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405화 (405/425)

다가오고 있다 (2)

캄캄한 시야.

분명히 박카스를 마신 것까지는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난 지금 어떤 상황이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건가?

그럼 난 꿈을 꾸는 걸까?

물속에 있는 것처럼 움직임에 저항감이 느껴졌다.

멍한 기분도 들고.

그렇게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흐릿한 눈앞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러다가 또렷함이 멈췄다.

묘하게 애매한 시점에서.

시야가 완전히 깨끗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흐린 것도 아니고.

하지만 지금 어떤 장소에 내가 와 있다는 건 알 것 같다.

좁고 텁텁한 공기.

흔들리는 시야.

여기가 어디지?

그런데 점점 분명해지는 감각.

엉덩이가 들썩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곧 그것이 자동차의 엔진느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조용한 세단의 느낌은 아니다.

거친······ 엔진의 느낌.

트럭인가?

그러다가 하나 둘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버스라는 것을 눈치 챘다.

이 버스······, 기억에 있다.

바로 내가 미래에서 오기 전에 탔던 그 버스.

그럼 내가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온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바로 그때.

“어?”

순간 다시 주변이 흐려지더니 다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시야는 계속 흐려지기만 할뿐이다.

거기다 의식도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

그런 때에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

그 음성에 집중했다.

한 20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바로 경희의 목소리.

“······해?”

앞부분은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점점 그것이 더 또렷해지며 가까워졌다.

“······이상해?”

이상하다니, 뭐가?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잠긴 것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곧 다시 들려왔다.

“······왜 그래? 맛이 이상해?”

맛?

무슨 맛?

그 순간 다시 어두웠던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그런데 이번엔······ 아까와 장소가 달라졌다.

엉덩이에서 느껴지던 진동도 사라졌고, 텁텁하던 공기도 맑아졌다.

여전히 좁아 보이는 공간이긴 하지만, 전혀 다른 공간.

그러니까, 여긴······.

화실이다.

내 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경희였다.

머리를 갸웃거리며 내게 다시 말했다.

“오빠?”

“······.”

“그렇게 맛이 이상해?”

돌아보자 눈을 동그랗게 뜬 경희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맛이 뭐?”

“박카스 말이야, 박카스.”

“무슨 말이야? 박카스라니. 그리고 찌푸리다니 내가?”

“맛이 이상해서 찌푸린 거 아니었어?”

“찌푸려? 내가?”

“방금 박카스 마시자마자 찌푸렸잖아. 혹시 알약 씹어 먹은 거야?”

그렇게 말하더니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으이그, 그걸 왜 씹어 먹어. 그냥 홀랑 삼키면 되는데.”

“······.”

뭔가 이상하다.

아직 박카스랑 알약 삼킨 건 한참 전에 있었던 일인데, 갑자기 왜.

문득 이상한 기분에 곧바로 물었다.

“······나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데?”

“뭘 말이야?”

“눈 감고 있었던 거. 혹시 쓰러지거나 하지 않았어?”

경희가 콧잔등을 잔뜩 찌푸렸다.

“쓰러져? 아닌데?”

“나 꽤 오래 이 상태로 있지 않았어?”

내 말에 경희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슨 상태?”

“그러니까······.”

일단 쓰러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니.

“눈을 감고 있었던 시간.”

“눈?”

“그래. 방금 눈 떴잖아.”

“아, 얼굴 찌푸리면서 눈 감은 거?”

“······.”

“한 3초 정도?”

“뭐, 겨우?”

내 물음에 경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응.”

“정말로 겨우 3초 정도 이러고 있었다고?”

“따로 시간을 재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가 아닐까?”

이게 뭔 소리지?

3분도 아니고 3초?

기분상으론 30분 정도 시간이 흐른 것 같은 기분이라 3분도 짧긴 하지만.

그런데 어시들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갸웃거리던 경희도 곧 걱정스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오빠, 요즘 스토리 생각에 너무 빠져 있어서 피곤한 거 아니야?”

“아니.”

“정말 괜찮아?”

“괜찮아.”

그때였다.

“······내가 스토리 늘릴까?”

아무 말도 않던 선희까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멀뚱멀뚱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저 녀석, 날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저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내가 웃으며 말했다.

“스토리를 늘리다니, 큰일 날 소리를. 늘어진다고 욕 먹을 일 있냐?”

“대사 없는 장면을 좀 늘리고, 액션을 좀 더 집어넣으면 되는데.”

“그래도 무작정 늘려서 이야기가 늘어지면 곤란하지.”

“안 늘어지게 잘할 자신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날 뚫어지게 쳐다본다.

아, 이런.

저 녀석에게까지 폐를 끼쳤구나.

그냥 정신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말했던 게 후회스럽다.

곧장 손을 휘적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야야, 그냥 해본 소리가지고 뭘 그렇게 요란을 떨고 그래? 그리고 필요한 장면이면 그건 네가 결정할 문제니까 알아서 해도 되긴 하지만, 나 때문이라면 굳이 늘릴 필요는 없어.”

“······안 그래도 콘티 마음에 안 들어서 늘리려고 했어.”

“그래?”

“응.”

선희가 머리를 힘차게 끄덕였다.

콘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그 정도면 연출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데.

하기야 연출은 이제 내가 의견을 내기도 어려운 수준이니.

그보다 저 녀석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그 정도로 내 이상한 행동과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일까?

그리고 그런 선희의 반응에 화실식구들도 의외라는 눈빛이고.

경희는 더 많이 놀란 표정이다. 곧장 선희에게 다가가더니 웃으며 말한다.

