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404화 (404/425)
  • 다가오고 있다 (1)

    1989년의 새해가 밝고 며칠이 지났다.

    며칠 휴식을 취한 화실 식구들이 밝은 표정으로 출근했다.

    쉬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떠드는 그들 사이에서 난 무의식적으로 달력을 쳐다봤다.

    벌써 1989년이라······.

    이곳에 와서 6년째가 되었다.

    시간이 정말 잘 가고 있다.

    중학생이던 쌍둥이들이 벌써 대학교 2학년이 끝나가고 있으니.

    그건 그렇고, 머신건 잭 9권은 예상대로 연장공연으로도 결국 초판기록은 깨지 못했다.

    뭐, 깬다고 해도 특별히 뿌듯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듣기론 이번일은 일본의 만화 팬들 사이에서도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거기다 한국인 만화가의 작품이라 불매해야 한다는 얘기도 좀 있었던 것 같고.

    물론 지로는 그 문제에 대해 별로 이야기 하지 않았다.

    별로 좋은 이야기도 아니니 해봐야 불편하기만 할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뭐, 이런 것쯤이야 별로 신경 쓰는 편은 아닌데, 담당자로서는 이런 이야기도 막상 하려면 조심스러울 테지.

    어찌되었건 덕분에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긴 했으니, 출판사로는 굉장한 성공이라며 축하하는 모양이었다.

    대표인 히로유키 사장이 연말 호텔뷔페에서 회식까지 열었다고 들었다.

    만화가들을 위한 연초에 열리는 것과는 달리 순전히 직원들만을 위한 그런 회식이었다는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연초마다 열리는 회식자리에는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네.

    올해도 뭐 건너뛰어야 할 것 같지만.

    어쨌거나, 일본은 일왕의 사망으로 인해 1월 7일을 끝으로 쇼와(昭和) 시대가 끝이 나고 8일부터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시작되었다.

    나야 뭐 ‘헤이세이 너구리전쟁’이라는 지브리의 애니 때문에 익숙한 단어이긴 하지만.

    그런 사실이야 어찌되었건, 어느덧 80년대 마지막 해라는 것 때문인지 뭔가 아쉽기는 하다.

    이제는 이곳 생활도 익숙해서 그런지 2018년이라는 미래에서 왔다는 기억조차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고.

    마루에서 창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한낮의 햇볕을 쬐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백설기 녀석이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털썩 누워버린다.

    턱이 빠져라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면서.

    “······.”

    어이가 없네.

    긴 마루에 햇빛이 잘 드는 자리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닌데.

    거기다 평소엔 내게 잘 다가오지도 않더니.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봤지만, 녀석은 내 시선 따윈 신경도 안 쓰는 눈치다.

    오히려 선희의 곁에 있을 때보다 더 편안해 보인다.

    그런데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익숙한 꼬마 녀석이 등장했다.

    바로 성준모였다.

    그때 내 곁에 있던 백설기를 본 준모가 조용히 신발을 벗더니 마루위로 올라온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내 쪽을 향해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왔다.

    눈을 감고 늘어졌던 백설기가 귀를 하얀 수염을 움찔하더니 귀를 쫑긋 세운다.

    녀석도 뭔가 불길한 낌새를 느낀 모양인지 눈을 가늘게 뜬다.

    그리고는 슬쩍 뒤를 돌아보자 성준모가 빠른 속도로 후다닥 달려왔다.

    그런 성준모를 본 백설기가 펄쩍 뛰더니 잽싸게 반대쪽인 2층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 백설기를 놓친 성준모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핥았다.

    “이번엔 잡을 수 있었는데.”

    “고양이가 얼마나 잽싼데. 그건 어렵지.”

    “예전엔 아니었잖아.”

    “그땐 네가 작았으니까. 놀아준 거고.”

    “지금은 커서 안 놀아줘?”

    “이제 네 장난을 받아주기 버거운 거지. 저 녀석도.”

    내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다.

    “나 우리 반에서 키가 세 번째야.”

    “거 봐라. 이젠 다 컸잖아.”

    내 말에 준모가 턱을 바짝 세웠다.

    “그렇지?”

    “그럼.”

    “그런데 누나는 아직 나더러 애기래.”

    “누나한테는 늘 애기지.”

    “왜?”

    “나중에 크면 알아.”

    “다 컸다며?”

    “아, 내가 그렇게 말했나?”

