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412화 (412/425)
  • 해프닝

    화실 2층.

    비어있는 방에서 홀로 책상에 앉아 작업에 빠져있었다.

    최근 들어 스토리를 쓰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솔직히 정말 예감대로 돌아갈지 어떨지 지금으로선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시간을 허비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얼마 전엔 50만장의 원고를 남긴 ‘만화의 신’이라 불리던 데즈카 오사무가 사망한 일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만화계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여러 가지 행사가 열렸다고 들었다.

    한국에서는 그런 분위기와 달리 신문에서는 짤막하게 소개가 되었고, 그나마 자세히 소개된 곳은 몇 개의 만화잡지들 뿐이었다.

    물론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시기라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머신건 잭이 가야할 이야기는 아직 많이 남아있다.

    대략적인 엔딩과 흐름만 정해놨을 뿐 구체적인 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최대한 디테일하게 써 놔야 한다.

    도중에 혹시 내가 갑자기 사라지더라도 이야기는 마무리 되어야 하니까.

    대충 계산 해봐도 앞으로 최소 몇 년은 더 연재해야 할 분량이니 미리 준비해 놔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안 일어난다면, 더 많은 작품을 쓸 수도 있는 거고.

    아무튼 눈앞에 놓여있는 선희의 그림들을 보며 스토리에 정신없이 몰입해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작업에만 빠져있는데 문밖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경희였다.

    “······어, 왜?”

    내가 대답하자 문이 조금 열리며 경희가 머리를 쑥 내밀었다.

    “밥 먹어. 점심.”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손목을 들어 확인했지만 손목시계는 없었다.

    아 참, 얼마 전에 전당포에 맡겼었지.

    시계 찾아오는 거야 문제는 아니지만 젊은 시절의 엄마와 혹시라도 인연이 되는 건 피해야 하니까.

    ‘빽투더퓨처’처럼 혹시라도 엄마와 친하게 되면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니, 억지로라도 안면을 트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며 벽에 걸려있는 시계 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정말 시간이 꽤 많이 흘러있었다.

    요즘 정말 작업 때문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르겠다.

    “알았어. 금방 갈게.”

    “같이 가.”

    “금방 간다니까.”

    “어제처럼 또 까먹을까봐 그러지.”

    경희가 두 손을 허리에 올리며 인상을 썼다.

    하긴 어제도 같은 말을 했지만 두 시간이나 후에 내려갔으니까.

    중간에 경희가 두 번이나 올라와서 재촉했는데도 말이다.

    문 앞에서 짝다리 자세로 선 채 머리를 기우뚱하며 날 보고 있으니 무시하기도 어렵다.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머리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다, 알았어. 같이 가자.”

    “암, 그래야지.”

    그제야 만족한 경희가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고는 앞장섰다.

    아래로 내려가자 식탁주위엔 사람들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같이 식사를 하던 누나가 날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왔니? 밥 줄게.”

    “아니. 오빠는 내가 차려 줄 테니까 언니는 그냥 앉아있어.”

    “그래. 너는 홀몸도 아니면서.”

    엄마의 말에 누나가 웃었다.

    “알았어.”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리에 앉아 식사한다.

    누나는 지금 임신 중이라 학교를 쉬고 이렇게 쉬면서 엄마와 경희를 도와 같이 화실 식사준비를 하고 있다.

    누나의 배는 아직 눈에 띌 만큼은 아니지만.

    아무튼, 자리에 앉자 경희가 내 앞에 밥그릇과 수저를 내려놨다.

    숟가락을 들자 그런 날 보며 이대봉이 히죽거렸다.

    “너 요즘 매일 스토리 쓰느라 바쁘네. 진짜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쓰려고 그러는 거니?”

    “본래 저게 맞는 거지. 너처럼 한량 생활하는 게 비정상이 아니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실버가 말하자 이대봉이 도끼눈을 뜨고 째려봤다.

    “넌 어째, 내가 말만 하면 초를 치니?”

    “입만 열면 헛소리를 하는데, 그럼 가만히 있냐?”

    “내가 뭘?”

