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르다의 별 (2)
“재밌겠어요!”
정미자가 흥분하며 손뼉을 쳤다.
그리고는 곧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괜히 흥분을 해서는.”
그렇게 말하더니 계속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
내가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첫 전쟁에서 야만족의 침략은 와르다에겐 아주 큰 시련입니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그런 전쟁에서 야만족의 전투력은 상당히 높아 승리의 가능성도 낮다. 이런 분위기라면 왕실도 공포에 빠지는 겁니다. 두 왕자는 그제야 힘을 합칩니다. 어쨌거나 지금은 전쟁을 이겨야 하니까, 물론 공주인 파라울라에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건 당연하죠.”
이야기에 빠져든 정미자는 메모하는 것도 잊고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그들을 장수들이 신뢰하지 않습니다. 점점 상황은 더 어려워지죠.”
전쟁에 관한 건 나도 거의 다 만화를 통해 배우긴 했지만, 이 시절엔 어느 정도 먹히는 지식이 될 것이다.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파라울라가 나섭니다. 장수들을 설득하기보다는 일반인들을 징집해, 병과를 나누어 배치하고, 대장간에서 필요한 무기들을 만들게 하는 등등 상당히 꼼꼼하게 직접 나서서 행동하죠. 물론, 그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한 행동이고요.”
이젠 작업 중이던 어시들의 시선도 느껴진다.
주변의 관심이 이곳에 집중해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그렇다는 건 스토리가 나쁘지 않다는 거다.
“그 사이, 장군들이 주도한 첫 전투에서 패배를 합니다. 덕분에 주력 병력을 잃게 되죠. 아무래도 그 때문에 상황이 더 악화되고요.”
“그 다음 왕자들이 공주를 돕는 건가요?”
“남매니까, 그리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서로 다툴 여유도 없고요.”
“아. 그렇겠네요.”
“그리고, 그만큼 공주의 작전도 그럴 듯하다는 거고.”
“그렇다면 대사에 공을 많이 들여야겠네요.”
“네. 하지만, 고리타분한 대사는 독자를 피곤하게 하니까, 좀 더 심플하고, 다소 감정적인 게 좋을 것 같네요.”
그 말에 정미자가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녀만화는 감성이 중요하죠. 너무 이성적이기만 해서도 싫어할 거예요.”
“그리고 전쟁에 익숙하지 않은 병사들을 이끌고 방어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요?”
“무기를 개량하는 겁니다. 이를테면 단순한 무기밖에 없었는데, 파라울라 공주가 대장간에 몇 가지 새로운 종류의 무기를 부탁해 만드는 것도 좋겠죠. 중세나 중국 같은 곳에서 성을 지킬 때 쓰던 무기도 바꾸고요. 간단한 방어용 투석기나 발리스타도 만드는 겁니다. 전쟁사를 좋아해서, 그런 고대무기의 설계도를 많이 보고, 실제로 소형으로 만들어본 경험이 있다는 이야기도 넣으면 좋겠죠.”
“무기가 제대로 만들어 질까요?”
“좀 불안정하겠죠. 그래도 괜찮잖아요. 어느 정도만 성능이 나와 줘도 훨씬 유리해질 테니까. 그 만큼 신무기는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잖아요.”
“그렇겠네요.”
“그리고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갈 때 쯤 두 번째 침략이 이뤄지는 겁니다. 그리고 신병기가 예상외의 위력을 떨치게 되고요.”
내 말에 어시들이 끼어들었다.
“와, 정말 상상만 해도 짜릿해요. 공주라고 무시하던 귀족들이나 왕족들에게 본때를 보여줬겠죠?”
“무시했다고 얘기하지는 않았는데.”
“에이, 그런 전개가 나오는 건 기본이죠.”
“맞아요, 맞아.”
박소미의 말에 차미정이 거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뭐, 그렇겠네요. 그래야 사이다니까.”
정미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이다요?”
“시원하다는 뜻으로, 선생님이 가끔 쓰시는 말이야, 언니.”
“아. 역시.”
정미자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독특한 말을 잘 쓰시네요.”
