미가 멈칫하더니 버럭 소리쳤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

그때 선희가 그림을 끄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바라는 게 많아.”

또 한국어로 중얼 거린 탓에 이즈미가 선희 쪽으로 머리를 휙 돌렸다.

“또 욕한 거, 맞지?”

“아닌데.”

“맞잖아.”

“아닌데.”

한참을 그렇게 반복하더니,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이즈미가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곧 다시 큰 심호흡과 함께 진정한다.

대단한 심리 컨트롤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즈미가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도 그녀를 따라갔다.

그곳엔 늘 이즈미를 따라다니는 노인이 서 있었다.

“구로다!”

“네, 아가씨.”

노인이 다가오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의 팔에 고급 천으로 된 커다란 가방이 들려있다.

인근에서 쇼핑이라도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노인이 그 가방을 내 앞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뭔가 쿵 거리는 느낌, 묵직한 느낌이다.

“어? 이게 뭡니까?”

그림을 그리던 선희도 머리를 번쩍 들고는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런 선희를 힐끔거리던 이즈미가 콧대를 세우더니 날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열어봐요. 특별한 건 아니지만.”

특별한 게 아닌 것 같은 표정인데.

아무튼 그런 이즈미를 빤히 쳐다봤다가 곧 천으로 만들어진 가방으로 시선을 보냈다.

비단처럼 보이는 가방인데, 이런 건 처음 본다.

“가방은 별거 아니니까.”

“······.”

끈으로 묶여있는 풀고는 안에 있는 것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금색으로 번쩍거리는 묵직한 물건이다.

그리고 순간 몸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이건······, 뭡니까?”

“보시다시피.”

그렇게 말한 이즈미가 입 꼬리를 바짝 올렸다.

“300만 부 기념 트로피.”

“······.”

금색의 인간형상.

얼핏 보면 오스카상처럼 생겼다.

다르다고 한다면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책이라는 것뿐.

자세히 보니 책에 영어로 ‘머신건 잭’이라 적혀있다.

그리고 트로피 아래에 써진 글.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말았다.

[단행본 만화왕]

이게 뭐야, 진짜.

*

이대봉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게 금이라고?”

내 대신 경희가 신나게 떠들었다.

“아니, 여기 위에 있는 작은 책만. 나머지는 도금.”

“어디.”

이대봉이 트로피를 만지려고 하자, 경희가 그 손을 찰싹 때렸다.

“만지지 마.”

“아야! 야, 몇 번 만진다고 그게 닳니?”

“도금이잖아, 도금. 오빠 손이 거칠어서 닳을 수도 있지.”

“내 손이 무슨 사포냐?”

“지금은 대패처럼 느껴지는데?”

“뭐?”

그 말에 어시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경희는 엄청난 보물이라도 조심스럽게 트로피를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일본에서 저 황당한 물건을 가져왔을 때 경희가 정말 기뻐했었다.

물론 트로피가 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더 기뻐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즈미가 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도 저걸 받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때 경희 때문에 인상을 팍 쓰던 이대봉이 곧 표정을 풀고는 날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단행본 만화왕’이라니. 뭔가 뿌듯한 트로피네.”

실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저게 뿌듯할 리 있냐? 윤환이도 금이라고 하니까 가져온 거겠지.”

저게 맞는 말이지.

“만화왕이잖아, 만화왕. 전에 우리 윤환이가 그렇게 하고 싶다던. 그러니까 윤환이도 누구보다 기쁠 거고.”

“내가보기엔 경희가 제일 기뻐하는 것 같은데.”

그 말에 경희가 자랑스럽다는 듯 날 쳐다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무려 우리오빠가 일본사람들을 모조리 제치고 달성한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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