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93화 (393/425)
  • 화실의 여름

    “모두 안녕들 하셨어요?”

    박태구가 화실에 들어오며 인사하자 어시들이 그를 반겼다.

    “태구구나, 어서 와라.”

    “어서와.”

    “두 달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어, 그래.”

    박태구의 일은 원고 뒤처리와 화실 청소다.

    박태구가 에어컨을 쳐다보며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와, 그나저나 여긴 정말 천국이네요. 엄청 시원해서.”

    “그렇지? 여긴 여름에 특히 좋아. 일하는 동안 더위 탈 일이 없거든.”

    “그렇겠네요.”

    그렇게 말하더니, 곧장 화실 청소를 간단하게 가고는 책상 한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실은 이 녀석, 여름방학동안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한 것이다.

    특히 최근 선희가 다시 메갈로폴리스 인 캣의 단편 몇 개를 더 작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일이 좀 바빠진 것도 있고.

    물론, 실버가 바쁜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어쨌건 만화라는 것은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니, 되도록 과로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여유 있을 때 비축 분을 만들어 놓으면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쉬는 것도 편하다.

    명절, 여름휴가 등등.

    조만간 올림픽도 열릴 테니, 그땐 쉬엄쉬엄 할 계획이니까.

    아무튼, 허구한 날 쫓기는 생활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에 쉬는 것도 중요하다.

    더불어 박태구도 자신의 학비를 벌어보겠다는 의지도 강하고 더불어 만화를 엄청나게 좋아하고 있으니까.

    “태구야, 이거.”

    “아, 네.”

    박태구는 김달부가 배경작업을 마무리한 원고를 받아 자기자리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열심히 지우개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박소미가 흐뭇한 얼굴을 하고는 물었다.

    “이참에 여기서 만화를 제대로 배워 볼 생각 없어?”

    “맞아. 너 만화 너무 좋아하잖아.”

    박소미와 차미정의 말에 박태구가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 그림은 젬병이에요. 그냥 만화를 좋아하는 것으로 만족할겁니다.”

    “너도 오타쿠야?”

    “오타쿠요? 그게 뭔데요?”

    “요즘 일본에서는 너처럼 만화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애들을 그렇게 부른다던데?”

    “그래요?”

    “너도 언제 기회 되면 일본 가보고 싶지?”

    “그럼요. 만화 좋아하는 사람들의 꿈인데.”

    그때 다른 어시들도 박태구의 말에 공감하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이번엔 차미정이 물었다.

    “태구 넌, 어디를 가보고 싶은데?”

    “저는 일본 출판사요.”

    “출판사?”

    “네. 어떤 식으로 만화책이 출판되는지 직접 보고 싶어서요.”

    박태구의 대답에 박소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카기 씨랑 얼굴이라도 익혀. 혹시 아니? 언젠가 일본에 갈 일이 생길지.”

    “정말 그런 일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때 칼칼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하러 온 녀석이 잡담만 하고 있을래?”

    작업 중이던 실버가 눈을 번뜩이며 말하자 박태구가 화들짝 놀랐다.

    “아, 네. 죄송해요.”

    그렇게 대답한 박태구가 대화를 그만두고 원고에 집중한다.

    “이제 겨우 대학생이 된 애잖아. 왜 애 기를 죽이고 그래?”

    요즘 다시 발걸음이 잦아진 이대봉이 실버에게 잔소리를 했다.

    그런 이대봉을 보며 실버가 눈을 번뜩였다.

    “왜 남의 화실 일에 참견이야?”

    “남의 화실이 아니지. 내게도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인데.”

    “난 너 같은 가족 없어.”

    “원래 미운 가족도 있는 거야.”

    이대봉이 실실 웃으며 말하자 실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

    “우리 실버는 그런 거친 성격이 매력이지.”

    “그딴 소리 한 번 더 하면 죽는다.”

    “······폭력쟁이.”

    그렇게 말한 이대봉이 이번엔 박태구 쪽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 태구, 안녕.”

    “아, 네. 안녕하세요.”

    “열심히 해.”

    “네, 알겠습니다.”

    그런 이대봉을 보며 실버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어시들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박태구는 아직 이런 화실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난감해하는 표정이다.