내가 살던 시절에야 유행어였지만, 이 시대에선 그렇지.
그러고 보면 와르다의 별에 등장하는 제니와 내 처지가 비슷한 느낌이네.
잠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가 정미자의 시선을 느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소미 씨의 말대로 귀족들 뿐만 아니라 두 오빠들에게도 인정을 받게 되죠. 더불어 병사들의 사기도 치솟고요.”
“전쟁을 그렇게 끝나는 건가요?”
“전면전에도 승리를 하게 되요. 엘리트 군대인 기사들에게도 사기를 올려줘야 하니까요.”
“어떻게요?”
“한니발이 로마를 상대로 대승했던, 칸나에 전투 방식을 응용하는 거죠. 상대 국가는 숫자만 믿고 단순한 진영으로 싸우는데 반해, 와르다는 기병을 중심으로 적을 에워싸 순식간에 전멸 시키는 방법으로요.”
“아, 저도 그 전쟁이야기는 알아요. 그렇게 해서 군도 공주를 신임하게 되는 거군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 정미자가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그렇죠.”
이다음은 정미자와의 토론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와르다의 승리는 대륙전체에서 신선한 충격이 되었다.
그동안 와르다를 무시하던 국가들이나, 침략을 도모하던 곳들도 그것을 보류하게 하는 큰 사건이 된 것이다.
그 사건이후 와르다는 더 부흥으로 이어진다.
“기본 뼈대가 전보다 훨씬 다이나믹 하네요. 재미도 있고.”
기본 이야기는 왕궁의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첫 번째 에피소드는 전쟁이라는 좀 자극적이고 희열이 들 만큼의 큰 승리에 목표를 두었다.
그리고 더불어 주인공인 제니가 파라울라로서의 활약을 한다.
현실에서는 다소 괴짜 같은 그녀의 진가가 전혀 엉뚱한 세계에서 발휘된다는 식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렇게 전체적인 줄거리만 대충 잡아둔 채로 초반 에피소드를 좀 더 같이 연구했다.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믿음, 그리고 상대 야만족 내부의 반응.
단순한 이야기지만, 그 속의 인간들에는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각자 나름의 캐릭터들을 만들어 나갔다.
고지식한 장군, 겁이 많은 신하.
공주가 나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 걱정하는 사람들.
야만인들의 비인간적인 행동.
그 중에서도 머리가 비상한 우두머리.
나름 캐릭터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정미자도 이 부분에서는 상당히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애초에 기본 이야기 자체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거였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단편에서 나왔던 공주의 개인 경호원 무사에 대한 이야기도 좀 넣었으면 좋겠어요. 단편에서 반응도 좋았고.”
여자들에게 잘생기고 강하며, 공주만을 지켜주는 무사는 로망이다.
실제로 정미자의 말처럼, 단편에서 꽤 인기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정미자와 의견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의외로 짧은 시간에 전체적인 줄거리와 함께 초반 에피소드가 완성되었다.
곧장 정미자가 콘티를 작업했고, 이어서 실버가 다시 구체적인 작업콘티로 바꾸었다.
이젠 콘티작업도 상당히 능숙해져서 작업시간도 상당히 짧아졌다.
대략 3화분의 콘티가 완성되자 복사를 한 뒤 팩스로 일본에 보냈다.
그리고 이틀 후.
미치코의 전화를 받은 실버가 말했다.
“편집부 반응이 좋았다고 하더라.”
그 말에 소파에서 새우깡을 집어먹으며 널브러진 이대봉이 인상을 썼다.
“뭐야, 반응이 겨우 그거라고?”
“카와다 씨가 흥분하긴 했던데.”
“야, 이······. 그건 엄청나게 좋았다는 거잖아.”
“방금 그렇게 말했잖아.”
실버의 말에 이대봉이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무뚝뚝한 얼굴로 말하는데, 어떻게 그런 느낌이 나? 하여튼, 재미없는 놈.”
평소라면 실버가 눈을 부라리기라도 했을 텐데, 기분이 좋은 탓인지 그냥 가볍게 넘긴다.
저런 행동을 보니, 생각보다 더 반응이 좋았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핑크걸 편집부에서도 반응이 좋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데생원고를 만들었다.
