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88화 (388/425)

그 시즌? (2)

“유, 윤환이네?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여기 우리 화실이랑 가까운 동네인데.”

“아 참. 그랬지.”

강용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반응에 뿔테여자가 깜짝 놀라며 나와 강용철을 번갈아 쳐다봤다.

“어머, 오빠 아는 사람이에요?”

뿔테여자의 물음에 강용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응? 어. 당연하지. 나 만화가 만들어 준 동생인데.”

“네? 만화가를 만들어 줘요?”

뿔테여자가 놀란 얼굴로 다시 날 쳐다본다.

“오빠를 만화가로 만들어 주다니, 출판사 사장님······ 이라고 보기엔 좀 젊은데.”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깜짝 놀랐다.

“아, 죄송해요.”

강용철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출판사 사장은 무슨.”

그런데 입구근처에서 떠드는 소리 때문인지 만화방 손님들이 이쪽을 힐끔거린다. 조금 불편한 표정으로.

그들의 시선을 느낀 뿔테여자가 화들짝 놀랐다.

“죄송해요.”

그렇게 손님들에게 말하고는 우리 둘을 끌고 한쪽 문으로 이끈다.

거대한 책꽂이 사이에 있는 오래된 나무문이다.

“너무 궁금하지만 자세한 건 나중에 듣기로 하고, 두 분은 이쪽으로 들어가세요.”

“응, 알았어.”

그렇게 대답한 강용철이 나를 끌고 문안으로 들어갔다.

2인용 소파가 마주보고 있는 깔끔한 공간이 나온다.

실내의 구석자리라고만 생각했는데, 모서리를 기준으로 양쪽에 창문이 있어서 꽤나 빛이 많이 들어오는 곳이다.

거기다가 창문까지 열려있어서 공기도 쾌적하다.

역시 특별룸이라는 건가?

뭐, 술집처럼 이상한 공간이라는 느낌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조용한 걸 좋아하는 손님들을 위한 공간일지도.

뿔테여자가 문 밖에서 이쪽을 빼꼼 거리며 물었다.

“안에서 기다리세요. 오빠, 식사 안하셨죠? 라면 끓여드려요?”

“아, 그래. 커피도 부탁해.”

“알았어요. 그럼 동생 분은요?”

거절하려고 하는데, 그런 내 반응을 가로막으려 강용철이 대신 대답했다.

“얘도 줘. 혼자 먹는 거 불편하니까.”

그 말에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도 물어 보기나 좀 해. 그냥 마음대로 시키지 말고.”

“야, 그냥 먹어라. 쟤가 딴 건 몰라도 라면 끓이는 재주는 타고 났으니까.”

“오빠는.”

그렇게 뚱한 표정을 짓더니 뿔테여자가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강용철이 날 돌아보며 말했다.

“내 말 믿어라. 정말 라면 끝내주거든. 아마, 라면 때문에라도 여기에 다시 올 수밖에 없을 걸?”

“마약이라도 넣었냐?”

내 말에 강용철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런가? 어쩐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강용철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봤다가 곧 한숨을 쉬었다.

“적당히 좀 하지.”

“아, 미안.”

“라면은 그렇다 치고, 혹시 형 이번에 좋은 소식 있는 거 아니야?”

농담처럼 툭 던졌는데, 강용철이 갑자기 나이에 맞지 않게 쑥스러워한다. 귀까지 빨개져서는.

“아, 뭐. 올해······.”

정말 놀랐다.

설마 했는데.

“올해? 진짜 결혼?”

“어.”

강용철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뭐, 그렇게 되었다.”

결혼이라니.

하기야, 강용철의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한참 늦은 게 맞기는 한데.

그보다.

“상식이 형도 아무 말 없던데?”

“그 녀석도 아직 몰라.”

“결혼을 모른다고?”

“아니, 저 친구.”

그렇게 말하며 문밖을 턱짓했다.

“뭐야, 그럼 비밀연애?”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어쩌다보니.”

“그만 쑥스러워하고 이야기 좀 해봐. 답답하게 하지 말고.”

내 재촉에 눈치를 보던 강용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게.”

