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왕 (4)
일본에서 소포가 날아왔다.
보낸 곳은 나카야그룹의 홍보팀이란다.
처음엔 잘 못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소포가 도착하고 나서 곧장 전화가 왔는데, 이즈미였다.
-제대로 보낸 거 맞아요.
소포를 뜯어보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비디오테이프다.
설마 세운상가에서 판다는 그 이상한 비디오는 아니겠지?
안 그래도 요즘 그거 문제라며 뉴스에서도 자주 나와서그런지 이렇게 아무런 글자가 쓰여 있지 않은 것들은 신경이 쓰인다.
거기다 일본에서 보내온 거라 더 그렇다.
“이게 뭔데요? 영화?”
-그럴 리 없잖아요.
“그럼 뭡니까?”
-우리 나카야그룹의 최근 TV광고를 모아놓은 거예요.
뭐라는 거야?
광고?
“그걸 왜 보냈는데요? 광고는 관심 없는데.”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이즈미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리고 곧 이즈미가 입을 열었다.
-머신건 잭이랑 관계가 있으니까.
“관계가 있다고요? 어떻게요?”
-시간 날 때 재미로 보세요.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
아 짜증나.
얼굴을 찌푸렸다가 다시 테이프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그때 이대봉이 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거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래.”
“그럼?”
“몰라, TV 광고래.”
“TV광고?”
“어. 나카야그룹에서 만든 광고라더라.”
“그룹 홍보 광고인가?”
어쩌면 이대봉의 말대로 일지 모른다.
아 갑자기 더 짜증이 나네.
그래서 비디오테이프를 소파에 툭 던졌다.
그러자 이번엔 이대봉이 그것을 집어 들어서는 화실에 준비해둔 비디오에 밀어 넣었다.
“그걸 왜 넣어?”
“혹시 모르잖아. 재미있을지.”
“재미있겠냐?”
“그래도 그 여자가 보냈다니까 궁금해. 난, 보고 싶어.”
그렇게 말한 이대봉이 TV에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화실 식구들도 호기심이 생기는지 TV앞에 모여들었다.
시작과 동시에 화면조정시간에 나오는 그런 장면이 잠시 나오더니 곧바로 광고가 시작되었다.
요란한 음악과 함께 뜬금없이 노란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이 갑자기 등장했다.
그런데 이 여자들이 기괴한 춤을 추고는 황당하게도 컵라면을 먹기 시작한다.
뭔가 이상한 진행이긴 하지만, 묘하게 시선을 뗄 수 없는 느낌이다.
뭐, 꼭 저 비키니 때문은 아니고······.
다른 남자어시들은 확실히 비키니 때문······.
“남자들이란 진짜······.”
“맞아요.”
박소미와 차미정이 나를 포함한 남자 어시들을 둘러보며 혀를 찬다.
성준희는 그저 그런 우리들을 보며 웃을 뿐.
나는 진짜 아닌데.
그때 이대봉이 깜짝 놀라며 TV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어? 저거 뒤에 복장, 잭이랑 몽, 조크 같은데?”
그러고 보니 비키니 여자들 뒤에 서 있는 특이한 복장을 한 세 명이 눈에 들어왔다.
이대봉의 말대로 머신건 잭에 나오는 잭의 일행들이다.
코스프레를 한 모양인데, 꽤 디테일하게 만들어졌다.
물론 잭의 팔에 달린 머신건은 좀 조악하지만.
아무튼 뜬금없는 등장에 화실 사람들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컵라면 광고에 왜 머신건 잭의 캐릭터들이 나오는 거예요?”
우리를 보며 혀를 차던 박소미가 날 보며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나도 그게 궁금하다.
그런데 컵라면 광고가 끝나자마자 이번엔 자동차광고다.
조금 세련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어쨌건 요즘 한국에서 보는 자동차광고와 비슷하다.
그렇게 평범한 광고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자동차 뒤를 묵직한 낡은 탱크가 쫓아온다.
하지만 탱크가 어째, 익숙한 디자인이다.
김기철이 경악한 얼굴로 말했다.
“어! 저거 조라탱 아니에요?”
“그러게. 저거 진짜로 만든 거야?”
