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89화 (389/425)
  • 하이테커 (1)

    여름도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지 벌써 에어컨을 조금씩 사용하기 시작하던 오후의 나른한 시각.

    “자, 오빠도 이거.”

    경희가 내 앞, 테이블에 박카스 한 병을 놓으면서 말했다.

    오후 나른할 때나 저녁 식사 후 작업을 잠시 쉴 때 간식거리를 돌리기도 하는데, 이건 오랜만이다.

    그나저나 박카스라······.

    이 녀석만 보면 참 마음이 복잡하다.

    아무래도 처음 이곳으로 올 때 마셨던 것이기도 해서, 좀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온 것에 대해 더 이상 불만 따위는 없다.

    그저, 기절하듯 잠들었던 그 기억 때문에.

    물론, 그곳에 계실 엄마에 대한 걱정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때 한숨소리와 함께 경희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또, 또.”

    “······?”

    “오빠는 이상하게 그거만 주면 복잡한 표정을 짓더라.”

    “뭐?”

    그렇게 말하며 경희가 턱짓하는 곳을 향해 봤다.

    내 앞에 있는 박카스다.

    하긴, 이것을 가져올 때마다 내가 비슷한 생각을 했으니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렇다고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는 일이니.

    “안 좋은 기억이 있나보다. 그럼, 그거 내가 먹을게.”

    한쪽에서 히죽거리며 보던 이대봉이 내 쪽으로 다가와 박카스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경희가 그런 이대봉의 손을 찰싹 때렸다.

    “오빠는 한 병 마셨잖아.”

    “이거 묘하게 중독성 있다고.”

    “시끄러워. 오빠는 여기서 작업할 것도 아니면서 자꾸 그런 거 마시지 마, 좀.”

    “너무해.”

    이대봉이 경희의 눈치를 보며 슬쩍 물러났다.

    그러더니 이번엔 선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희 앞에도 한 병 놓여져 있는데, 아무래도 그걸 노리는 표정이다.

    머리를 숙이며 그림에 빠져있던 선희가 낼름 손을 뻗더니 잽싸게 뚜껑을 따서는 홀랑 마셔버린다.

    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박카스 병을 비웠다.

    그러자 이대봉이 혀를 쯧 하고 차고는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한다니?”

    “너는 돈도 많이 벌면서, 여기서 왜 기생충 짓을 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실버가 말하자, 곧바로 이대봉이 싱글싱글 웃었다.

    “여기서 먹으면 열배는 맛있거든.”

    “공짜라서 그런 거겠지.”

    “아니거든.”

    “아니긴.”

    “진짜야. 그보다 너 오후엔 미자 씨네 화실로 가는 거 아니었어?”

    “그걸 네가 왜 신경 써?”

    “묻지도 못하니?”

    “지랄.”

    “또, 욕한다. 이젠 아빠가 될 거면서. 애가 너 따라 배우면 좋겠니?”

    “······.”

    아빠라는 말 때문인지 실버가 멈칫하더니 인상을 팍 쓰면서 그림에 열중한다.

    나름 부끄러워서 저런다는 걸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런 실버를 보며 이대봉이 낄낄거렸다.

    요즘 이대봉은 실버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툭하면 강조하고 있다. 덕분에 실버가 자주 궁지에 몰리는 분위기다.

    “데생은 어제 끝냈으니까,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라.”

    “쓸데없다니. 네 걱정하고 있는 거잖아, 지금.”

    “그러니까, 그런 거도 하지 말라고.”

    “아무튼 걱정을 해줘도 저래.”

    이대봉이 선을 넘을까말까 하는 모습을 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까지 햇볕에 강하게 내려쬐고 있었는데,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오늘 비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하긴, 일기예보가 자주 틀리는 건 미래에도 마찬가지니 특별한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소나기 때문에 창문 주변이 시끄럽다.

    신나게 투닥거리며 말싸움 중이던 이대봉도 밖으로 시선을 보낼 만큼.

    “와, 갑자기 엄청 어두워졌네? 날씨가 왜 이러지? 괜히 무섭게.”