    그때 박소미가 이대봉에게 물었다.

    “오빠는 요즘 어때? 드래곤 수프. 다시 2위로 올라가야지.”

    “뭐라는 거야? 머신건 잭 잡고, 1위 할건데.”

    그 말에 어시들이 눈을 번뜩이며 이대봉을 쳐다봤다.

    실버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네가 우리 머신건 잭을 잡아? 이번에 올라온 신작에게도 밀린 주제에.”

    “그건 신작효과지.”

    “그래서 8위냐?”

    “숨 고르는 중이니까.”

    “어이구, 그러셨어요? 그래, 숨은 언제까지 고를 건데? 영원히?”

    실버가 놀리자 이대봉이 인상을 썼다.

    “아니거든. 곧 치고 올라갈 거거든.”

    그 말에 실버가 내 쪽을 슥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시댄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내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롭게 웃었다.

    “어림없지.”

    “그렇지?”

    “당연.”

    내 말에 이대봉의 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너는 말이라도 좀 좋게 해주면 어디가 덧나니?”

    “내 목에 칼을 겨누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순 없지.”

    “목? 칼? 너무 심하네.”

    “경쟁이란 그런 거지.”

    그렇게 말하고는 선희를 보며 말했다.

    “안 그래? 선희야?”

    그 말에 선희는 머리를 숙인 채 작업을 하며 왼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주먹을 불끈 쥐며 짧게 대답했다.

    “절대 안 져.”

    그 모습을 보던 이대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무 하네. 전부. 가족 취소야, 취소.”

    그러자 어시들이 다시 낄낄거린다.

    “뭔데, 뭔데? 나도 같이 웃어요.”

    경희가 화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러자 이대봉이 경희를 쳐다보며 인상을 썼다.

    “너는 내 편 맞지?”

    “응?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제발, 맞다고 말해줘.”

    이대봉의 재촉에 경희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히 오빠 편이지. 그런데 갑자기 무슨 얘기야?”

    “저 놈, 머신건 잭 잡는다는 헛소리를 하길래, 한마디 했더니 삐진 모양이다.”

    “뭐?”

    경희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대봉을 돌아봤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머신건 잭이 왜 잡혀. 꿈이 너무 큰거 아니야?”

    “야, 너까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방금 내 편이라며.”

    “다른 건 다 오빠 편이라도 이건 아니지.”

    그 말에 삐진 이대봉이 목자르는 시늉을 했다.

    “역시 너도 가족에서 아웃이야!”

    “뭐?”

    경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어시들이 이번엔 배꼽에 빠지겠다는 듯 웃어댔다.

    그런 분위기에 가장 적응이 안 되는 건 역시 박태구였다.

    그때 불만가득한 표정의 이대봉이 팔짱을 낀 채 실버를 돌아봤다.

    “또 뭐가 불만인데?”

    “예정일이 언제야?”

    “뭐?”

    “미자 씨말이야, 미자 씨. 조만간 출산 아니야?”

    “······.”

    갑작스러운 이대봉의 질문에 실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너 혹시 그것도 모르는 거야?”

    “무슨 소리, 알고 있다.”

    “언젠데?”

    “9월 17일 이라더라.”

    “오, 정말?”

    “진짜요? 그날 올림픽 개막식이 있는 날이잖아요.”

    그때 이대봉이 다시 기선을 제압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야, 우리 실버. 재주도 좋아.”

    “······.”

    실버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좀 쑥스러운 지 귀까지 벌게져 있다.

    어시들도 이대봉의 말에 몇 명은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다.

    그때 김기철이 입을 열었다.

    “전에 프레올림픽 쇼도 엄청 대단했잖아요. 그때 브룩쉴즈도 왔었잖아요. 진짜 예쁘던데.”

    그 말에 남자 어시들이 동시에 머리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계속 듣고만 있던 류타니랑 실버도 반사적으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이번엔 김달부도 슬쩍 끼어들었다.

    “매염방도 괜찮았지.”

    그 말에 다시 남자어시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김기철은 매염방의 팬인지 가장 격하게 끄덕거린다.

    이번엔 성준희가 입을 열었다.

    “저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가 가장 기억에 남던데요.”