    “오빠들은 밥 먹을 땐 싸우지 좀 마. 어른도 계신데.”

    박소미의 말에 두 사람이 엄마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엄마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너무 친해서 그러는 거니까, 너무 뭐라 하지는 마.”

    “그래도 적당히 해야죠.”

    “그건 소미 네 말이 맞구나.”

    그때 누나가 날 보며 말했다.

    “요즘 밥 먹을 때 말고는 얼굴 보기가 힘드네. 너희 매형도 놀러오면 널 보기 힘들다고 하더라.”

    “매형도 바쁘지?”

    “응. 신작 콘티 만드느라 매일 바빠.”

    얼마 전까진 박상식과 추양구는 최근 짧은 이야기만 주로 만들고 있었다.

    데뷔작이었던 ‘4구의 지옥’만큼 히트작이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물론 그 히트작이 워낙 돈을 많이 벌어준 덕에 아직 여유는 있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연재를 하지 못하고 짧은 이야기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스튜디오 느루에서 제작을 시작한 ‘게이머’의 연재만화를 준비하고 있다.

    기본 세계관과 아이디어, 그리고 구체적인 게임방식 같은 건 내가 도와주고 있다.

    일본에서 연재는 결정되어 있는 상태고, 나름 주목도 받고 있다.

    “요즘 잠도 줄이고 몰두하고 있다니까.”

    그 말을 들은 엄마가 혀를 찼다.

    “적당히 해라고 그래. 그러다 몸 상하면 어쩌려고.”

    “본인이 그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말려.”

    “어휴. 윤환이나 박 서방이나.”

    엄마가 또 혀를 차자 이대봉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행복하시죠? 듬직한 아들이 둘이나 되니까. 주변의 다른 어머니들이 얼마나 부러워하시는데”

    그 말에 찌푸렸던 엄마의 표정이 펴졌다.

    이대봉이 호들갑을 떨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 들어 예전보다 훨씬 젊어지신 것 같아요. 혹시 윤환이가 일본제 고급 화장품을 선물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엄마가 깜짝 놀란 얼굴로 손을 휘적거렸다.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 늘 쓰던 국산 써. 싼 거.”

    “그렇다면 더 놀랄 일이죠. 피부 타고 나셨나보다.”

    이대봉의 호들갑에 엄마가 어색하게 웃었다.

    “타고나긴.”

    그나저나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대봉의 친화력은 장난이 아니다.

    특히나 여자들의 심리를 잘 알아서 그런지, 금세 친해진다.

    그렇다고 남자들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이대봉은 아들인 나보다 엄마의 비위를 잘 잘 맞춘다.

    옛말에 ‘입안의 혀’ 같다는 건 저런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내가 받을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경희가 부엌 입구에 있는 전화기로 달려갔다.

    “얘, 먼지난다. 살살 걸어.”

    엄마의 잔소리에 멈칫한 경희가 서둘러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곧 나를 불렀다.

    “오빠, 아카기 씨.”

    “어, 그래.”

    수저를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경희에게 전화기를 건네받고 귀에 가져가자 지로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아, 네. 안녕하세요.”

    -식사중이신 모양인데, 제가 방해를 한 모양이네요.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그런데 무슨······?”

    -아, 네.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지로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키도 선생님 때문에 전화를 드린 겁니다.

    키도?

    “갑자기 왜요? 키도 형에게 무슨 일 있습니까?”

    -······일단 전화를 바꿔드려도 되겠습니까?

    “누구요?”

    -테고시 씨 말입니다. 키도 선생님의 담당인.

    무슨 일이지?

    혹시 큰일이라도 있는 건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다.

    그래서 서둘러 대답했다.

    “바꿔보세요.”

    곧바로 테고시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뇨, 그보다 무슨 일로······?”

    뜸을 들이던 테고시가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실은······, 저희 선생님이 원고를 중단하셔서요.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네? 갑자기 왜요?”

    -데즈카 선생님 별세 소식을 들으시고는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시더니 결국 연재중인 만화를 중단하겠다고 하셔서.

    “······!”

    이게 무슨 말이야?

    만화를 중단하다니.

