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한 꿈 (3)
저녁.
키도의 집.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경희가 받는다.
“여보세요?”
“나야. 내일 아침에 돌아갈게.”
“아! 오빠!”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러서 깜짝 놀랐다.
뭐야?
어쩐지 경희가 흥분해 있다.
“무슨 일 있었어?”
-있잖아, 있잖아. 저기 뭐야······, 맞다. 방송국에서 취재요청이 들어왔었어.
“취재요청?”
-어. TV말이야. TV.
난 또 뭐라고.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무슨 방송이래? 다큐?”
-그런 건 아니고, 아침방송.
“아침 방송?”
-응. ‘무엇이든 물어요’라고 유명한 방송이야. 오빠는 모르지?
“알고 있어.”
-오, 어쩐 일로 오빠가 아는 방송이 다 있어?
내가 살던 시대에도 있던 장수방송이니 모를 리가.
-아무튼, 거기서 다음 주에 할 내용이 만화에 대한 건가 봐.
“아, 그래?”
그런데 경희는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 그래가 아니지. 아 그래가. 오빠는 반응이 심심해서 재미가 없다니까. 일본잡지에도 나오고 기자랑도 친하니까 오빠한테는 별일 아닐지 모르지만, 화실에선 대사건이라고.
“······.”
전화기 속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리고는 경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오빠가 만화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걸 알고 찾아온 모양이었어. 그래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해서.
“그래서?”
-무려 방송국이잖아. 어떻게 거절해? 엄마도 얼떨결에 몇 마디 하긴 했는데. 나도 몇 마디 했고.
“벌써 인터뷰를 했다고?”
-당연하지. 무작정 전화하고 찾아왔는데. 돌려보낼 거야? 그리고 방금 말했지만 방송국이잖아.
지금 시대의 방송국이라면 뭐 일반인에게는 천상계의 느낌이니까.
“그럼 선희는?”
-화실에 오긴 했는데, 선희는 싫다고 해서 안 했고, 다른 어시 언니, 오빠들은 조금씩 인터뷰했지. 실버 오빠는 빼고.
선희나 실버는 그럴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
-아, 그리고 선희에 대해선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는 않았어. 방송국 사람들은 오빠만 알고 있는 눈치여서.
“잘했어.”
괜히 방송에 나오겠다고 무리해서 선희를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오빠 인터뷰를 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하더라. 방송이 나갈지 어떨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던데. 뭐, 분위기 보니까 그렇게 관심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어.
“아마 취소될 가능성이 크겠네. 내가 메인이었다면.”
-그럴까?
“뭐,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상관은 없지만.”
-나도 솔직히 말하면 크게 기대는 하고 있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는 웃는다.
어째 많이 아쉬워하는 느낌인데.
하기야, 경희 성격상 TV에 나온다면 많이 좋아하겠지.
-아, 잠깐만, 선희 바꿔줄게.
“······?”
곧 목소리가 바뀌었다.
-맛있는 거 많이 사와.
“아, 그래. 알았다. 잔뜩 사 들고 갈 테니까.”
-백설기 간식도.
“그래, 알았다, 알았어.”
* * *
며칠 후.
경희가 말한 아침방송에 만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결국 예상대로 우리 가족과 화실어시들의 인터뷰는 방송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빠진 것 때문인지 몇 명 한국의 유명 만화가 몇 명을 인터뷰한 장면으로 대체되었다.
물론 그마저도 너무 짧은 영상이었지만.
내가 인터뷰를 했더라도 방송에선 몇 초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나에 관한 조사도 많이 하지 않았던 모양이니까.
나야 기대하지 않았으니, 실망할 일도 없었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달랐던 모양이었다.
아침방송을 모두 보고 온 모양인지 출근한 어시들이 실망한 얼굴로 한마디씩 했다.
“그래도 너무하네. 나름 열심히 인터뷰했는데.”
“저도요.”
“엄마한테 방송 나온다고 자랑까지 했는데.”
“역시 방송에 나오는 게 쉽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그러게.”