    “어머, 나도 그랬는데.”

    “저도요.”

    이번엔 여자어시들이 동시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을 보던 이대봉이 날 돌아보며 물었다.

    “넌 누가 제일 기억에 남았어?”

    “조용필.”

    그 말에 모두가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곧 납득한 표정이다.

    그때 경희가 웃으며 말했다.

    “오빠는 일본 만화영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나왔었다면 가장 좋아했을 거야. 맞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는 날 산부인과 병원.

    화실 식구들이랑 엄마와 누나도 함께 와 있어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런 모두는 지금 복도 중앙에서 TV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여기엔 우리 말고도 환자복을 입은 사람, 간호사, 의사들까지 모여 있지만.

    군중심리라는 게 이런 것일까.

    예전의 나였다면 올림픽은 관심 밖이었는데.

    그나마도 뉴스에서 금메달 소식을 전하면 잠시 볼 정도로.

    그랬던 내가 지금 개막식을 이렇게 열심히 보고 있다니.

    나도 참 많이 변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한국입장이 제일 마지막이죠?”

    “네.”

    “이야, 사람들 많이 왔네.”

    “소련이랑 동독도 왔잖아요.”

    “LA올림픽에선 미국이 압도적인 1위였는데, 이번엔 힘들겠어.”

    “1등? 소련 때문에 안 될 걸?”

    “2등도 만만치 않아. 동독 때문에.”

    “한국도 이번엔 금메달 열 개정도 따지 않을까요?”

    “금메달 따면 국가에서 돈 많이 준다며?”

    “듣기론 금메달이 60만원, 은메달이 30만원, 동메달이 15만 원 정도라던데.”

    “매달 준다고?”

    “네. 죽을 때까지.”

    “저번에 신문 보니까, 유도는 협회에서도 준다던데.”

    “이야, 금메달 하나 따면 죽을 때까지 먹고사는 건 보장이 되겠구나.”

    사람들이 저마다 선수단 입장식 장면을 보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떠들어댔다.

    우리들도 그렇게 TV속에 빠져 그렇게 집중하고 있을 때, 경희가 헐레벌떡 우리에게 달려왔다.

    우리 앞에 도착한 경희가 숨을 고르고는 서둘러 말했다.

    “오빠, 나왔어, 나왔어.”

    “뭐? 진짜?”

    “정말요?”

    “뭔데? 여자애, 남자애?”

    “아, 그건 모르겠다.”

    “야, 그걸 알고 왔어야지.”

    “애기소리랑. 산모가 건강하다는 얘기만 듣고 달려온 거라서.”

    “얼른 가보자.”

    TV를 보던 우리들은 우르르 그 자리를 벗어나 경희를 따라 달렸다.

    단체로 뛰어가자 사납게 생긴 간호사가 우리에게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실내에서 뛰지 마세요.”

    “아, 죄송합니다.”

    그런 간호사의 호통에 모두 멈칫하고는 이번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이젠 실버가 진짜 아빠가 되는구나.”

    가면서 이대봉이 싱글벙글하며 중얼거렸다.

    나도 걸어가면서도 묘하게 뿌듯하다.

    가족처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이렇게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 자체도 신기한 기분이고.

    곧 병실 근처에 다다랐을 때 한쪽 구석에서 벽을 보며 서 있는 실버가 눈에 들어왔다.

    이대봉이 실실 웃으며 실버에게 다가갔다.

    “야, 실버. 남자애야, 아니며 여자애······.”

    그런데 말하던 이대봉이 실버 곁에서 멈칫하더니 묘한 표정이 되었다.

    왜 저러지?

    하지만 곧 실버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실버가 감격한 나머지 울고 있는 모양이다.

    저 큰 덩치로 벽을 보며 저러고 있으니, 웃기긴 한데. 어쩐지 웃을 수가 없다.

    어시들도 묘한 분위기에 머뭇거린다.

    여자들은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그때 이대봉이 그런 실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축하해, 실버.”

    “······.”

    그 모습을 보며 화실 식구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후.

    이대봉이 화들짝 놀랐다.

    “뭐? 딸? 그리고 널 닮아? 망했구나, 망했어!”

    그 말에 실버가 버럭 소리쳤다.

    “이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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