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단행본의 왕 (6)
이즈미와의 통화를 끝낸 다음날.
정말로 일본 TV뉴스에서 머신건 잭 판권에 대한 소식을 제법 비중 있게 보도했다고 한다.
신문에서도 관련 기사가 몇 개 올라왔다고는 하는데.
아무튼 일본에서는 이번 뉴스로 인해 꽤나 시끌벅적했다는 모양이다.
드디어 일본만화가 할리우드까지 진출하게 됐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방송한 곳도 있다는 걸 보면.
하지만 이번에도 작가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은 방송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뭐, 기대한 것도 아니니 실망할 것도 없다.
어쨌거나 덕분에 머신건 잭의 판매량이 다시 급격하게 늘었다니 그걸로 된 거다.
물론 정확한 조사가 이뤄진 건 아니지만 출판사에서는 300만부가 거의 다 팔렸을 거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역시 이런 기적 같은 일이 가능하려면 노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따라야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즈미가 미국에 건너가서 한 비즈니스를 운 따위로 폄하하고 싶진 않지만.
* * *
소년 히어로의 편집부.
중앙에 직원들이 모여 한곳을 응시했다.
그들의 시선이 닿아있는 사무실의 한쪽 벽.
그곳에 ‘머신건 잭 300만 부 달성!’이라는 커다란 현수막을 걸리자마자 사무실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그리고 동시에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몇몇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기도 한다.
사람들의 환호를 진정시킨 부편집장이 입을 열었다.
“내일은 호텔에서 기념행사가 열릴 테니, 아무쪼록 빠지는 분 없이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다시 환호.
부편집장이 자리를 떠나고 나자 직원들이 들뜬 얼굴로 떠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네. 소년 히어로에서 300만 부를 달성하는 작품이 다 나오다니. 이곳에 입사하길 잘했어.”
“무슨 소리! 잡지 판매도 2, 3위를 다투고 있는데.”
“이번 일로 2위는 확정일거야.”
그 말에 대화를 나누던 직원들이 서로 하이파이브까지 하며 즐거워했다.
그들 중 한명이 주변을 스윽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나저러나 머신건 잭의 두 선생님과 담당이 없으니까, 좀 이상하다.”
“그러게. 정작 주인공이 빠져있으니.”
다른 직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겠어. 선생님들은 한국에, 그리고 팀장님은 계속 바쁘신 모양이니.”
“팀장님 담당하고 있는 선생님이 300만 부 달성이라니, 보너스도 엄청나겠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거기다 내년쯤에 편집장님 은퇴하시면, 부편집장님 올라가실 거고, 그 부편집장님 자리에 앉게 될 걸.”
“와, 고속승진인가?”
“당연하지. 이정도 성과를 냈는데. 지금의 소년 히어로는 아카기 씨가 들어오고 나서 만들어진 건데. 시간이 지나면 전설의 편집자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몰라.”
“아, 진짜. 부럽다, 부러워.”
“그렇게 부러우면 평소에도 좀 열심히 담당에게 관심을 가져.”
야지마 팀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에이, 그래도 급이 다르죠. 저희들이 맡고 있는 선생님들과는.”
“맞아요. 거기다 저희가 너무 나서면 오히려 방해되는 것도 있고.”
야지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는 거야? 너희들 본분을 잊었어?”
“네? 본분이요?”
“그래. 편집자가 할 일은 작가들이 계속 만화를 그리게 하는 거야. 스스로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면 더 이야기가 잘 나올 거라는 그 양반들의 말 따위는 무시해야 하는 거 몰라?”
“에이, 너무 야박하다. 그리고 솔직히 그렇게 무작정 압박한다고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맞아요. 계속 그렇게 쪼아대면 화실에 오지도 못하게 하는데요, 뭐.”
“솔직히 작업량이 많잖아요. 담당이 이해를 해줘야지. 선생님들이 노예도 아닌데. 우리 후쿠시 선생님, 요즘 눈 밑이 늘 거멓다고요. 볼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데.”
“맞아, 우리 선생님도.”
그 말에 공감하는지 다른 직원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야지마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미간에 힘을 주며 말했다.
“뭐라는 거야? 주간연재는 전쟁이야, 전쟁. 독자들이 만화가들의 사정 따위 이해 해줄 것 같냐? 그래서 주간 연재가 가장 치열하고 살아남기 어려운거야. 그리고 그게 힘들다면 그냥 격주로 옮겨야지. 그리고 그것도 안 되면 월간.”
그 말에 직원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닫았다.
야지마가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밀려나면 솔직히 A급 만화가가 되는 건 어려워진다. 물론 예외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월간지에 연재중인 만화가 크게 성공하는 일은 드물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만화가는 근성이야, 근성! 죽기 아니면······.”
직원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알만 데굴거렸다.
괜히 야지마의 잔소리 둑을 터뜨린 기분이었다.
모두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고 싶지만, 스스로 이 재난이 멈추길 기다릴 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편집부로 들어오는 어린티를 벗지 못한 남자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눈치 챈 직원 하나가 서둘러 그곳으로 다가갔다.
다른 직원들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어딜 보는 거야?”
“아닙니다.”
“······.”
그렇게 붙들린 직원들이 야지마에게 잔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을 돌아보며 한숨을 쉰 직원이 소년을 다시 돌아봤다.
가방끈을 대각선으로 멘 소년을 훑어보던 직원 물었다.
“만화가 지망생?”
직원의 물음에 아직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소년이 멈칫했다. 그리고는 지원을 돌아보고는 약간 맹한 얼굴로 끄덕였다.