“할······ 말이 없다. 너무 대단해.”
어시들의 반응대로 만화 속에 등장하던 조라탱을 실사화 시켰다.
무한궤도 바퀴가 실제로 돌아가는 진짜 조라탱이다.
저게 정말로 구현되다니, 할 말이 없다.
아무튼 조라탱의 추격 장면인 자동차 액션씬.
조라탱에서 불쑥 튀어나온 잭이 머신건을 쏘아대자, 그것을 이리저리 피해내는 자동차의 모습.
어지간한 영화의 자동차 씬보다 더 박진감 있다.
그리고 멋지게 조라탱의 공격에서 벗어난 자동차가 멈춰 선다.
운전석 문이 열리며 늘씬한 여자다리가 나온다.
여자의 전신 모습과 함께 구겨지지 않는다는 멘트가 나온다.
“헉, 뭐야? 옷 광고였어?”
의외의 반전이 있는 광고다.
아무튼 지금 두 광고의 공통점은 바보라도 알 것 같다.
바로 머신건 잭이다.
그리고 세 번째 광고가 이어졌다.
역시 머신건 잭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백화점광고였다.
여덟 개의 광고를 다 본 뒤 검은 화면이 이어지자, 곧 비디오 재생을 멈추었다.
그리고 모두 황당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선생님, 이게 도대체 뭐죠?”
“왜 저 광고들에 머신건 잭이 나오는 거예요?”
어시들의 물음에도 난 말없이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나 역시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잠시 후 이즈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광고 다 봤어요? 우리 나카야그룹의 회사 제품 광고들인데.
그럼 아까 본 게 전부 같은 그룹회사라는 건가?
크다고 듣긴 했지만, 그렇게 다양한 회사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머신건 잭이 왜 그 많은 광고에 나오는 겁니까?”
-수준은 어땠어요? 실력 있는 특수촬영 전문가들이 꽤 많이 투입됐는데. 미국영화 스텝도 몇 명 같이 작업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왜 머신건 잭이······.”
-전에 말했잖아요.
“뭘요?”
-만화왕이 꿈이라면서요.
“······.”
-그래서 제가 좀 나선 거예요.
이건 좀이라고 할 정도가 아니잖아.
그보다 광고에 도대체 얼마를 투입한 거야?
이런 완성도라면 그냥 영화를 찍어도 될 만큼 엄청나던데.
“돈······, 엄청 들었을 것 같던데.”
-돈은 뭐 조금 들었어요.
“조금이 아닌 것 같던데.”
-하지만 생각보다 만족스럽지는 않아요.
내 기준에도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하지만, 그런 거야 내가 미래에서 온 거니 당연한 거고.
이정도 퀄리티나 스케일이면 한국에서라면 불가능한 수준의 광고였다.
“만화왕이라는 말 때문에 광고에 머신건 잭을 사용한 겁니까?”
-혹시 머신건 잭을 광고에 무단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걱정 말아요. 이미 출판사랑 그 문제는 협의한 거니까. 당연히 캐릭터 사용료는 이미 출판사로 지급도 되었고요. 아마 곧 그쪽에 돈이 지불될 거예요.
벌써 거기까지 다 진행이 되었던 거야?
-듣기론, 2차 판권에 대한 권리도 갖고 있다면서요.
“네.”
-놀랐어요. 일본은 아직 그런 판권에 대한 지식도 부족한데, 처음부터 그런 계약까지 미리 해뒀다는 것을 알고는 솔직히 감탄했어요.
“······.”
-이참에 사업을 한번 해보는 건 어때요? 꽤 재능도 있는 것 같으니까.
“그런 재능은 없어요. 그저 주워들은 게 있어서 한 계약이라.”
-아.
“어쨌건 만화왕이라는 제 말 때문에 광고에 거금을 들여 머신건 잭을 등장시키는 게 과연 그쪽 회사에 득이 될까 싶어서 물은 겁니다.”
그 말에 잠시 뜸을 들이던 이즈미가 입을 열었다.
-득이 되죠.
“진짜요?”
-네. 광고로 인해 머신건 잭의 인지도가 오르면 출판사의 가치도 올라가고, 덩달아 광고에 나온 물건들도 많이 팔릴 거니까.