    “어? 일기예보는 하루 종일 햇볕이 내리쬐고, 더울 거라더니.”

    “그래도 이렇게 비가 오니까, 기분은 좋아요.”

    “난 맑은 날이 좋아. 비가 오면 우울해져서.”

    어시들도 갑작스러운 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때 경희가 어시들에게 말했다.

    “퇴근할 때도 비가 계속 오면 우산 가져가세요. 제가 준비해 놓을게요.”

    가끔 이런 일이 있다 보니, 평소에도 화실엔 우산이 많이 준비되어 있다.

    손님을 위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화실에서 일하는 어시들을 위한 것이다.

    그때 선희가 내게 다가왔다.

    “이거 어때?”

    선희가 연습장을 내밀며 물었다.

    뭔가 했더니, 머신건 잭에 등장하는 새로운 캐릭터의 디자인이다.

    그런데 선희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이대봉이었다.

    “어? 그거, 혹시 하이테커야?”

    “어.”

    “진짜?”

    이대봉이 화들짝 놀랐다.

    곧이어 다른 어시들도 반응을 보인다.

    가장 가까이에 앉아있던 성준희도 궁금한지 고개를 쭉 내밀며 이쪽을 힐끔거린다.

    너무 대놓고 저러니까 신경이 쓰이네.

    다른 어시들도 이쪽을 보며 떠들기 시작했다.

    “하이테커?”

    “드디어 공개하는 거예요?”

    남자 어시들도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다가오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방해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저러는 모양이지만······, 지금도 충분히 신경 쓰이고 있는데.

    어쨌거나 하이테커는 지금 머신건 잭에 등장하는 돌연변이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리더인 존재를 칭하는 말이다.

    아, 돌연변이는 잭 일행을 탈출시킨 존재들을 일컫는 말이다.

    아무튼 이들은 맵이라는 곳을 운영하는 존재들과 싸우고는 있지만, 이들의 능력만으로는 대항할 힘이 없다. 그러나 하이테커라는 존재의 도움으로 인해 테러 같은 일도 가능한 것이다.

    물론 테러라고 해봐야 맵의 허점을 공격해 파괴하는 일이 전부지만.

    하이테커의 진짜 정체는 후반에나 등장할 예정인데, 벌써부터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었다.

    화실 어시들도 하이테커에 대한 걸 가끔 물어올 정도로.

    아무튼, 이야기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하이테커라는 존재는 처음 내 예상과 달리, 너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대봉도 하이테커냐는 질문 이후로는 그냥 앞에서 머리를 쭉 내밀며 관심을 보일뿐 더 이상 참견하지 않는다.

    그저 선희와 나의 대화를 듣고 싶다는 표정으로 눈만 크게 뜨고 있을 뿐이다.

    차라리 그냥 와서 보면 될 텐데.

    오히려 저게 더 신경 쓰인다.

    그런 이대봉을 슬쩍 보며 한숨을 가볍게 쉬고는 다시 그림을 살펴봤다.

    마치, 외국의 유명 패션쇼에서나 등장할 법한 기묘한 무늬가 전신에 그려져 있는 흰색 옷을 입은 남자.

    긴 백발이 묘하게 어울리는 꽃미남의 얼굴이다.

    물론 모델 같은 긴 기럭지는 덤.

    하지만,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좀 다르다.

    그림을 보며 내가 머리를 갸웃거리자 선희가 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

    선희의 말에 나도 모르게 그만 풋 하며 웃어버렸다.

    선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아, 그림이 우습다는 뜻이 아니고, 네 말 때문에.”

    “내 말?”

    “어. 마음에 드냐니, 뭔가 이상해서.”

    “오빠 마음에 들어야 그릴 거니까.”

    “아, 그런 거냐?”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응.”

    하기야 본인이 만든 오리지널 스토리인 메갈로폴리스 인 캣의 캐릭터도 내게 물어본 뒤 등장시킬 정도니.

    그래도 주문 생산자 같은 말은 좀 웃겼다.

    하지만 곧 웃음을 거두고는 그림을 다시 보며 말했다.

    “조금 날카롭다는 느낌이라서.”