초반 에피소드에 몰빵 하라는 내 의견을 받아들였는지, 정말 자신의 몽땅 갈아 넣은 듯한 그림이 완성되었다.
내가 말한 몰빵은 재미에 집중하라는 거였는데.
아무튼 뭐 의욕이 너무 앞서서 좀 과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이것도 실버의 장점이니 무작정 자제하라는 무리다.
거기다 전체적인 밸런스는 나쁘지 않아서 보기엔 나쁘지 않고.
일단 데생이 완성되자마자 실버도 다시 본격적으로 우리 화실과 정미자의 화실을 번갈아 들락거렸다.
최대한 아침에 화실 작업을 마무리하고 그쪽에서 늦게까지 작업하는 일이 5일간 이어졌다.
그리고 완성된 원고가 드디어 미치코의 손에 넘어갔다.
스토리에 나와 퍼플, 그리고 작화에 실버라는 이름으로.
* * *
핑크걸의 편집부가 소란스러워졌다.
“어머, 진짜 텐겐 선생님과 퍼플 선생님이 스토리를 함께 쓰셨다고요?”
“네. 그리고 실버라는 신인 작가가 작화를 맡았다고 하던데.”
“실버? 보물섬 실버 선장 같은 느낌이네.”
“그 분 퍼플 선생님의 부군이시래.”
“진짜? 와 대단하다. 부인의 임신으로 남편이 직접 나섰다는 건가?”
그때 다른 편집자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래도 그건 좀 무리 아닌가? 퍼플 선생님이야, 써니 선생님 화실 출신이니까 실력을 인정받았다 치지만, 실버라는 사람은······.”
“그분도 써니 선생님 화실 출신이래.”
“······아, 그, 그래?”
“역시 써니 선생님 화실 출신이면, 그 까다로운 그림체를 평소에도 잘 소화해내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래도 창작분야는 좀 다르지. 거기다 남편이라면 여자의 감성에 맞는 만화를 만들 수 있을까?”
“보기도 전에 왈가왈부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일단 보고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잖아.”
“그건 그러네.”
그렇게 여자 편집자들이 모여 떠드는 사이, 남직원 한명이 샘플로 나온 잡지를 잔뜩 들고 편집부 내로 들어왔다.
“책 나왔습니다. 한 권씩 받아가세요.”
그 말에 편집자들이 우르르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런 여자편집자들의 반응에 남직원이 깜짝 놀랐다.
“어, 어? 왜 이러세요.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헛소리 말고 한권씩 주고 어서 가세요.”
“맞아요.”
여자들이 낄낄거리며 웃더니 남직원에게서 서둘러 한권씩 빼앗듯 가져갔다.
순식간에 책을 다 털린 남직원이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그리고 곧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편집부를 빠져나갔다.
그 사이 여성편집자들은 서둘러 책을 뒤적거렸다.
원래라면 가장 먼저 자신이 담당하는 만화를 먼저 살펴봤을 테지만, 지금은 텐겐이 스토리에 참여했다는 사실과 실버라는 작가의 실력이 궁금했던 것이다.
이번 원고는 평소와 달리 담당인 미치코와 편집장이 철저하게 감춘덕분에 편집부 내에서도 실제 그림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 가장먼저 원고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아, 찾았다! 와르다의 별? 이게 제목이구나.”
“나도 찾았어.”
“저도요.”
“그림이 상당한데? 써니 선생님 느낌도 조금 있고.”
“화실 출신이니까, 당연한 거 하지.”
“그런가?”
그렇게 떠들더니 곧 도서관처럼 조용해진다. 모두 책을 읽느라 집중한 것이다.
그리고 곧 거의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대단하다, 이거! 엄청 재밌어요!”
“첫 화부터 너무 엄청난 거 아닌가?”
“나, 이거 보니까 그거 생각났어요.”
“뭐?”
“······유리가면이랑 베르사이유 장미.”
“좀 생뚱맞은 조합이긴 한데, 의외로 납득이 된다.”
“그렇죠?”
“그나저나, 이번 만화로 앙케이트 순위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