“뭔가 순서가 바뀐 것 같은데. 만화의 인기가 먼저 아닐까요?”
-인기를 얻는데 순서가 중요해요?
“중요하지 않나?”
-마케팅에 대해서 아세요?
“그건 아닌데요.”
-그럼 따지지 마세요.
“······.”
-어쨌건 그 광고들은 오늘부터 TV에 방송되기 시자할 거예요.
“아직 방영이 안 된 겁니까?”
-그래요. 먼저 보라고 보낸 거니까.
“······.”
-그쪽은 재미있는 만화를 만드는 것에만 신경 쓰도록 하세요. 그럼 전화 끊어요.
그리고 또 일방적으로 끊어버린다.
이 여자가 정말.
어이가 없어 잠시 머뭇거리다 곧 한숨을 푹 쉬고는 전화기를 끊었다.
그러자 이대봉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만화왕? 정말 그런 웃기는 것 때문에 광고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몰라, 그런 모양이야.”
내 대답에 이대봉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 여자 진짜 재밌다, 재밌어!”
“시끄러워. 뭐가 좋아서 난리야?”
“그 여자,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네.”
“귀엽긴 뭐가 귀여워?”
“귀엽지. 만날 널 잡아먹을 듯 말하더니. 그런 엄청난 지원사격까지 하늘 걸 보면.”
“출판사 대주주잖아. 그래서 그런 모양이지.”
“에이 그건 아니다.”
“아니라니.”
그런데 이번엔 실버가 끼어들었다.
“출판사의 매출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저 많은 광고에 들인 돈이라면 오히려 적자일 텐데.”
실버의 말에 이대봉이 반가워했다.
“오, 역시 너도 내 의견이랑 같구나. 반가워 동지.”
“시끄러.”
나도 실버랑 같은 의견이지만, 이즈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도움이 된다던데?”
“그 여자가 그렇게 말해?”
실버의 물음에 머리를 끄덕였다.
“어.”
그러자 이대봉이 팔짱을 끼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도움이 되나 부지.”
“넌 닥치고 있어. 아깐 동지니 어쩌니 하며 씨부리더니.”
“씨부······. 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시끄러.”
다시 두 사람이 투닥거렸다.
그때 성준희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래도 어쨌건 저 광고가 나오면 만화책 판매엔 도움이 되는 거 맞지?”
“그야······ 그렇지.”
“그럼 됐잖아. 넌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거 아냐?”
그 말에 어시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네요.”
“그러게. 우리야 책이 많이 팔리면 좋은 거잖아요.”
“맞네, 맞아. 그리고 저 광고가 출판사 광고도 아니니까 출판사가 손해를 보는 것도 없고.”
그러자 투닥거리던 두 남자도 멈칫하더니 그럴 듯 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실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 여자도 대단하네, 그룹까지 움직여서 저런 광고를 찍어대다니.”
“돈이 엄청 많다고 하잖아요. 듣기론 아버지가 일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자라던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류타니가 그러던데. 맞지?”
김기철의 말에 류타니가 머리를 끄덕였다.
“네.”
“그나저나 머신건 잭이 저렇게 많은 광고에서 등장하니까 뿌듯한 느낌이에요.”
“저도요!”
이즈미가 모험을 하건 말건 어시들은 그저 머신건이 멋지게 나왔다는 사실에만 기뻐했다.
나도 뭐, 이즈미가 저렇게 무리한 것에 대해 별로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 * *
나카야그룹의 광고는 꽤나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머신건 잭이 꽤 유명한 만화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일반인에게 알려질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광고에 만화, 혹은 현실 판으로 자주 모습을 드러내니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단행본 판매량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더불어 잡지도 점점 더 팔려나갔다.
출판사에서도 머신건 잭에 관한 이벤트를 늘리고, 지금 TV방영중인 머신건 잭, 애니도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었다.
관련 캐릭터 프라모델도 많이 출시되고, 광고에서 사용된 조라탱의 실사판도 출판사 앞에 전시되었다.
물론 그 때문에 TV방송국 여러 곳에서 취재도 해갔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머신건 잭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조만간 출간될 9권에 대한 기대도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