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한 꿈 (2)
차가 멈춰 서자 니시다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가시는데 제가 곁에 있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 말에 앞좌석에 앉아있던 노인이 문을 열면서 말했다.
“그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곧 리무진의 뒷문이 열렸다. 문밖에 있던 노인이 니시다를 빤히 쳐다보자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는 힘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는 곧장 문이 닫힌다.
노인이 다시 앞의 조수석에 올라타자 리무진이 출발했다.
차창 밖을 쳐다보니 멀어지는 니시다가 한참 동안 아쉬움이 남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던 리무진이 어느새 도쿄 도심의 건물 앞에 멈춰 섰다.
20층 정도의 빌딩인데, 새로 지은 건물인지 외벽이랑 통유리가 번쩍 번쩍거린다.
한낮인 지금은 눈이 너무 부실 정도다.
그 때문인지 노출된 손과 얼굴이 뜨끈뜨끈하다.
봄인 지금도 이 정돈데, 여름이라면 통구이라도 되는 거 아닌가 싶다.
“선생님?”
앞서 걸어가던 노인이 돌아보며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서둘러 사과를 하고는 노인을 따라갔다.
입구에 서 있는 덩치 큰 젊은 경비원 두 명이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1층 로비엔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직 실내장식이 끝나지 않은 미완성 상태였다.
겉에서 봤을 땐 그냥 새 건물 같았는데,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노인을 따라 1층의 엘리베이터를 탔다.
노인이 말없이 20층의 버튼을 눌렀다.
곧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20층에 닿았다.
문이 열리자 아무것도 없는 넓은 실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이 한쪽 편으로 걸어가자 그곳엔 소파 몇 개가 놓여있었고, 그곳엔 여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예상대로 이즈미였다.
그녀는 창밖을 보며 품위 있어 보이는 느긋한 자세로 차를 마시고 있다.
그러다가 날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네요.”
“그렇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뭐, 덕분에요. 앉으세요.”
“네.”
맞은편 소파에 앉자 그녀도 자리에 앉았다.
“차는 어떤 걸로?”
텅 비어 있는 곳이라 어디서 주겠다는 건지 궁금해 둘러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별로 마실 생각이 없으니까.
“괜찮습니다. 그보다······, 제가 어떻게 공연장에 있는 걸 아셨습니까?”
“우연히 알게 됐어요.”
“우연히?”
“그래요. 그냥 뭐, 키도 선생님 댁 사모님이랑 차나 한잔할까, 싶어서 전화했다가. 마침 좋은 차도 있어서.”
“아.”
키도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가끔 부인이랑 이즈미가 만난다고.
전혀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하긴, 이대봉과 실버가 그렇게 싸우면서도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성향이야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키도와 니시다의 관계도 마찬가지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곧바로 이즈미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부탁한 것 때문에 보자고 하신 겁니까?”
“맞아요.”
이즈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노인이 있는 곳을 보며 말했다.
“구로다.”
“네, 아가씨.”
노인이 공손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거 주세요.”
“네.”
이즈미의 말에 노인이 언제 준비했는지 두툼해 보이는 서류봉투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봉투를 받은 이즈미가 다시 내게 내밀었다.
“그쪽이 부탁한 거예요.”
서둘러 봉투를 열어보니 복잡한 글씨가 적혀있는 종이가 가득하다.
“내가 사들인 디즈니 지분 중, 일부죠. 당신이 넘겨준 돈이 넘어 작아서. 그 정도가 다예요.”
“이 정도면 괜찮아요.”
그녀의 말대로 지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려 디즈니의 지분이다.
사실, 처음엔 이걸 사들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이미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뭐랄까.
내가 이 시대의 사람들처럼 특별히 애국심이 강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하나쯤은 남겨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어떻게 관리할지는 가족들이 결정할 문제긴 하지만 그거야 남은 사람들의 일이니까.
그리고 가족을 위해 뭔가 하나쯤은 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서.
앞으로 한국 만화계에 엄청난 파국이 몰려들 것이고, 더불어 일본도 점점 만화시장이 축소되어 갈 것이기 일종의 보험 같은 것도 된다.
물론 앞으로 몇 년 뒤에나 일어날 일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정말 예상대로 내가 이 시대에서 떠나게 될지, 아니면 그냥 착각이 될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느닷없이 찾아왔으니, 갈 때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돌아가게 될 것 같다는 기분이 계속 들고 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요? 그쪽답지 않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말고요.”
“네.”
“너무 대놓고 대답하네.”
이즈미가 팔짱을 끼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내가 물었다.
“이거 직접 가지고 가도 됩니까?”
“무슨 소리예요. 무겁게. 따로 보내줄게요.”
“위험한 건 아니고요?”
이즈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위험요? 뭐가요?”
하긴 이 여자 입장에서 이 정도의 지분이야 있으나 마나 한 정도일 테지만.
“일반 소포로 보낼 생각입니까?”
“내가 바보예요? 우리 쪽 사람이 직접 보내줄 거예요.”
그럼 뭐 다행이지만.
그런데 이즈미가 머리를 오른쪽으로 살짝 꺾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왜요?”
“재미있어서요.”
“재미? 뭐가 말입니까?”
“사업엔 전혀 관심이 없는 척 딱 잘라서 말하더니. 결국, 그런 게 아니었잖아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별로 관심 없습니다.”
“또 저런다.”
“진짭니다.”
