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느루 (1)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최근 들어서 머릿속에 이야기가 마구 넘쳐나는 기분이다.
머신건 잭의 기본 이야기 외에 주변의 이야기까지 떠오른다.
가령 하이테커의 이야기라든가, 아니면 머신건 잭이 만들어지기 전, 신들의 게임이 시작되던 당시의 이야기 같은 거.
요즘은 화실에서 뿐만이 아니라 집에 앉아서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를 써나가고 있었다.
늦은 저녁 책상에서 정신없이 써 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쑥 커피 잔이 눈앞에 나타났다.
“······?”
머리를 번쩍 들고는 돌아봤더니, 선희다.
선희?
경희가 아니고?
“어? 갑자기 무슨 일이야?”
“화장실에 가려다가 방문이 열려 있길래.”
“그래서 커피를 가져왔다고?”
“응.”
머리를 끄덕이며 날 쳐다본다.
“뭐 써? 머신건 잭?”
“그래. 외전.”
“외전?”
“어. 연재는 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써두기는 하려고. 연재가 안 되더라도 설정으로 해두면 도움은 되니까.”
“그릴래.”
“네가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내 말에 날 빤히 쳐다본다.
“왜?”
“어쩐지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그래?”
“응. 이상해.”
“내가 좀 졸려서 한 소리 때문에 네가 착각을 한 모양이다.”
“착각 아닌데.”
“착각 맞거든. 그러니까, 가서 얼른 자. 내일 학교 가야잖아.”
“아직 방학 안 끝났어.”
“뭔 방학이 그렇게 길어?”
“두 달이니까.”
아, 대학생이라는 것을 깜빡했다.
그러고 보니 대학교에 간 이후론 선희도 화실생활이 길어졌다.
경희는 선희와 달리 많이 돌아다니는 모양이고.
“아무튼 내일도 바쁘잖아. 일찍 자.”
“어제 연재분은 다 끝났어. 시간 많아.”
“그래도 밤에는 자야지. 그렇지 않으면 생체리듬이 깨져서 안 돼.”
“바이오리듬?”
“뭐, 비슷할 거야.”
안 그래도 요즘 바이오리듬에 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긴 한데.
내가 살던 미래에는 거짓이론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지금 이 시대엔 꽤나 사회 여러 곳에 이 이론이 사용되고 있다.
뉴스에서도 곧잘 이 바이오리듬이 소개되고 있고, 특히 건설이나 광부 같은 위험현장에선 바이오리듬에 따라 일하는 곳을 지정해 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만큼 지금 시대엔 신뢰받고 있는 이론이다.
아무튼 내가 타이르자 선희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선희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내 앞에 놓여 있는 커피 잔을 내려다봤다.
선희가 타준 커피라.
그러고 보니 처음인가?
피식 웃으며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곧장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으엑, 뭐야!”
입에 머금은 걸 뿜으려다 간신히 참고 삼켰다. 그리고는 얼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왜 이렇게 짜!”
*
다음날 아침.
화실에 들어갔더니, 백설기가 마루에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녀석이 문 여는 소리를 들었는지 머리만 홱 들어 날 확인하고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요즘 들어 자주 화실에 찾아오는데, 이게 또 자꾸 신경이 쓰인다.
저 녀석이 계속 눈앞에서 알짱거리니까, 불안한 마음만 계속 생기고.
날 보면서 ‘시간이 없다, 닌겐.’ 이렇게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 설기 왔네? 언니가 그렇게 보고 싶었니?”
뒤따라 들어오던 경희가 백설기를 보더니 반가워하며 다가가자 어슬렁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후다닥 2층 계단으로 도망쳐버린다.
“어? 설기야. 언니야, 언니.”
그렇게 말한 경희가 머리를 갸웃거리다 날 돌아봤다.
“오빠, 요즘 쟤 이상한 거 같지?”
모른척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글쎄. 모르겠는데.”