    “얼굴이?”

    “어. 좀 더 부드러운 느낌이면 좋겠어. 그리고 중성적인 느낌으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애매하게.”

    선희가 ‘애매하게’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또 더 있어?”

    “복장의 무늬는 괜찮아. 특별하다는 느낌이 좋거든. 하지만, 복장 자체는 좀 수수하게 했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이런 복장은 다른 미지의 존재들에게 어울리는 것 같고.”

    다시 ‘수수한 느낌’이라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곧 머리를 다시 끄덕였다.

    “아.”

    뭔가 떠오른 얼굴이라 선희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그러자 선희는 다시 노트를 받아 들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선희의 모습을 보던 이대봉이 날 돌아보며 팔짱을 꼈다.

    뭔가 불만이 섞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는 콧등을 찌푸리며 말했다.

    “얼핏 봤지만, 저거도 꽤 괜찮던데.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니니? 전엔 이렇게 깐깐하게 결정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내가 대답하기 전에 실버가 끼어들었다.

    “얼핏 봤다면서, 뭐가 괜찮냐?”

    “내 눈이 좋잖아. 내가 2.0이거든.”

    그렇게 말하며 시력자랑을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실버가 썩소를 날렸다.

    “그놈의 2.0은 개뿔. 버스 번호 멀리서 확인할 때나 쓰는 주제에.”

    “야, 눈 좋은 게 얼마나 중요한데.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날 돌아본다.

    “하이테커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쓰는 건 아닐까?”

    그러자 이번엔 김기철이 입을 열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 아닐까요? 그리고 솔직히 지금 가장 궁금한 존재이잖아요.”

    “하이테커가 중요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도 있잖아.”

    이대봉의 말에 이번엔 다시 실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서, 윤환이가 장고 끝에 악수를 둔 적이 있었냐?”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신중하니까 그러는 거지.”

    “너는 네 만화 스토리나 좀 신경 써. 요즘 순위 많이 떨어졌더만.”

    실버가 히죽거리며 말하자 이대봉이 멈칫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런 실버의 말에 평소 같으면 버럭 화를 냈을 이대봉이 큭큭 거리며 거만하게 웃은 것이다.

    그런 이대봉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실버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왜 저래? 뭐 잘 못 먹었냐? 왜 웃어?”

    “웃을 만하니까.”

    “뭐가?”

    “지금 내 순위가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거 말이야.”

    “미친.”

    “아, 뭐. 그런 걱정이라면 훌훌 털어버리셔.”

    “걱정 안 한다, 이 미친놈아.”

    “이게 다 이유가 있으니까.”

    “말 좀 들어 이 미친······, 이유?”

    이번엔 박소미가 끼어들었다.

    “떨어진 이유가 있어? 그게 뭔데?”

    그러자 이대봉이 혼자 낄낄거리며 웃었다.

    “오빠, 같이 좀 웃자. 같이.”

    그 말에 곧 이대봉이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내가 지금 필살기를 준비 중이거든.”

    그 말에 모두 표정이 굳더니 곧 이대봉을 외면하고는 자기 일에 몰두했다.

    “야, 그러니까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라고. 필살기가 궁금하지 않아?”

    하지만 그런 말에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이대봉이 곧 울상이 되었다.

    그때 실버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스토리가 막혔구만, 뭐.”

    그 말에 이대봉이 버럭 했다.

    “야! 아니거든!”

    “아니긴.”

    “너, 그렇게 비뚤어진 말, 자꾸 하면 애가 뭘 배우겠니?”

    저저 또 선 넘으려고 한다.

    저러다 진짜 실버 폭발하면 어쩌려고.

    그때 가만히 있던 성준희가 뭔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날 보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대화를 들으면서 생각한 건데.”

    “어.”

    “그 다른 존재들도 하이테커랑 무늬가 같은 거야?”

    오, 성준히 대단한데.

    눈치 챘구나.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 하이테커도 신인가 뭔가 하는 것들과 같은 존재라는 거구나.”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내가 아직 이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하고는 곧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일종의 배신자 같은 개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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