그렇게 강용철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만화 속에서의 스토리텔링 능력과 달리 현실의 그는 그다지 말을 조리 있게 잘 하는 편이 아니라서 좀 내용이 두서없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작년 이맘때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모양이었다.

그때 강용철은 화실 바로 앞에서 무슨 요란한 공사가 있었단다.

시멘트를 깨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해서 집에 진동까지 느껴졌다고.

덕분에 며칠 동안 화실이 아닌, 이 공간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냥 만화책 수십 권을 빌리고, 음료수나 라면들도 좀 많이 시킨 뒤 이 공간을 사용했었단다.

돈은 좀 들기는 했지만, 묘하게 이곳에서 작업하는 게 좋았다는데.

그러고 보니 한쪽 구석에 책상이 있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저기서 그동안 작업을 해왔던 모양이다.

그리고 오늘도 작업을 하려는 모양인지, 가방 속에서 원고뭉치와 도구들을 꺼낸다.

아예 이곳을 전세 낸 건가.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강용철이 어색하게 웃는다.

“요즘엔 화실보다 여기가 더 편해서.”

“문하생은?”

“저녁에 출근하거든.”

“쓸쓸해서 온다는 걸로 들리는데.”

그 말에 화들짝 놀란 강용철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라니까. 여기가 더 편해서.”

“그나저나, 형이 이렇게 한자리 차지하면 민폐 아닌가?”

“야, 그래도 내가 돈은 착실히 지불하면서 쓴다.”

“오, 그래?”

“당연하지. 나 요즘 꽤 번다. 뭐, 너랑 비교하면 새발에 피겠지만.”

그때 문이 열리며 뿔테여자가 쟁반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릇 두 개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라면 왔어요. 드시면서 이야기들 나누세요.”

뿔테여자가 웃으며 말하고든 라면을 두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녀를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며 다시 강용철이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보다시피 매일 여기를 출퇴근하다시피 했거든. 그러다보니 정숙이랑은 가까워진 거야.”

뿔테여자 이름이 정숙이구나.

“그럼 저 여자 분은 여기 아르바이트?”

“아니,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곳이야. 정숙이는 낮에, 그리고 어머니는 밤에 가게를 보시고.”

홀어머니와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산다는 모양이었다.

하긴 단순 아르바이트였으면 아무리 돈을 지불한다고 해도 강용철이 여길 화실처럼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을 테지.

그나저나 라면 냄새 맡으니까 식욕이 돋는다.

서둘러 젓가락으로 면발을 입에 가져갔다.

오, 큰소리 칠만 하다.

라면만큼은 경희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다.

“결혼식은 올해 가을쯤에 할 생각이야. 올림픽 끝나고.”

강용철의 말에 씹던 면발을 뱉을 뻔 했다.

조심스럽게 삼키고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올림픽? 형이랑 뭔 상관이야?”

“그래도 올림픽 도중이면 식장이 썰렁할지도 모르잖아.”

“하긴.”

강용철의 말대로, 지금은 정말 올림픽이 엄청나게 큰 행사였다.

2년 전에 열린 아시안게임 때도 그 난리였으니, 올림픽이면 매일같이 메달소식이랑 경기방송으로 시끌시끌 할 테니.

아무튼 오랜만에 강용철이랑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창밖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시간을 봤더니, 이곳에 온지 여섯 시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가 볼게. 오랜만에 형 얘기 듣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네.”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나도 오랜만에 너랑 재미있었다.”

“언제, 시간나면 같이 화실에 놀러와.”

“에이, 그래도 그건 좀.”

“또 쑥스러워 한다. 그냥 놀러오는 건데.”

“어. 그래, 알았다.”

그렇게 만화방을 나서자, 뿔테여자도 아쉽다는 듯 말했다.

“자주, 자주 놀러오세요. 오빠 아는 동생분이시니 공짜로 해드릴게요.”

“공짜는 안 되죠.”

“괜찮아요.”

“아뇨. 그냥 제가 아는 사람들 많이 데리고 올 테니까, 열심히 돈 버세요.”