“······네.”
“나이는 어떻게 돼······요?”
“15살인데요.”
“고등학생?”
“1학년이에요.”
머리를 끄덕인 직원이 다시 물었다.
“원고는 가져왔어?”
“가방 안에.”
“그럼 저쪽으로 갈까?”
그렇게 말하며 파티션으로 가려진 곳으로 가자, 소년이 따라갔다.
곧 자리를 잡고 앉자, 소년이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노트를 한권 꺼냈다.
그것을 본 직원이 물었다.
“네임이야?”
“음······.”
“아, 미안. 네임이 뭐냐 하면·······.”
“네임이 뭔지는 알아요.”
소년의 말에 직원이 멈칫했다.
“아, 그래?”
묘하게 무안을 주는 성격.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 중엔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들이 종종 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직원이 물었다.
“그럼 이거 네임이 아니야?”
“네임이라고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게 말했지만, 직원은 가볍게 웃으며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일단 줘 볼래?”
소년이 노트를 내밀자 그것을 받아들었다.
노트를 펼치자 소년이 애매하게 말한 이유를 알만했다.
연필데생 위에 볼펜으로 마무리된 만화였다.
배경도 그럭저럭 디테일했고 캐릭터의 모습도 분명하다.
펜선으로 마무리 하지 않은 게 흠이긴 해도, 지금은 이런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호기심을 보인 직원이 턱을 긁적이며 페이지를 넘겨갔다.
캐릭터들의 과장된 몸짓,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전개.
개그만화였지만, 웃긴다는 느낌보다는 당황스럽다는 감정이 더 앞선다.
하지만, 묘하게 끌린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페이지를 넘기던 직원이 슬쩍 머리를 들어 소년을 바라봤다.
그런데 소년은 별로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다. 아니, 그보다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
주변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조금 분주하지?”
“알고 있어요. 300만 부 달성 축하라는 현수막 봤으니까.”
“아, 그러니?”
직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노트로 시선을 보내려하자 소년이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말해봐.”
“혹시 써니 선생님 담당이세요?”
“아니. 그런데 왜?”
“그 분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서.”
“······.”
소년의 말에 멈칫한 직원이 곧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당돌한 녀석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는 뷔페처럼 골라먹는 곳이 아니야.”
“네. 알아요. 그냥 희망사항이라서.”
“······.”
속으로 혀를 찬 직원이 다시 노트를 살펴봤다.
눈앞에 있는 녀석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알 것 같은 만화다.
별로 상업적이라는 느낌도 없고, 일단 나이도 너무 어리다.
“그래, 잘 봤어. 만화가 참 독특하고······.”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커졌다.
멈칫한 직원이 머리를 돌렸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누군가 했더니, 팀장인 지로였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소리치고 안쪽에 있던 편집장과 부편집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직원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의 손에 들려있던 노트를 소년이 빼앗듯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것을 들고 지로에게 다가갔다.
그 때문에 직원이 깜짝 놀랐다.
“야!”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소년이 지로에게 다가갔다.
“머신건 잭 담당이세요?”
멈칫한 지로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누구?”
“만화가 지망생인데요.”
“아.”
“이거.”
그렇게 말하며 노트를 불쑥 내밀었다.
“텐겐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은데.”
“······.”
지로가 묘한 눈빛으로 소년과 노트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는 뒤를 슬쩍 돌아봤다.
그러자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다가와서는 노트를 받으려 했다.
그 순간 소년이 노트를 뒤로 뺐다.
“텐겐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내가 텐겐인데.”
“네?”
소년이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머신건 잭, 삼사라의 텐겐이요?”
“어, 그래.”
“······.”
소년이 멍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앳된 얼굴의 소녀 같은 얼굴.
그제야 그녀가 그 유명한 만화가 써니라는 걸 알아챘다.
실제로 보니, 사진에서 보던 것 보다 훨씬 예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앞에 있는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젠 봐도 될까?”
“아, 네.”
소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노트를 다시 내밀었다.
* * *
노트를 받아들며 앞에 있는 아이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다시 노트를 펼쳤다.
그림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병맛 그림, 황당한 전개.
어이없는 개그의 연속.
역시.
들어오면서 낯이 묘하게 익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1995년 소녀점프에서 연재를 시작하는 ‘멋지다 마사루’의 작가 우스타 쿄스케였다.
아마 내년쯤에 데뷔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나다니.
그보다 지금 몇 살이지?
고등학생이었나?
우스타 쿄스케도 본명은 아닌 걸로 알고 있다.
소년이 불쑥 물었다.
“이상한가요?”
“어. 이상해.”
“······.”
그런데 크게 실망한 눈치는 아니다.
그저 약간 아쉽다는 느낌정도.
“그래도 이 느낌은 나쁘지 않아. 계속 시도해.”
의외였는지 소년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요?”
“어. 그리고 음.”
뭔가 더 할 말을 생각하고 있던 그때 내 뒤에서 머리를 쑥 내밀며 보던 선희가 갑자기 한마디 했다.
“그림이 이상해.”
얘가 진짜.
갑자기 재를 뿌리는 선희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한국말로 한 탓에 소년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안도한 내가 서둘러 그림을 소년에게 돌려주고는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딴 데 가지 말고, 이대로 쭉 여기에서 도전해 줘.”
“······아, 네.”
소년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더니 곧장 몸을 돌려 편집부를 빠져나갔다.
그러자 소년의 곁에 있던 직원이 서둘러 소년을 따라갔다.
“어이, 잠깐만! 기다려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