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고 있다 (5)
아침에 외출을 하고는 오후쯤에 화실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이대봉이 날 보자마자 물었다.
“또 아침 바람 쐰 거야?”
“어.”
“요즘은 매일 산책이네. 어디 근처 산이라도 가는 거니?”
“뭐, 그건 아니고. 시내에.”
“시내?”
이대봉이 머리를 갸웃거린다.
“시내 어디?”
“그냥. 이곳저곳.”
말 그대로 이곳저곳이다.
정확히는 미래의 엄마가 일하는 전당포와 최근 완공된 아파트단지였다.
엄마와 접촉은 하지 않고, 그냥 궁금해서 들리는 거고.
아파트단지는 어렸을 적에 살았던 곳이라서.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결국 떠나게 된 곳이지만, 어렸을 추억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은 추억의 장소라고 할 만큼 주변의 모습이 발전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릴 적 자주 들렀던 단골 문방구 주인 할아버지의 젊은 모습을 보는 것도 소소하게 즐겁고.
오늘도 거기서 볼펜이나 연필 따위를 사들고 와버렸지만.
가방에서 연필을 꺼내서 내 책상위에 놓자 그것을 어시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아무튼 어쩌다보니 요 며칠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방문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대봉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스토리가 막히는 모양이지?”
“뭐, 그렇지.”
솔직히 요즘 잡념이 많아서 그런지 스토리가 막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이대봉이 웃으며 말했다.
“천하의 이윤환에게도 슬럼프가 온 건가? 별일이네.”
“특별히 슬럼프라고 할 만 한 건 아니고.”
“그러면?”
“그보다는 요즘 좀 생각이 많아진 것 같은데.”
실버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날 보며 말하자 이대봉이 관심을 보였다.
“무슨 생각? 혹시 여자?”
듣자마자 내가 실소했다.
뭐라는 거야, 여자라니.
이번엔 작업 중이던 선희가 작게 말했다.
“······여자는 아니야.”
그러자 이대봉이 선희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네가 네 오빠의 연애사업을 어떻게 알아. 혹시 매일 쫓아다니기라도 하는 거니?”
“그냥 알아. 여자는 아니야.”
“뭐야, 근거도 없이.”
이대봉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며 나를 돌아본다.
그런 시선에도 난 별다른 반응 없이 머신건 잭의 메모를 살피며 스토리작업을 했다.
“하긴, 윤환이가 여자문제로 고민할 인간은 아니지.”
이건 이거대로 괜히 자존심 상하네.
난 남자도 아니냐?
왜 단정을 지어?
그런데 그 말에 실버도 동의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저 인간이.
그런데 실버의 반응이 반가운지 이대봉이 히죽 웃었다.
“어쩐 일로 내 의견이랑 같은 거니?”
“어쩌다가 그런 걸로 너무 호들갑 떨지 마라.”
“반가우니까 그러지.”
“시끄럿.”
그나저나 실버는 이제 두 화실을 오가며 작업하는 게 익숙해졌는지 예전처럼 다시 여유가 넘친다.
퀄리티도 예전처럼 좋아졌고.
역시 그림 자체는 선희처럼 타고난 인간이다.
언젠가 자신만의 오리지널 스토리도 해봐야 할 텐데.
물론 본인이 그럴 욕심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박소미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전화기를 들고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날 쳐다봤다.
일본어로 ‘잠시만 기다리세요.’라고 대답한 박소미가 날 불렀다.
“선생님 전화 받으세요.”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박소미에게서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
평소처럼 도도한 자세로 팔짱을 낀 이즈미가 물었다.
“이렇게 따로 만나는 거 오랜만이네요.”
“먼 길 오느라 수고했습니다.”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딴 소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한 이즈미가 곧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느긋한 동작으로 창밖을 쳐다봤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한국도 많이 발전했네요. 시내가 꽤 근사해.”
서울시내 한복판에 있는 고급호텔의 10층에 있는 레스토랑.
그녀는 지금 이곳에 와 있었다.