“오빠가 좀 피곤해서 저러는 모양이니까, 무리 하지 마.”

“무리 아닌데.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건데.”

그런 선희를 보던 경희가 날 돌아봤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는데?”

“······.”

“괜찮다면 뭐 상관없긴 하지만.”

내 말에 선희가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내게 맡겨.”

주먹을 쥔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는 오버까지 한다.

경희라면 모를까, 선희는 절대 저러지 않았는데.

저 녀석 정말 날 크게 걱정했던 모양이네.

아무튼 나 때문에 쓸데없이 화실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버렸다.

모두에게 경희 말처럼 요즘 좀 피곤했던 모양이라고 적당히 둘러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욕실로 가서는 세수부터 했다

“끄아~!”

겨울에 찬물로 얼굴을 씻은 것도 모자라 머리까지 세숫대에 푹 담갔더니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물론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었지만.

그리고 서둘러 수건으로 닦고는 거울을 쳐다봤다.

거울 속에는 아직 얼떨떨한 표정의 내 얼굴이 보인다.

뭐였을까 방금 그 느낌은.

분명 버스라는 공간이 느껴졌었다.

아직도 엉덩이에선 털털거리는 버스의 진동이 느껴지는 것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그런 그 순간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시간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짧았다.

기분상으론 20분 이상의 시간을 느꼈음에도 경희는 내가 3초 정도 찌푸렸을 뿐이라고 했다.

3초라니.

아니 그보다 갑자기 왜?

버스라면 출발지점이다.

그렇다면 혹시,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일까.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다.

이젠 이곳에서 꼼짝없이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아니 이곳의 삶이 진짜였고, 미래는 그저 꿈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혹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걸까?

아까 정신을 잃기 전 백설기의 눈빛이 묘하게 마음에 걸린다.

디테일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버스에서 창밖으로 봤던 고양이의 그 눈빛과 상당히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기분이 복잡해졌다.

“후우······.”

다시 찬물로 세수를 한 번 더 하고는 두 뺨을 찰싹 때렸다.

“악!”

너무 심하게 때렸나?

볼에 벌건 손바닥 자국이 생겨버렸다.

어쨌거나 깊게 생각해봐야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욕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앗, 깜짝이야!”

발아래에서 또 묘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하얀 고양이, 백설기 때문에.

이 자식은 주특기가 사람 놀래키는 건가.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는 머리를 쳐들고 있는 녀석을 마주 내려다봤다.

커다란 눈동자가 신비로운 느낌이다.

그런 녀석을 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시간이 된 거냐?”

물론 예상대로 녀석은 대답 따윈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올려다보고만 있을 뿐.

평소라면 그냥 웃고 말 일인데.

지금은 진지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당장 돌아가는 거야?”

그 말에 백설기가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는 몸을 돌려 화실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돌아갔다.

내 말을 씹었다, 저 녀석.

그나저나 뭔가 내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눈치였는데.

뭐 말이 통해야 이야기를 하든 말든 하지.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기분만 찝찝해지네.

*

모두 퇴근한 시간.

경희가 화실을 정리하는 동안 머신건 잭, 스토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무도관 공연 장면을 비디오로 본 뒤로 요즘 스토리에 대한 생각이 좀 많아졌다.

몇몇 캐릭터는 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보다 더 입체적으로 표현해서 꽤 많이 놀란 탓이 제일 크지만.

특히, 조크를 연기한 여자 배우의 연기력에 상당히 놀라기도 했었다.

원래는 남자인 캐릭터였지만, 여성스러운 느낌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냥 여자배우로 남자 역을 하게했던 모양인데, 이게 또 신의 한수였던 것이다.

남장모습이 묘하게 중성적이라 보는 나도 매력에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으니.

듣기론 이 공연 이후로 인기가 엄청 올라서 TV에도 많이 출연하고 있단다.

놀랍게도 무명배우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덕분에 만화에서는 본적 없었던 캐릭터들의 새로운 매력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번 연출은 정말 대단했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내가 쓴 원작보다 스케일은 작았지만, 심리적인 묘사는 월등했다.

물론 원작자라는 입장에서 본 느낌이라 팬들과는 다소 다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덕분에 머신건 잭이라는 만화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고, 더불어 많은 공부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달력을 보게 되었다.

1월도 이제 끝나가는 달력.

벌써 2월이 되나 싶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아, 맞다. 잊고 있었는데.”

내 말에 어시들의 책상을 정리하던 경희가 멈칫하더니 머리를 번쩍 들고는 날 돌아봤다.

“뭘?”

“엄마 생신. 음력이로 하면······, 보자.”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달력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 장을 넘겨 2월 달을 살펴보고는 10일 아래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10일이구나, 2월 10일. 음력으로 1월 5일이니까.”

그런데 날쳐다보는 경희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엄마 생신?”

그런데 선희도 날 보는 표정이 경희와 비슷하다.

뭐지 이 반응은?

“그래, 왜? 뭐 잘못됐어?”

경희가 잠시 입을 꾹 다물더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엄마는 음력 6월인데. 6월 15일.”

“뭐? 1월 5일이 아니고?”

“응. 6월 15일이 맞아.”

“······.”

아닌데. 분명 엄마 생신은 1월······. 어?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1월이 엄마의 생신이 분명하긴 한데.

문제는······.

지금의 엄마 생신이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까 미래의 진짜 엄마의 생신.

그동안 엄마의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 엄마 생신이·····?

그보다······ 응?

떠오르지 않던 엄마의 얼굴도 갑자기 또렷해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