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한 꿈 (1)
차를 한 모금 마신 키도가 날 힐끔 보며 물었다.
“유난, 오랜만에 왔는데, 그냥 바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지?”
“갑자기 온 거라, 특별히 뭔가 하겠다는 계획은 없어.”
“역시 가장 큰 목적은 나에 대한 걱정이었군.”
키도가 뿌듯해하며 날 쳐다본다.
그런 키도를 보며 니시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반칙을 쓰다니.”
“반칙이라니. 누가 반칙을 썼다고 그래?”
키도의 물음에 니시다가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사모님이요. 담당을 이용해서 거짓 정보를 흘리셨잖아요.”
“거짓은 아니지.”
키도의 말에 니시다가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짓는다.
“거짓이 아니면요? 연재중단을 언급한 건, 사기 아니에요?”
“사기라니? 약간 과장을 했을 뿐이잖아. 실제로 내가 연재를 중단했을지도 모르니까, 꼭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
그 말에 니시다가 입을 떡 벌린다. 그리고는 곧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
“아니, 그런 게 어딨어요. 거기다 텐겐 선생님도 연재중단이라는 말에 걱정하셔서 오셨다는데.”
“형을 걱정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온 거지. 설마 연재중단 때문에 왔겠어?”
그렇게 말하며 날 쳐다본다.
“그거 때문에 온 거 맞지. 여기가 옆 마을도 아닌데.”
내 말에 키도가 화들짝 놀랐다.
“뭐?”
니시다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거보세요.”
“그래도 걱정돼서 온 건 맞잖아.”
“그것도 그렇지.”
“연재중단이 아니었다면 안 왔을 거 아니에요?”
“음, 글쎄요. 어쩌면.”
“확실하게 얘기해.”
“뭘 확실하게 하라는 거야?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은근히 유치한 구석이 있다.
그런 날 보더니 입맛을 다시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써니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 말에는 니시다도 반사적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움찔하더니 내 눈치를 본다.
이 인간들이.
어쩌니저쩌니해도 결국은 나보다는 선희를 더 기다렸다는 거군.
이 망할 중년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형, 작업은 언제 시작할 거야? 원고작업은 완전히 멈춘 거 같은데.”
“내일부터 시작할 참이다. 원래라면 한번 이번 주는 그냥 휴재를 하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키도가 태연하게 말하자 니시다가 깜짝 놀랐다.
“어? 이틀 후에 원고 마감 아닙니까?”
“어? 어떻게 알아?”
“저도 같은 잡지에서 연재 중인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니시다가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말하자 키도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아, 그렇지.”
“혹시 미리 작업은 해 두신 겁니까?”
“아닌데.”
“그럼, 이렇게 웃고 있을 상황이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울 수는 없잖아.”
“선생님!”
버럭 소리치는 니시다의 말에 키도가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다.
“아이고, 시끄러워라. 자네가 무슨 내 담당이야? 왜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흥분 안 하게 생겼습니까? 진짜 무슨 생각인지 그 머릿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네요.”
그 말에 키도가 갑자기 히죽거렸다.
“테고시도 가끔 그렇게 말하는데. 자네는 만화가보다는 편집자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이 와중에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버럭 소리치자, 다시 귀를 막은 키도가 인상을 썼다.
“아이고 시끄럽네, 진짜.”
“정말 미리 해둔 거 없어요?”
“내 사전에 미리 해두는 건 없다.”
“한 장도요?”
“한 장도.”
“그럼 진짜 하루 만에 완성한다는 겁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완성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하루 만에 완성해야지. 데즈카 선생님은 하루 동안 두 개의 원고를 완성하신 적도 있어. 몰라?”
그 말에 니시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키도 선생님은 데즈카 선생님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림체 자체도 다르고. 극화체라서 작업시간이 월등히 많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립니까?”
“알지. 하지만 독자들은 그런 만화가의 사정 따위엔 관심이 없단 말이야.”
그걸 아는 인간이 저렇게 어이없는 소리를 하다니.
“써니라도 가능하지?”
키도가 갑자기 날 돌아보며 묻자 반사적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거, 봐라. 써니도 가능하대잖아.”
“나 참, 써니 선생님은 특별하시잖아요.”
“나도 특별해!”
확실히 정신은 특별해 보인다.
아니 특이한 건가?
니시다가 답답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너무하시네. 어시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시는 겁니까? 그 친구들 이번주는 쉰다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그리고 하루 작업에 밤샘 한 번으로 가능합니까? 시간이 부족하잖아요.”
“그런 건 근성으로 해결하면 되는거지.”
“아니, 무슨 일을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한다는 겁니까? 그리고 지금이 뭐 2차대전 땝니까? 그냥 정신력으로 다 해결되는 세상이냐고요.”
“2차대전은 패배했어.”
“그러니까요. 그딴 식으로 앞뒤 분간 없이 하니까, 당연한 일이죠.”
니시다의 말에 그제야 키도가 눈알을 데굴거렸다.
“시간이 조금······, 부족하려나?”
“당연한거 아닙니까?”
“유난.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별로 그런 일에는 간섭하고 싶지 않은데.”
다소 무리한 작업을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끼어들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만화계는 이렇게 굴러가고 있으니까.
그렇게 잡다한 대화를 하다가 니시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내게 말했다.
“아까 텐겐 선생님께서 특별한 계획이 없으셨다고 하셨는데, 이건 어떨까요?”
“어떤 거요?”
“요즘도 계속 머신건 잭 공연이 있다는 건 아시죠?”
