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고 있다 (3)
이곳에 온 이후로 그렇게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던 엄마의 얼굴과 생신이 떠오르자 당황스러웠다.
낮에 박카스를 마신 후 겪은 일 때문에 기분이 싱숭생숭했는데.
정말로 이젠 돌아가야 할 시점인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그때 갑자기 경희가 날 보며 깜짝 놀랐다.
“오빠, 왜 그래?”
“응? 뭐?”
“왜······ 우는 건데?”
“······!”
뭔 소린가 싶어서 반사적으로 손을 눈 아래 가려다댔더니, 정말로 물기가 느껴진다.
“······어?”
뭐야, 진짜 눈물이야?
갑자기 떠오른 엄마의 얼굴 때문에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던 모양이다.
서둘러 흐르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눈에 뭐가 들어갔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요즘 날씨가 많이 건조해서.”
“아.”
적당히 둘러댔더니 경희가 그제야 안심한 표정이다. 그리고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요즘 목이 칼칼하긴 하더라. 아 참, 안약 있는데.”
“여기.”
언제 다가왔는지 선희가 내게 조그마한 안약 통을 내밀었다.
“어, 그래. 고마워.”
사실 별로 안약은 필요 없지만 쌍둥이들이 걱정할까봐 서둘러 눈에 안약을 떨어뜨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뭔가 답답한 기분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씻은 뒤 집을 나섰다.
물론 출근 때문은 아니고.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
갑자기 떠오른 기억 때문에 한숨도 못 잤지만, 아직 잠이 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래에서 올 때 있었던 버스의 실내, 그리고 미래 엄마의 얼굴과 생신날짜까지.
뭔가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밀려들었고, 그 때문에 두통도 조금 있다.
아, 두통은 잠을 못자서 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멍한 기분에도 답답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말 낯설기만 했던 곳이었는데.
어느새 이곳은 익숙한 곳이 되어버렸다.
인터넷이 되지 않거나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이젠 익숙해졌고.
더군다나 가족은······, 진짜 가족이상의 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는 엄마와 누나, 그리고 쌍둥이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다.
예전엔 빨리 원래 살던 세상으로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물론 아예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뭔가 하나 둘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질 거라고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나저나······.
언제 버스를 탄 거지?
그냥 기분전환을 위해 걷기 시작한 건 알겠는데, 평소 타지도 않던 버스를 타고 있었다.
중간에 정신을 잃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무심결에 탄 모양이다.
아침이지만, 출근시간의 버스라 그런지 사람들로 붐빈다.
“뒤로 좀 들어갑시다.”
“밀지 맙시다, 좀.”
“아야야!”
“가방 들어 들일까요?”
사람들이 시끄럽다.
이곳에 온 이후로 경험하지 못한 느낌이긴 하지만······.
난 왜 굳이 이런 만원버스에 오른 건지.
너무 생각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음 정류장에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때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버스 앞쪽에서 젊은 남자의 소리가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다. 하지만 붐비는 실내라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다.
무슨 일이지?
“내가 뭐요!”
그때 다른 남자의 음성도 들린다.
“싸움 났다보다.”
“무슨 일이지?”
“그러게.”
사람들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가 곧 다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에이씨, 진짜!”
그리고는 곧 버스 벨이 울렸다.
“이봐요, 내릴 거니까, 차 세워줘!”
차벽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린다.
호기심에 머리를 쭉 빼고 그곳으로 쳐다봤다.
중년의 남자가 짜증 섞인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인다.
“어딜 가려고요!”
누군가 그를 막아서는 모습도 보인다.
“여기서 나 내려다 된다고! 회사가 근처란 말이야!”
“지금 도망치려는 거 아닙니까!”
“뭐라는 거야!”
그 사이 버스가 정차했다. 그러자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 나도······.”
나도 내리려고 몸을 움직여 봤지만, 너무 붐벼서 내릴 수가 없었다.
젠장.
한 정거장 더 가야겠네.
어쨌건 덕분에 시끄럽던 싸움 소리도 사라졌다.
아무래도 한쪽 남자가 자신의 말대로 하차를 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사람들이 많이 내린 덕분에 공간이 밀리던 공간에 조금이지만 여유가 생겼다.
버스 뒤쪽으로 이동해 가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쏠려있다.
아까 싸우던 남자 중 한명인가보다 했는데, 어째 그 시선의 끝에 걸려있는 건 여자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 있는 여자.
그리고 그 곁에 서 있는 남자.
흥분한 얼굴이다. 아무래도 아까 들렸던 소리 중 한명인 모양인데.
젊은 여자와 남자.
그런데 어째 여자가 낯이 익다.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쳐다보는데, 그때 버스가 다시 멈춰 섰다.
그러자 이번에도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내립니다.”
“내려요.”
“어, 어.”
나도 그 행렬에 휩쓸려버렸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렸더니, 곧 문이 닫히며 버스가 출발했다.
그런데 아까 봤던 두 남녀도 정류장에 서 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인사를 하며 뭔가를 말하더니 곧장 서둘러 걸어간다.
그런 여자를 보며 남자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여자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간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서로 안면이 없는 사이인 모양이다.
대충 분위기를 보니 버스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가네.
아마도 먼저 내린 사람은 치한, 뭐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던 모양이네.