그 모습을 보며 실버가 혀를 찼다.
“아침 방송이면 뻔하지, 뭘 그렇게 기대한 건데.”
이대봉도 그런 실버를 보며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에 나온 만화가들 화실에서도 인터뷰는 길게 했다고 하던데, 어시들은 아예 목소리도 안 나왔잖아. 걔들도 엄청 실망했겠다.”
이대봉의 말에 어시들이 관심을 보였다.
“거기도 그랬데요?”
“어. 인터뷰만 1시간 넘게 한 화실도 있었어. 그런데 선생만 몇 초 나온 게 다라더라.”
“방송에 나올 것도 아니면 뭐 하러 인터뷰를 한 거야?”
박소미의 말에 이대봉이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거렸다.
“편집이지, 편집. 만화도 스토리에서 필요 없는 부분은 콘티에서 삭제하잖아. 영화도 마찬가지고.”
“······그거랑은 다르지. 이야기의 흐름상 필요 없는 부분만 삭제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같은 거지. 걔네들이 생각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필요 없는 이야기였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그러네.”
“어쩐지 많이 아쉽다.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납득한 몇 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부분 아쉬움이 많은 모양이다.
나야 뭐 별달리 기대한 것도 아니라서.
아니, 오히려 귀찮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여겼다.
어쨌건 지금의 한국은 만화에 관한 관심이 크지 않다.
물론 내가 살던 미래도 웹툰이 뜨고 드라마화되기도 하거나, 혹은 그 작가들이 TV에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 시대에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TV에 대한 환상 따위는 전혀 없으니까.
인터넷 1인 방송시대를 살다 온 나였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언젠가 일반인들이 방송을 만드는 시대도 올 거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
지나가듯 말했더니 이대봉이 인상을 썼다.
“1인 방송? 그게 가능하냐?”
“뭐, 미래엔 가능하지 않겠어?”
“미래? 그럼 뭐 자신이 직접 찍고 인터뷰도 하는 건가?”
“그래야겠지.”
“그런 걸 누가 보려나?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돈도 엄청 들 거고. 더군다나 그게 방송으로 나갈 리도 없고. 외국에는 채널이 많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시대에서 보자면 당연히 불가능해 보이는 이야기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많은 너라도 그건 좀 무리다. 너도 참 싱겁긴.”
“······.”
굳이 미래의 이야기를 자세히 할 필요도 없으니 그 이야기는 관뒀다.
그때 이대봉이 뭔가 떠올렸는지 나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어제 정장 영감님이 찾아왔었다며. 뭣 때문에 오신 거래?”
정장 영감님은 이즈미를 따라다니는 노인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디즈니 지분.”
내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하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한꺼번에 쏠렸다.
미국 만화 속 개그 캐릭터처럼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사람도 몇 있다.
이대봉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에 이대봉이 물었다.
“저기, 내가 알고 있는 그 디즈니 맞아?”
“아마도.”
“그러니까 백설공주에 피노키오, 피터 팬······.”
“그래.”
내 반응에 이대봉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가볍게 말하는 거 아니니? 디즈니라고 디즈니. 세계 최대의 만화왕국. 꿈의 동산 디즈니랜드의 주인.”
“디즈니랜드에 가보고 싶구나.”
“당연하지! 내 꿈인데.”
“저도 가보고 싶어요.”
“저도요!”
어시들도 흥분한 채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이럴 땐 모두 어린애 같기는 하다.
하긴, 지금 시대가 여행 자유화가 된 것도 아니니까.
“올해 여행이 자유화된다고 했으니까. 조만간 단체로 갈 날이 있겠지.”
내 말에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미국여행이 가능한 거예요?”
박소미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네. 전에 미령이 어머니에게 들었어요.”
“아, 맞다. 미령이 아빠가 높은 자리에 있는 공무원이랬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는 건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무튼 내가 알기로도 지금쯤인 것 같으니까 잘못된 정보는 아닐 거다.