“네. 담당에게 들었습니다. 비디오로도 봤고요.”
“요즘 공연의 이야기도 달라졌습니다. 그건 아세요?”
이야기가 달라져?
처음 듣는 이야긴데.
“모르시는군요.”
“네. 거기까진.”
“하긴, 선생님 담당이 좀 바쁘니 모르실 수도 있죠.”
그때 키도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걸 아는 자네가 더 이상한 거지.”
“저는 뭐 팬이니까요.”
“그래도 너무 대놓고 팬이라니.”
“뭐, 레벨이 다르다는 건 둘째치고, 제가 텐겐 선생님 만화를 좋아하니까요. 한국에서 출간되었다는 만화도 봤고, 번역되어 출간된 소설판도 몽땅 다 가지고 있는데요, 뭐.”
“너 SF만 좋아한 거 아니었어?”
“취미가 넓어질 수도 있죠.”
“나 원. 본인이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데 뭐라 할 수도 없고.”
“아무튼, 공연에 저랑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것도 괜찮은 생각 같아서 머리를 끄덕였다.
“네. 안 그래도 비디오를 보면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일본에 온 김에 가보죠.”
내 말에 니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니시다. 나도 같이 갈까?”
키도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다가 슬쩍 끼어들자 니시다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원고 하신다면서요.”
“그건 그런데······.”
“그럼 원고 하세요.”
“너도 참 너무하다. 아까는 우리 어시들을 엄청 생각해 주는 것 같더니.”
“제가 그랬나요?”
니시다의 말에 키도가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가 없구만.”
*
니시다와 함께 택시를 타고 공연 중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도쿄 남부에 위치한 인공섬 오다이바였다.
지금은 1989년이라 내가 살던 시절보다는 상당히 공터가 많아 휑한 느낌이다.
예전에, 아니지. 시간상으로는 미래니까······.
아무튼 내 입장에선 예전에 몇 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다.
실제 크기의 건담이 세워져 있고,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으로 유명한 장소여서 꽤 인상에 남았었는데.
물론 레인보우 브릿지도.
그러나 지금 이 다리는 한창 공사 중이다.
당연히 지금은 자유의 여신상도 없다.
아무튼 곳곳이 공사 중인 이곳을 보며 니시다가 말했다.
“맨션들을 밀어내고 상업지구로 재개발 중인 지역입니다.”
“그래요?”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오다이바는 모습은 지금부터 만들어질 모양이다.
“저깁니다.”
니시다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공연장으로 보기엔 좀 모호한 느낌의 임시 건물처럼 보인다.
그런데 입구 주변엔 꽤 많은 사람이 모여있고, 그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시작될 모양이네요.”
그리고 근처에 다다르자 택시가 멈춰 섰고, 곧바로 사람들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표를 두 장 구매하고는 공연장으로 들어갔더니,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꽤 크고 세련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고대 로마의 원형극장처럼 만들어진 실내가 꽤 고풍스러워서 모르고 왔다면 유럽의 유명 오페라 극장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무대는 비워져 있는데, 비디오에서 봤던 공연처럼 무대 배경이 그때그때 만들어지는 방식인 모양이었다.
실내에 들어온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만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평일임에도 80퍼센트가량 채워지는 걸 보니, 인기 있다는 말이 괜한 소리는 아니구나.
그런 관객의 30퍼센트 정도는 아이를 동반한 어머니고, 나머지는 다양한 연령층이다.
비디오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액션이나 복장이 전대물과 상당히 비슷해서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다 곧 공연이 시작되었다.
일반적인 전대물 공연이었다면 예쁜 복장을 한 여자가 등장해 먼저 분위기를 띄우고 시작할 텐데, 그런건 없다.
그래서인지 조금 아쉽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자 나도 모르게 공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바깥으로 나오며 니시다가 물었다.
“원작자로서 어떤 느낌이시던가요?”
어쩐지 기자에게 인터뷰를 당하는 기분인데.
그런데 니시다 본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이라서요.”
그 말에 같이 웃고는 대답했다.
“만화와 다른 느낌의 재미가 있었어요. 물론 특유의 오글거림은 있었지만.”
“오글거림이요?”
“좀 민망하다는 뜻입니다.”
“아.”
곧 니시다고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도 직접 보니까 비디오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감동도 있었어요. 물론 이야기는 다르지만.”
“만화에서 가장 좋아했던 에피소드라 전 굉장히 좋았습니다. 네 번째 보는 거지만 질리지 않고요.”
“네 번이나요?”
“네. 좋아해서 가끔 와서 보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공연장에 나온 뒤, 도로변에서 택시를 잡기 위해 기다리는데, 고급 리무진 세단이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이거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조수석 문이 열리더니 역시나 안면이 있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이즈미와 함께 다니는 노인이었다.
그가 우리를 보며 인사했다.
“텐겐 선생님, 니시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우리가 마주 인사하자 그가 리무진 뒷좌석으로 와서는 문을 열며 말했다.
“일단 타시죠.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설마 납치입니까?”
니시다가 농담처럼 말했지만,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문을 연 채로 있을 뿐이었다.
무안해진 니시다가 먼저 차에 올라타고, 그다음 내가 올라탔다.
곧 문이 닫히고는 노인이 조수석에 타자, 차가 출발했다.
“니시다 선생님은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텐겐 선생님은요?”
“저희 아가씨께서 뵙자고 하셔서.”
“뭐야, 납치 맞네.”
니시다가 웃으며 말하자, 노인이 슬쩍 돌아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납치는 아닙니다.”
“농담인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