“오다가 보니까, 거리도 예전보다 깨끗하던데. 역시 올림픽 때문인가? 확실히 달라진 느낌이네요.”
“언젠가 일본을 바짝 추격하는 나라가 될 겁니다.”
지나가듯 던진 내 말에 잠시 멈칫 하더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농담도 심하네요.”
“농담 아닌데.”
이즈미가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자,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뭐죠, 그 얘기는?”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인데요.”
“그러니까, 나더러 애니메이션에 투자해라?”
“네.”
“그것도 미국회사인 디즈니에?”
“네.”
내 대답에 이즈미가 피식 웃었다.
“지금 디즈니 예전 같지 않은 거 몰라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쪽 얘기 듣고 조사를 좀 더 해봤는데. 월트디즈니 사망 후에 갈수록 사정이 나빠지고 있다던데.”
“그럴 겁니다.”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자, 더 황당해 한다.
“그럼 나더러 생돈을 날리라는 거예요? 누구에게 청부라도 받은 거예요?”
“누구요?”
“뭐 일본에서 우리 회사 싫어하는 라이벌 회사가 많으니까.”
“관심 없습니다.”
“그럴 것 같아 보이네요.”
“······.”
“그런데, 왜 하필 디즈니죠? 영화사라면 모를까. 만화영화라면 차라리 일본 제작사에 투자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데.”
“어디 생각하고 있는 곳은 있습니까?”
“뭐 선라이즈라든가.”
“지브리는요?”
“거긴 어디죠?”
“작년에 이웃의 토토로라는 작품이랑 반딧불의 묘를 제작한 회사입니다.”
“아, 거기요? 두 작품 동시개봉 했다고 들었는데. 별로 성공한 작품은 아니잖아요.”
올해 여름에 개봉 예정작인 ‘마녀배달부 키키(마녀의 택급편)’으로 제법 자리를 잡게 될 예정이긴 하지만 아직은 크게 알려진 회사는 아니다.
“어쨌거나, 미국 회사, 그것도 디즈니라면 좀 별론데.”
“지금 준비 중인 신작이 있는데, 그게 성공할겁니다.”
“신작?”
“네.”
“또 영화인가?”
“애니메이션요.”
내 말에 이즈미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즈미의 반응이야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다.
지금의 디즈니는 미래가 불투명한 그런 회사가 되어가고 있던 시점이니까.
하지만 올해 개봉예정인 ‘인어공주’를 시작으로 디즈니의 르네상스가 시작될 것이다.
“요즘은 시대가 달라져서 예전처럼 애니메이션이 먹히지 않아요. 그리고 못 들었어요? 요즘 애니메이션 업계 사람들도 게임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거? 작년에 개봉한 아키라도 쫄딱 망했는데.”
“알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비슷하지. 어차피 시대적 흐름이 그런데. 차라리 요즘 한창 성장 중인 게임회사에 투자하면 어때요? 나도 젤다의 전설을 조아해서 닌텐도 쪽에 투자해 볼 생각인데.”
“게임 쪽은 잘 몰라서요.”
“그나저나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디즈니가 성공할 거라는 거.”
“근거는 없어요.”
내 말에 이즈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래? 근거가 없다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뭐, 믿든 안 믿든 그건 나카야 씨가 결정할 문제고요.”
“아니, 바쁜 사람을 한국까지 오라고 해놓구선, 무책임하게, 정말.”
콧등을 잔뜩 찌푸리며 이를 앙다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좋아요. 만약 당신 말대로 디즈니의 작품이 성공한다고 쳐요. 그렇다고 한 작품으로 갑자기 사정이 달라지나?”
“달라질 겁니다.”
“여전히 근거는 없고요?”
“네.”
이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가 막혀서. 역시 그 천재적인 머리는 만화스토리나 연출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모양이군요.”
“······.”
“내가 안하겠다면 어쩔 건데요?”
“그럼 할 수 없고요.”
그냥 의중만 물어볼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생각이니까.
돌아갈 때가 임박했다는 건 느끼고 있지만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그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다.