“그럼 고맙고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 만화방을 빠져나왔다.

그때 문 안에서 뿔테여자가 강용철에게 묻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런데, 오빠랑 어떻게 되는 사이에요?”

“아, 말 안했나?”

“안 했지.”

“······.”

두 사람의 대화소리가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나도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건물 입구까지 내려갔을 때 쯤 계단 위에서 버럭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뭐? 진짜!”

잠시 후 화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하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려 있으니까.

“······?”

이상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가 곧 내가 멈칫했다.

화실 소파에 앉아있는 박상식과 누나를 본 탓이다.

그때 부엌에서 엄마와 경희가 나오다가 날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왜들 저래?

그나저나, 여기 누나랑 박상식이 같이 앉아있으니 분위기가 묘하다.

뭐, 둘 사이야 잘 알고는 있지만.

어?

가만.

내가 뭔가를 느끼고 반응한 것을 본 누나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기, 윤환아. 여기 좀 앉아볼래?”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켰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소파 쪽으로 다가간 뒤 어정쩡한 동작으로 앉았다.

내가 누나를 쳐다봤다가 이번엔 박상식을 바라봤다.

그러자 박상식이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살짝 피했다.

얼굴까지 빨갛게 변하면서.

이거, 오늘 누구랑 반응이 비슷한데?

박상식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데, 담담한 표정의 누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윤환아.”

“어. 말해.”

내가 말하자 누나가 옆에 앉아서 딴청을 부리는 박상식을 돌아봤다.

그러자 박상식이 그런 누나의 시선을 느끼고는 곧장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리고는 나를 봤다가, 아래를 봤다가 하면서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어버렸다.

“그냥 말해, 시간 끌지 말고. 형이 이래서야 누나가 어떻게 믿고······. 아무튼 빨리 말해봐.”

그 말에 박상식이 움찔하고 놀라더니, 곧 입을 앙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저기, 진희 씨랑 결혼하기로 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긴장한 표정들이다.

이런 시선들을 보니까,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헷갈리긴 하는데.

내가 뭐라고.

하기야, 엄마가 만날 나더러 ‘우리 집 가장’이니 ‘대들보’니 하니까, 내 반응이 중요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마른 침까지 꿀꺽 삼키는 박상식을 보며 내가 입을 열었다.

“언제?”

내 물음에 움찔한 박상식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오, 올해. 가을쯤이면 좋긴 하겠는데. 네 생각도 알고 싶지만.”

“그게 뭐가 중요해. 그냥 두 사람 잘 살아.”

내 말에 박상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곧 긴장이 풀렸는지 밝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어, 그럴게.”

“그런 다짐은 누나한테 하고.”

“아, 그래.”

그렇게 말하며 누나를 쳐다본다.

누나는 날 보며 밝게 웃었다.

“고맙다, 윤환아.”

“내가 뭐라고, 고마워. 두 사람 인생인데.”

“그래도.”

이번엔 다시 박상식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누나 울리면 알지?”

그 말에 움찔한 박상식이 어색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그런 일이 있으면 너한테 맞아 죽어도 싸다.”

“그렇게 말하지 마, 벌써 누나 표정이 장난이 아니니까.”

“얘는, 내가 뭘 어쨌다고.”

어쨌건 이제야 화실 분위기도 밝아졌다.

엄마랑 경희는 그런 누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고, 선희도 평소보다 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래봐야 미세한 입 꼬리의 상승일 뿐이지만.

그나저나······.

“오늘 진짜 무슨 날인가?”

내 중얼거림에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누나가 물었다.

“왜? 밖에서 무슨 일 있었니?”

“있었지. 여기랑 똑같은 일.”

“뭐?”

누나가 물었지만 대답대신 박상식을 보며 말했다.

“형, 용철이 형 여자 친구 있었어?”

“뭐?”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다.

역시, 비밀연애였구만.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용철이 형도 가을에 결혼한다던데?”

그 말에 박상식이 멈칫하더니 곧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 용철이 형도 결혼한다고!”

진짜 놀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올해 결혼 시즌인가?

올림픽 기념 웨딩?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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