그 말에 이즈미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뭐, 그렇겠죠. 말은 잘해.”
“······.”
“혹시 생각이 바뀌면 말해요. 괜찮은 사업이 많거든요. 당신처럼 돈이 적은 사람도 할 수 있는.”
내게 가난뱅이 취급을 하는 걸 우리 화실 사람들이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하늘에서 보면 높은 산이건 지하건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인 건가.
아무튼 피식 웃고는 머리를 내저었다.
“참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있다고 해도 이젠 돈도 별로 없어요.”
물론 그녀의 기준으로 말한 금액이다.
일반인의 기준으로 보면 아직 남아있는 돈은 결코 적지 않다.
거기다 매달 출판사나 기타 회사에서 들어오는 액수도 장난이 아니고.
물론 선희나 엄마 앞으로 되어있는 돈은 따로 있다.
그 돈까지 건드릴 정도로 내가 맛이 간 건 아니니까.
“하긴. 만화 그려서 버는 돈이라고 해봐야, 뻔하지.”
“꽤 많은데요.”
“그렇다고 해두죠.”
묘하게 얄밉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쥐어박고 싶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때릴 수는 없고.
“아무튼, 그럼.”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던 이즈미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요?”
“볼일이 끝났으니 가야 할 것 같아서.”
그 말에 이즈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쪽 볼일만 끝나면 다예요?”
“네? 또 무슨 일이 남은 겁니까?”
그 말에 움찔한 이즈미가 갑자기 기침하더니, 시선을 돌렸다.
왜 또 저래?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렇게 말하더니 잠깐 말없이 창문 밖을 응시했다.
뭘 보는 거지?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수많은 건물이 복잡하게 깔린 도시의 풍경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곧 입을 열었다.
“여기 어때요?”
이즈미의 말에 다시 실내를 돌아봤다.
휑하고 넓은 실내.
아직 아무것도 장식하지 않아서 썰렁한 느낌이다.
“글쎄요.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아뇨. 건물 말이에요. 건물. 실내가 아니라.”
“크고 번쩍거려서 멋있기는 하던데요. 새로 지은 겁니까?”
“맞아요. 앞으로 제가 주로 머물 작업실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작업실요? 설마 건물 전체가 화실입니까?”
그 말에 이즈미가 풋 하며 차를 뿜었다.
그러자 노인이 헐레벌떡 뛰다시피 하며 다가와서는 하얀 손수건을 이즈미에게 건넸다.
손수건을 받은 이즈미가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이 넓은 곳에서 만화를 왜 그려?”
이즈미가 말하는 동안 노인은 테이블 주변을 휴지로 닦기 시작했다.
나도 노인을 도와 테이블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만든 회사의 사옥이 될 거에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보다 저기.”
갑자기 이즈미가 창밖의 어딘가로 손을 뻗어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가니, 빽빽한 도시 사이에 빈 공터가 보인다.
대충 봐도 크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 공터.
“저기가 왜요?”
“저기에 회사를 세울 거예요.”
“회사요? 이곳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이즈미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사옥이라고 했잖아요.”
“지금도 사업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지금 사업은 아빠회사 이름으로 하는 거라서, 내 것이 아니에요.”
“외동딸이라고 들었는데요?”
“어쨌든 지금은 아빠회사잖아요. 나만의 회사를 만들 생각이에요.”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그래 봐야 어차피 부모도움을 받아 하는 사업이 아닌가.
그저 단순히 독립하겠다는 말인 것 같다.
본인이야 자력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저기가 바로 시발점이 될 거예요.”
이즈미가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나름 독립이라면, 자랑스럽기는 하겠지.
스케일이 남다를 뿐이지만.
이즈미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날 쳐다본다.
뭐라도 물어보라는 무언의 압력처럼 느껴져서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어떤 회사를 하시려고요?”
역시 내 질문이 마음에 들었는지 확 밝아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은 정하지 않았어요. 땅도 아직은 구입할 형편도 아니고. 너무 비싸서.”
저 여자의 입에서 비싸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얼마나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조만간 구입할 생각이에요. 지금 저기 주인이 자금 사정 때문에 빌딩을 못 올리고 있다니까.”
“그냥 좀 미뤄요.”
내 말에 이즈미가 날 돌아봤다.
“왜요?”
“조만간 가격이 내려가면.”
내 말에 이즈미가 웃었다.
“그쪽은 일본 부동산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군요.”
“글쎄요.”
모르는 건 당신이지.
아마 내년부터 부동산 버블이 터질 것이니까.
경제에 무지한 나도 알 만큼 유명한 이야기니.
“뭐죠, 그 확신에 찬 눈빛은.”
이즈미가 눈에 이채를 띄며 말했다.
아마 내 표정에서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다.
확실히 눈치가 빠른 여자라니까.
“그냥 미뤄보세요. 아마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테니까.”
“손해요? 근거는 있어요?”
“근거는 없어요.”
“또 저런 말을······.”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즈미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다.
그러더니 이내 시선을 돌린다.
“뭐, 좋아요. 어차피 당장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생각하면 될 겁니다.”
“그쪽은 참 묘한 구석이 있어요.”
“뭐가요?”
“뜬금없는 얘기를 하는데도 어째 무시하기가 힘들거든.”
“······.”
“아무튼 좋아요. 그쪽이 그렇게 부탁하니까, 생각은 해볼게요.”
“부탁한 적 없는데.”
“부탁했어요.”
어이가 없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