“그래? 나만 이상하게 느낀 건가? 요즘들어서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더라니까. 밥도 내가 없을 때만 먹는 것 같고.”
“그래?”
확실히 백설기가 이상해진 건 맞구만.
“혹시······.”
“혹시?”
“임신이라도 한 게 아닐까?”
“그런가?”
그래서 녀석이 요즘 내게 이상하게 행동한 건가?
역시 내가 과하게 반응한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 박카스 먹고 생긴 현상은 그저 꿈을 꾼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고.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로 최근엔 별다른 현상이 있지는 않았으니까.
경희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임신 아니야.”
“아니라고?”
“그래. 남자친구가 있지만, 임신은 안했어.”
“남자친구?”
“가끔 찾아오는 검은고양이가 있어.”
“검은고양이? 도둑고양이?”
그러자 위층에서 냐앙 하는 소리가 들린다.
“도둑고양이 아니래.”
선희의 말에 경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단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곧장 부엌으로 들어갔다.
경희야 뭐 선희가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해도 이해하니 당연한 반응이긴 하지만, 난 좀 다르다.
선희에게 다가가서는 조그맣게 물었다.
“정말 임신 아니냐?”
“아니야.”
아쉽네.
혹시나 했는데.
“그럼, 저 녀석 요즘 왜 이상한 짓을 하는 건데?”
“이상한 짓?”
날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
*
며칠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다.
걱정하던 특별히 더 떠오른 기억도 없었다.
어쩌면 그냥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일 뿐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으면 아직도 몸이 움찔거린다.
“오빠, 여기.”
작업 중에 경희가 박카스를 이렇게 내밀 때.
“난 괜찮아.”
“안 마셔?”
“그건 입에 안 맞아서.”
“아.”
아무래도 저건 절대로 마시기 싫다는 생각이다.
혹시라도 저걸 마셨다가 정말로 미래로 가버린다면.
분명 내 기억엔 그 버스 안이었으니까 미래의 시간이 흐른 건 아니니,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
되도록 이곳에서 오랜 시간 보내고 갈 생각이니까.
이왕이면 죽을 때까지 살다가 간다면 너무 이기적인가?
아, 그렇게 되면 내가 살던 시간이랑 겹치게 될 테니 좀 미묘한가.
내가 태어나던 시점인 1994년은 어떻게 되는 거고.
내가 현실에서 두 사람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역시 그 전에 돌아가게 되는 걸까?
음.
모르겠다.
그래도 요즘 들어 저 작은 병이 눈에 자주 띄는 건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다.
“그거 내가 마실게.”
이대봉이 화실에 들어오더니 내 앞에 있던 박카스를 채 갔다.
나로서는 폭탄처리반처럼 보여서 반가울 지경이었다.
이대봉이 박카스를 한 번에 들이키고는 아쉬운지 병을 뒤집은 채로 혀를 날름거리고는 말했다.
“윤환아, 오늘 중으로 사무실 정리가 끝날 거야.”
내가 투자했고, 더불어 이즈미까지 투자한 애니메이션 회사인 ‘스튜디오 느루’였다.
기존의 동화라는 이름이 좀 촌스럽게 느껴진다면서 이대봉이 그쪽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바꾼 이름이라는데,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아무튼, 이즈미가 엄청난 거금을 투자한 덕분에 3층짜리 건물을 사서 옮긴 것이다.
일단 2층, 3층 두 곳을 스튜디오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는데, 건물을 사서 들어가는 날에 돼지머리가 올라간 고사상까지 차렸었다.
물론 입에 100만 원짜리 수표를 물려주고 절도 했고.
“내일 같이 가볼래?”
“모두 같이 같이 가보면 되겠네.”
그 말에 경희가 팔짝뛰며 좋아한다.
“정말! 모두 함께 가는 거야?”
“이번 주 여유 있으니까, 이참에 같이 가보면 되겠지. 가기 싫은 사람은 빠져도 되고.”