그나저나, 저 여자. 왜 얼굴이 낯이 익지? 라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어?”
순간 떠올랐다.
“엄마?”
집에 있던 앨범 속 엄마의 젊은 시절의 얼굴과 상당히 닮아있다.
순간 여자가 간 방향으로 돌아봤지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곧장 여자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붐비는 시내라 그런지 여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을 돌아다녀봤지만 마찬가지였다.
*
다음날은 더 일찍 버스를 탔다.
반드시 같은 버스를 탄다는 보장도 없으니, 차라리 어제 내렸던 그 정류장에 더 일찍 가보자는 생각에.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정류장 근처 가게에서 토큰도 여러 개 구입해 두었다.
어제 여자가 내렸던 그 정류장에 도착한 뒤, 근처에 있는 낡은 구멍가게에서 바나나 우유와 보름달 빵을 사서 먹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버스 여러 대가 지나치고 나서 어제 봤던 여자를 발견했다.
어제와 다른 번호의 버스에서 내린다.
역시 미리 와서 기다리길 잘했네.
그나저나 확실히 사진 속, 엄마의 젊었던 시절과 닮았다.
우선 여자가 내려 걸어가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라 혹시라도 떨어지면 어제처럼 놓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바짝 신경 써서 쫓아갔다.
여자를 쫓아가는 내가 좀 이상한 놈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자가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계단이 있는 곳.
건물을 올려다보니, 전당포다.
“전당포······.”
그리고 엄마가 젊었을 때 전당포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
한동안 전당포 간판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계단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철창으로 막혀있는 작은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밖에 있는 검은색 버튼.
곧장 그것을 눌렀다.
그러자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만요!”
젊은 여자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창문이 열리자마자 엄마와 닮은 얼굴의 여자가 얼굴을 빠끔 내밀었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확인하며 물었다.
“뭐, 맡기시려고요?”
엄마 얼굴이 맞다.
내가 기억하는 그 얼굴.
그 순간 묘한 감정들이 몰려들었다.
설마 이렇게 엄마를 정말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멍한 얼굴로 한참을 바라보자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손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내가 움찔했다.
“아, 죄송합니다.”
“맡기실 물건이 있어요?”
“아, 네.”
반사적으로 대답하긴 했는데, 내가 맡길 물건이 있을 리가······.
순간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있어서 서둘러 왼쪽 팔을 걷어 올렸다.
손목에 매달려 있는 금색의 물건.
출판사에서 기념이라며 선물로 준 일본산 고급 손목시계였다.
“혹시, 이것도 되나요?”
“네. 줘보시겠어요?”
“아, 네.”
서둘러 손목시계를 풀고는 철창 안 구멍으로 들이밀었다.
*
경희가 물었다.
“어? 손목시계 어디 있어?”
“아, 이거. 시계방에 맡겼어.”
“뭐? 그거 선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벌써 고장 났어?”
“그게, 길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뭐? 정말? 어디 다친 데는 없어?”
그렇게 말하며 날 이리저리 살핀다.
“아니, 괜찮아. 그냥 시계만 부서졌어.”
“시계만?”
“어.”
그 말에 다행이라며 머리를 끄덕인다.
그나저나 어떻게 넘어져야 시계만 고장 날 수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엄마라고 확신을 했지만, 결국 애꿎은 시계만 맡기고 돌아왔다.
궁금한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얘기도 많았지만, 지금의 엄마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미래의 당신 아들입니다.’라고 떠들어봐야 미친놈 취급이나 받겠지.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엄마의 인생에 개입하면 그녀의 미래가 완전히 달라질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를 만나거나, 내가 태어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 거라서.
물론 대부분 영화에서나 본 지식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얼굴만 봤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계는 그냥 포기하는 걸로 하자.
그래도 가끔 몰래 얼굴정도 보는 건 괜찮겠지.
*
다음날.
오랜만에 엄마와 은행을 찾았다.
평소 각종 공과금 납부는 엄마 혼자 처리하지만, 적금 같은 큰돈이 오갈 때는 항상 나와 함께 찾아간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선희와 내가 번 돈은 어마어마하다.
덕분에 거래하는 은행도 여러 곳인데, 오늘 찾는 곳도 그곳들 중 한 곳이었다.
택시를 타고 근처 큰 은행으로 갔다.
얼마 전에 은행이 확장공사를 했는지 꽤 건물이 으리으리하다.
엄마랑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이 우리를 확인하고는 분주해졌다.
그리고 곧 지점장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아이고, 이 사장님! 고 여사님! 오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노고는요.”
지점장의 말에 엄마가 웃으며 대답했다.
가끔 찾아오는데도 얼굴은 잘도 알아보는 게 신기하다.
하기야, 이곳에 넣어둔 돈이 좀 많아야지.
“자, 이쪽으로 가시죠.”
따로 마련된 장소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런데 이 지점장······, 어째 낯이 익다.
그리고 금방 얼굴이 떠올랐다.
어제, 버스 안에서 봤던 그 중년의 남자얼굴이다.
순간 지점장을 따라가던 엄마의 손을 붙잡았다.
“응? 왜 그러니?”
“오늘 돈 다 빼야겠어.”
“뭐?”
그때 지점장이 화들짝 놀랐다.
“도, 돈을 다 빼신다고요!”
“네. 당장 다 빼주세요.”
내 말에 지점장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