어쨌거나 그 때문에 한참이나 사람들이 들떠서 떠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이 좀 가라앉고 나자 이대봉이 다시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거기의 지분을 내게 가지게 된다는 거잖아.”
“뭐, 지분이라고 해봐야 얼마 안 돼. 소액투자.”
진짜 전체 지분에서 보면 정말로 쪼금이다. 하지만 미래엔 그조차도 엄청난 금액이 될 테지만.
내 말을 대충 수긍했는지 실버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요즘 디즈니야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하더라만.”
“맞아요. TV에서 가끔 보는 거 말고는 극장용도 잘 안 만든다고 하던데.”
“전에 만든 것도 별로 재미를 못 봤다고 들었는데. 차라리 괜찮은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나은 게 아닐까? 토에이 같은 그런 곳.”
실버의 말이 맞다.
작년 말에 미국에서 개봉한 ‘올리버와 친구들’도 그냥 그런 성적을 올렸으니까.
86년에 만들어진 ‘위대한 명탐정 바실’은 그럭저럭 괜찮았던 모양이지만.
어쨌건 지금의 디즈니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오히려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주가를 올리며 외국으로 뻗어 나가고 있는 시대였다.
하지만 아무리 디즈니가 좋지 않아도 토에이랑 비교할 정도의 사이즈는 아니다.
“그냥 미래를 위해서 투자한 거니까.”
“그래. 뭐 적은 돈이라면 그것도 좋겠지.”
“······그래. 작으니까.”
가족들 돈 빼고 내 돈을 대부분 다 털어 넣었지만.
아무튼, 이것에 대해서 변호사와 미리 얘기까지 해 두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뭐 그런 일이 없다면 좋겠지만.
또 생각하니까 입맛이 씁쓸하네.
안 그래도 요즘 이것 때문에 악몽도 꾸고 있는데.
그리고 한편으론 내가 살던 시절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냥 소명해버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서.
에이, 생각하지 말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때 이대봉이 현관 쪽을 보며 말했다.
“어?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제임스 선생님.”
누군가 했더니 지로였다.
“어서오세용. 요즘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네. 결혼할 때가 되셨나 보다. 카와다 씨랑은 잘 되고 있는 거예요?”
이대봉의 말에 지로가 화들짝 놀라더니 손을 휘적거렸다.
“걘, 그냥 단순히 부사수일 뿐입니다.”
이대봉이랑 실버가 툭하면 부사수라고 불렀더니, 지로도 부사수라는 말이 입에 익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카야 씨 눈빛은 아니던데.”
이대봉이 놀라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저기 그보다 중요한 게 있어서.”
어?
뭐야?
진짜 미치코랑 뭔가 있는 모양인데?
나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봤더니 다시 헛기침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대화 내용을 바꾸었다.
“머신건 잭 말씀인데요.”
분위기를 바꾸려고 표정관리를 하고 있다.
더 수상하네.
하지만 나도 그를 계속 곤란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단행본 말이죠?”
“네. 10권 편집은 거의 다 되었습니다. 아마 다음 달이면 출간이 될 겁니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9권처럼 홍보가 많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지로의 말을 듣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야 뭐 나카야 씨가 무리한 거죠.”
그때는 도대체 뭔 생각으로 그렇게 무리를 한 건지.
지금 생각해도 좀 황당하긴 하다.
듣기론 나카야그룹에서도 나쁘지 않은 홍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누가 봐도 무모한 건 사실이니까.
그런 짓을 또 하려고 해도 아마 그룹 내에서 반대가 심했겠지.
물론 반대한다고 안 할 여자가 아닐 것 같기는 하지만.
“역시 이번엔 초판 발행을 줄였겠군요.”
“그런데 그게······ 이번에도 250만 부라고 합니다.”
“네? 왜요?”
“아시겠지만 연극으로 인한 홍보효과도 좋고, 이전 판매로 팬층이 더 두터워졌거든요. 소년 히어로도 매주 출판이 30만 부 늘었고요.”
“······.”
지로가 웃으며 말했다.
“강제로 키운 사이즈인데, 그대로 고정된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