    “뭐야? 방금 그렇게 말했으면서.”

    “하하. 이거 형이 벌써 늙었나보다.”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녀석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아니야, 내가 보기엔 아직 형도 쌩쌩해.”

    “뭐? 쌩쌩?”

    이 녀석.

    그러고 보니 어느새 10살이구나.

    처음 봤을 때 4살이었는데, 이 녀석도 이렇게나 많이 자랐다.

    “누나 방해하지 말고, 옆방에서 놀아라.”

    “아니, 나가서 놀 거야. 누나한테 용돈 달래야지.”

    그렇게 말하며 화실로 들어가서는 버럭 소리쳤다.

    “누나! 나 용돈 좀 줘!”

    그리고 잠시 후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얏!”

    그리고는 곧 화실을 급하게 빠져나온다.

    곧장 성준희의 앙칼진 음성이 따라 나왔다.

    “너 땜에 스크린톤 다시 붙어야 하잖아. 이게 한 장에 얼만줄 알아? 3천원이야, 3천원. 어떡할래? 네가 물어 줄거니?”

    “미안해, 누나.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밖으로 나온 성준모가 두 손으로 싹싹 빌더니 빠른 걸음으로 성준희를 피해 현관에 있던 자신의 운동화를 쥐고는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본 성준희가 버럭 소리쳤다.

    “너 이리, 안 올래!”

    “내가 미쳤어!”

    “저게! 너 맞을래?”

    “싫어!”

    “야!”

    이미 성준모는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고 밖으로 튄 뒤였다.

    그런 준모의 뒷모습을 보고는 성준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날 보더니 곧 어색하게 웃는다.

    “미, 미안. 소란스럽게 해서.”

    “괜찮아. 그래도 준모가 오니까 활기 있고 좋네.”

    “좋긴. 시끄럽기만 하지. 요즘 애가 더 힘이 넘쳐서 통제가 안 돼.”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

    그 말에 성준희가 웃더니 다시 화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우리 윤환이 팔자 좋네.”

    이대봉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말했다.

    “팔자가 좋은 건 내가 아니라 형이겠지.”

    “그런가?”

    이대봉이 웃으며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온다. 그리고는 화실을 기웃거렸다.

    “준희야.”

    “네?”

    “나와 볼래?”

    성준희가 이대봉의 부름에 밖으로 나왔다.

    “왜요?”

    “어. 이거.”

    그렇게 말하며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천 원짜리 지폐 3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3천원.”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이걸 저한테.”

    “아까 준모가 나더러 너에게 3천원을 주라고 하던데. 나중에 자기가 갚겠다면서.”

    이대봉의 말에 성준희가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휴, 못살아. 이 녀석이 진짜.”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웃었다.

    “그래도 어린 녀석이 책임감은 있네. 크게 될 거야.”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닌데.”

    그 순간 이대봉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와 성준희를 번갈아 돌아봤다.

    “무슨 일인데? 나도 같이 웃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구만.”

    “스크린톤 한 장 망쳤다고 준희가 한마디 했거든.”

    그제야 대충 사정을 이해한 이대봉도 같이 웃었다.

    “야, 그 녀석. 장군감이네.”

    “뭔 소리야? 장군이랑 무슨 상관?”

    “책임감이 강해서 하는 말이지.”

    “두 사람 다 그만 놀려요.”

    “놀리는 거 아닌데.”

    “맞아. 나도 놀리는 거 아니야.”

    나랑 이대봉이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성준희가 곧바로 화실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그런 성준희를 보며 웃던 이대봉이 다시 화실 쪽을 기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경희야, 나 커피 한잔만.”

    “여기가 다방이야? 오자마자 뭔 커피?”

    이번엔 안에서 실버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경희한테 부탁했는데, 네가 왜 화를 내고 그러니?”

    “미친놈아, 경희가 다방레지냐?”

    “야, 넌 왜 말을 그렇게 해? 누가 다방레지래? 그냥 부탁한 건데.”

    “시끄러. 네가 직접 타서 먹어.”

    “알았어, 알았어. 내가 타면 될 거 아냐.”

    “내가 타 줄게.”

    그렇게 말한 경희가 머리를 빼꼼 내밀더니 말보며 물었다.

    “오빠도 커피 줄까?”

    “난 됐어.”

    “그럼 뭐 줘?”

    “괜찮아.”