아무튼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시 찌푸린 얼굴로 커피를 마시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근처에 대기 중이던 노인을 불렀다.
“구로다.”
“네, 아가씨.”
노인이 곧장 여직원에게 가서는 뭔가 얘기한다. 그러자 레스토랑 여직원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다시 커피를 준비해서는 이즈미 앞에 가져다줬다.
그냥 여직원을 부를 일이지.
하긴 저 여자 성격에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건 무리겠지.
“왜 웃어요?”
“제가 웃었습니까?”
“그래요. 방금 날 보면서 웃었잖아요.”
“아닌데.”
사실은 잘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비서 분, 한국어도 할 줄 아세요?”
내 말에 이즈미가 노인 쪽을 돌아봤다.
“구로다 말인가요?”
“네.”
“요즘 계속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아.”
“그건 그렇고, 이 투자로 당신이 얻는 건 뭐예요?”
“저도 거기에 같이 투자를 하려고요.”
그 말에 이즈미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묘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뭐야, 혹시 직업 바꿨어요? 갑자기 웬 투자? 돈은 있어요?”
“저 요즘 돈이 좀 많습니다.”
그 말에 이즈미가 피식거렸다.
“그래봐야 얼마나 된다고.”
“얼마 안 되니까, 투자를 해서 더 벌려고요.”
“아, 그건 이해가 되네요.”
당연한 반응이다.
저 여자 기준에서야 내가 가진 돈은 푼돈정도겠지.
요즘 나카야그룹이 벌어들이는 돈이 천문학적이라는 얘기도 들었으니까.
하지만 내 기준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결코 적지 않다.
나름 사치를 부린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다 쓸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를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는 돈이 좀 더 필요하다.
물론 선희가 번 돈까지 쓸 생각은 없다.
그래서 나름 생각한 것이 아는 지식으로 투자를 해보자는 거였다.
애초에 투자에 관한 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지만, 아는 지식을 조금 활용한다면 그럭저럭 돈은 벌수 있을 테니까.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 돈이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도 만들어놔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내가 없더라도 알아서 굴러가야 한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그런 나를 이즈미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 팔짱을 풀고는 테이블에 놓여있는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다 식어버렸네.”
쯧 하며 혀를 차더니 다시 커피 잔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내게 물었다.
“정말 좋은 정보라면 본인이 직접 하면 될 텐데, 굳이 날 끌어들이는 진짜 이유는 뭐예요?”
“어디까지나 난 순수한 마음으로······.”
“헛소리 말고요.”
“네. 알겠습니다.”
농담이 통하지 않는 여자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말했다.
“만약 제 말대로 일이 잘 풀린다면 부탁할 게 있는데.”
“역시 속셈은 따로 있었나보네.”
그제야 납득한 이즈미가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래, 그 부탁은 뭐죠?”
역시 예상대로 안 된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부탁을 무조건 들어 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겠다는 거겠지.
“제가 한국에 있는 작은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투자를 좀 하고 있는데요.”
당연히 그곳은 전에 이대봉과 같이 갔던 그곳이다.
얼마 전에 꽤 큰 스튜디오로 옮겼고, 일본의 아니웍과도 교류가 더 활발해졌다.
곧 자체 제작 극장판 애니를 준비 중이다.
아무튼, 내가 이곳에 투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대봉을 제외하면 지인들 중에선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즈미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토모처럼 만화책 쪽은 접고 앞으로는 애니메이션에 몰두하고 싶은 건가? 혹시 아키라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설마요. 제 분야도 아닌데. 그리고 그런 대작을 한국에서 만드는 건 무리죠.”
그런 건 수십 년이 지나도 무리다.
3D 쪽이면 몰라도.
그나마도 흥행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럼 진짜로 사업가가 될 셈이에요?”
“그것도 아니고요.”
“······그럼 뭔데요?”
“그것보다 제 부탁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아, 그러네. 그럼 말해 봐요.”
“나카야 씨가 그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투자를 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네? 투자요.”
“네. 디즈니에서 만약 돈을 벌게 되면 그중 일부만이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