    평소 키도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키도가 데즈카 오사무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테고시가 다시 말했다.

    “죄송한 부탁인데, 일본으로 오셔서 키도 선생님을 좀 만나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키도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에 도착하자, 키도부인이 날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하지만 그녀는 평소처럼 밝고 환한 얼굴이 아니었다.

    하긴, 남편이 근심에 빠져있는데 평소 같은 모습일리 없지.

    “안녕하세요. 그런데, 키도 형은······?”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화실 쪽 문 앞으로 다가가서는 곧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다.

    곧 키도부인이 문을 열었다.

    등을 끈 것인지 작업실 실내가 어둡다.

    키도 부인이 말했다.

    “반가운 손님이 오셨어요.”

    “······.”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그녀는 나를 보며 묘한 미소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가 문 옆의 등을 켜려고 했지만, 괜찮다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곧 문이 닫혔다.

    갑자기 어두운 실내로 들어온 탄에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밖으로 난 창문은 암실에서나 쓸법한 어두운 커튼으로 막혀있다.

    하지만 곧 눈이 익숙해지고 실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키도의 자리에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그곳에서 힘없는 키도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랜만이구나.”

    평소와 다르게 대면 대면한 그의 반응이 생소한 느낌을 주었다.

    이전엔 너무 과하게 반응해서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이것이 더 거북하다.

    “어. 오랜만.”

    대답하고 난 뒤 한동안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중앙에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우리 둘은 계속 말없이 있었다.

    일단 찾아오기는 했지만, 키도의 저런 모습을 직접 보고 났더니,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 데즈카 오사무를 늘 존경해 온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나 충격에 빠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렇게 대충 30분 정도 말없이 앉아 있을 때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테고시가 연락한 거냐?”

    “어.”

    “그 친구는 쓸데없이.”

    “형이 이렇게 있으니까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거지.”

    “일부러 여기까지 올 정도는 아닌데.”

    “아니긴. 차고 넘치지.”

    “······.”

    그 말에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정도라니. 나도 참 한심해 보였던 모양이구나.”

    “맞아. 한심해. 방금 형수님 얼굴 보고 나서라 더 그래.”

    “······미안하다.”

    “나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

    “귀찮게 했으니까.”

    “그렇게 미안하면 이젠 그냥 훌훌 털어버리든가.”

    그 말에 다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맞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니시다 녀석에게도 미안한 일이고.”

    “매일 찾아왔어?”

    “그래. 귀찮은 녀석이지.”

    정말로 귀찮아하는 말투는 아니다.

    “연재는 정말 중단할 생각이야?”

    “······연재 중단? 내가?”

    그런데 반응이 왜 이래?

    “아······니었어?”

    “내가 아무리 지금 이 모양이라도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럼······?”

    내 반응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키도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니시다가 머리를 굴린 모양이네.”

    “뭐?”

    “그 녀석, 내 꼴이 우스워서 쓸데없는 짓을······.”

    그때 화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곧 실내가 확 밝아졌다.

    갑자기 밝아진 덕분에 눈을 잔뜩 찌푸렸다.

    “키도 선생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응?”

    갑자기 화실로 들이닥친 니시다가 소리를 지르다가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키도부인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텐겐 선생님이 오셨······ 다고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늦었네요.”

    그렇게 말하더니 곧 몸을 돌려 나간다.

    여전히 놀란 얼굴의 니시다는 나와 키도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니시다! 너 이게 뭐하는 짓이야!”

    키도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런 키도를 돌아봤다가 곧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얼마동안이나 저러고 있었던 건지, 더벅머리에 수염이 덥수룩한 키도의 모습은 흡사 노숙자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니시다! 넌 왜 테고시에게 쓸데없는 말을 한 거야?”

    그 말에 니시다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었다.

    “제가요? 저 테고시를 만난 적도 없는데.”

    “뭐?”

    “그런데 텐겐 선생님은 정말 어쩐 일로······.”

    응?

    니시다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잠시 후 문이 열리자 평소의 웃음을 되찾은 키도부인이 간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모두의 묘한 시선이 몰리자 그녀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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