그 말에 박소미가 화들짝 놀랐다.
“절대 그럴 리 없어요. 모두 함께 가요!”
“맞아, 저 녀석은 모르겠지만.”
이대봉이 실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실버가 작업을 멈추더니 살기어린 눈빛으로 이대봉을 쏘아봤다.
“죽을래?”
“아니면 말고.”
그렇게 말한 이대봉이 다시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며칠 후엔 야스히코 선생님이 오셔서 며칠 동안 TV용 단편 만드는 일을 같이 해주신다고 하더라.”
“잘 됐네.”
지로를 통해 부탁을 했는데, 흔쾌히 받아주셨다.
하지만 언제 오게 될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개봉한 ‘비너스 전기’ 때문에.
하지만 성적이 별로 좋지 못해서 금방 결정을 내리신 모양이었다.
실제로는 이번 작품을 끝으로 더 이상 애니메이션 쪽의 일에서 손을 떼게 되지만, 이번 일 때문에 한국에서 같이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또 역사를 바꿔버린 거다.
개인적으로도 그가 애니업계를 떠난 건 큰 손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앞으로 그가 그릴 만화책은 나오지 않을지도.
물론 그 덕에 한국에선 새로운 애니메이션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제작하게 될 단편 TV애니메이션 스토리는 나와 박상식이 며칠 동안 준비한 SF다.
기본 콘티는 선희에게 부탁해 만화책처럼 만든 것으로 분량은 대충 한권정도인데, 그게 야스히코 요시카즈를 한국에 오게 만든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음날.
봉고차 두 대를 빌려 화실사람들과 가족들이 같이 스튜디오 느루로 찾아갔다.
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새거라서 외관이 번뜩번뜩 광이 난다.
그리고 그곳 2층에 스튜디오 느루라는 간판이 보인다.
그것을 보고는 떠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건물이 깨끗하고 좋아요. 새 건물이에요?”
“네.”
“돈 많이 들어갔겠는데요.”
“나카야 선생님이 이 건물 사셨다면서요.”
“네. 원래 있었던 사무실에서 강제로 이주한 겁니다.”
내 말에 사람들이 웃었다.
그리고 계단으로 올라간 우리들이 스튜디오 느루의 새로운 사무실로 들어갔다.
며칠 전 고사를 지낼 땐 횅하던 실내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대표인 김영호가 날 보며 반겼다.
“어서 와라.”
직원들도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가시죠, 간단하게 드실 것들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안내를 받아 중앙에 있는 소파로 안내되었다.
화실사람들이 신나하며 소파로 모여들 때였다.
“어! 안녕하세요.”
뒤쪽에서 누군가 깜짝 놀라는 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돌아봤다.
그런데 거기엔 이즈미와 노인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몇 명은 이즈미를 알아보고 인사했지만, 대부분은 이즈미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인사했지만, 곧바로 그들을 지나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음, 오랜만이에요.”
“그렇군요. 나카야 씨도 축하하러 오신 모양인군요.”
“뭐 그렇죠.”
“같이 드세요.”
“아뇨, 됐어요. 전 입맛이 까다로워서. 그리고 별로 입맛도 없고요.”
그렇게 말하더니 실내를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인상을 썼다.
“생각보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뭐 이정도면.”
그렇게 말하더니 혼자 머리를 끄덕이고는 노인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어디가십니까?”
“봤으니까 됐어요.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들러본 거니까.”
“아, 그렇군요.”
“그리고 음, 바쁘지 않으면 내일 다시 여기에 들러요.”
“네? 왜요?”
“이왕이면 제대로 먹어야지.”
그렇게 말하더니 김영호를 보며 말했다.
“내일 요리사들을 보낼 테니까, 여기 중앙에 자리만 좀 비워두세요.”
그 말을 노인이 통역하자, 김영호와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물론 우리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통이 큰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