    “알았어.”

    그렇게 말한 경희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런 경희를 보던 이대봉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역시 경희가 최고라니까.”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그렇게 말하더니, 멈칫했다. 그리고는 날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

    “내가 뭐?”

    “혹시 나이 한 살 더 먹어서 기분이 그런 거니?”

    “아닌데?”

    “이젠 너도 나이가 벌써 26살이니까, 신경 쓰일 만도 하지.”

    “아니라니까.”

    “어머니도 슬슬 결혼얘기 하시지?”

    “결혼?”

    “너도 미래 준비해야할 시점이잖아.”

    “그건 내가 형에게 하고 싶은 말인데. 형도 이젠 31살이잖아.”

    그 말에 이대봉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뭐, 독신주의자라서 괜찮아.”

    “독신주의자?”

    “그럼. 난 자유주의자거든.”

    “······.”

    그때 경희가 커피를 들고 나오며 말했다.

    “자유주의자? 그거야 젊은 때나 하는 소리지. 늙어봐. 그런 소리가 나오나. 사람은 혼자선 살수 없다고.”

    “누가 혼자 산다고 그래? 그냥 결혼을 안 하겠다는 건데.”

    “그게 그거지.”

    그렇게 말한 경희가 나를 돌아본다.

    “왜 그렇게 봐? 설마 결혼하라고?”

    “뭐, 오빠도 슬슬 준비해야 할 나이잖아.”

    “오빠는 천천히 가.”

    갑자기 화실에서 선희가 나오면서 말했다.

    그런 선희를 돌아본 경희가 허리에 팔을 얹고는 인상을 썼다.

    “넌 또 왜 그래?”

    “그냥 싫어.”

    “어휴.”

    한숨을 푹 쉰 경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엄마 앞에선 그런 소리 하지 마. 너 야단맞을 거야. 알겠지?”

    “너도 오빠가 일찍 결혼하면 좋아?”

    선희가 묻자 경희가 묘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그야······, 나도 오빠가 일찍 결혼하는 건 싫지만. 한편으론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것도 기대가 되니까.”

    “난 싫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 얘긴 그만 해.”

    “뭘 그만하라는 거니?”

    갑자기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경희가 화들짝 놀랐다.

    “어, 엄마는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점심시간인데.”

    “아, 참. 그렇지.”

    경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선희를 데리고 얼른 화실로 들어간다.

    선희는 그런 경희에게 질질 끌려들어가면서도 ‘난 싫어.’라고 말하자 엄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날 보며 물었다.

    “쟤가 지금 뭐라는 거니? 뭘 싫다는 거야?”

    “그게요, 윤환이가······.”

    “악!”

    갑자기 소리를 지른 경희가 근처에 굴러다니던 준모의 장난감, 얌체볼을 이대봉에 냅다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맞은 이대봉이 꽥하고 비명을 지르자, 엄마도 화들짝 놀랐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어시들이 모두 쉬고 있을 때 경희가 근처 약국에서 사온 박카스와 알약을 어시들에게 나눠줬다.

    “이게 뭐예요?”

    “이거, 새로 나온 피로회복제래요. 하나씩 드세요. 요 며칠 동안 바쁘셨잖아요.”

    “레모나 비슷한 거예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정체불명의 알약을 나눠주면서 저렇게 무책임한 말을 하네.

    “오빠도 하나 먹어.”

    “어. 그래.”

    나도 경희가 나눠주는 알약과 박카스를 하나 받았다.

    이건 볼 때마다 그때의 묘한 기분이 떠올라서 기분이 좀 그렇다.

    하지만, 그동안 이곳에서도 수없이 마셨지만 별일은 없었으니.

    피식 웃고는 알약을 입에 넣고 박카스를 들이켰다.

    그런데 그때 내 발아래로 뭔가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는 책상 아래를 쳐다봤다.

    언제 왔는지 백설기나 날 올려다보고 있다.

    이 녀석 갑자기 오늘따라 왜 이러지?

    평소라면 늘 선희 곁에서만 맴돌던 녀석인데.

    오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왜 내 근처에 온 건지 모르겠다.

    그 특유의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상하고.

    그런데 그때였다.

    시야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 묘한 느낌.

    그때랑 비슷하다.

    설마, 경희가 그럴 리는 없는데.

    그럼 뭐지?

    박카스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그리고 곧 나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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