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83화 (383/425)

와르다의 별 (1)

실버는 그날부터 화실에서 생활하며 데생에 열중했다.

낮엔 화실 일에 매달리고, 밤엔 정미자의 콘티를 기반으로 연필로 데생을 했다.

내가 아침 출근하면.

“작업한 거야. 이거 좀 봐줘.”

이렇게 말하며 데생원고 뭉치를 내민다.

그러면 여지없이 그것을 확인한 후, 난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건이래서 문제고, 저건 저래서 문제고.

물론 나아지는 것도 있지만, 당장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만큼 오랫동안 남의 그림만 그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탓이다.

“상상을 좀 해봐. 미자 씨가 보여준 것만 그리려고 하지 말고.”

“······.”

“단순화를 하라니까. 자꾸 그림 하나에 매몰되지 말고, 전체를 보라고.”

“······.”

이렇게 매일같이 이어지는 잔소리였지만, 실버는 묵묵히 내 말을 듣고는 고쳐나가고 있었다.

지루함, 지겨움, 피곤함과의 싸움이 이어졌지만, 실버는 매일, 매일을 잘 이겨나갔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그 덕에 매일매일 실버의 얼굴은 늙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사람에게서 기름기가 쏙 빠진 느낌이랄까, 푸석푸석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게 대략 보름정도 흘렀을 때,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데생이 완성되었다.

“느낌이 좋아졌어. 상당히 흐름도 괜찮고.”

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하자, 실버가 평소 보이지 않던 옅은 웃음까지 보여주었다.

“연필데생만 좀 더 디테일하게 마무리하면 괜찮겠어.”

“그래도 좀 부족하지 않겠냐?”

“아니, 이정도면 됐어.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부리면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아쉽기는 하다는 거군.”

“그렇게 따지면 선희 꺼도 마찬가지야. 100퍼센트 만족스러운 원고란 있을 수 없으니까.”

“하긴, 첫술에 내 욕심이 너무 컸구만.”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는다.

큰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표정으로.

며칠 후, 정미자의 담당인 미치코가 우리 화실로 찾아왔다.

정미자도 화실에 와서 실버와 함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앉아서 완성된 원고를 읽는 미치코는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봤다.

사실, 20페이지짜리 단편을 완성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애초에 완성된 데생만 있다면 누구보다 능숙하고 빠르게 작업할 능력이 실버에게는 있으니까.

배경의 경우도, 실버는 최대한 단순화 시켜 혼자 다 작업하는 괴력을 보였다.

아무튼 그 완성된 원고를 담당에게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미치코는 원고를 보면서 머리를 끄덕거리기만 할뿐 별다른 표정은 없다.

덕분에 두 사람은 더 긴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후, 미치코가 원고를 내려놓더니 밝게 웃었다.

“이거 재미있어요. 단편인데, 느낌도 좋고. 퍼플 선생님과는 다른 느낌이지만, 소녀만화의 감성도 살아있고, 연출도 상당히 좋아요. 그리고 주인공 캐릭터도 매력이 있고. 무엇보다도······.”

퍼플은 정미자의 필명이다.

아무튼 미치코가 뜸을 들이자 두 사람이 더 긴장했다.

그런 두 사람을 힐긋 본 미치코가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고 완성도가 너무 좋아요. 그림도 깔끔하고, 배경도 너무 복잡하지 않아서.”

그제야 정미자와 실버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며 확인까지 다 했었지만, 정작 담당인 미치코가 어떤 반응일지 걱정이 컸던 것이다.

“실버 씨가 작업한다고 하셔서, 다른 건 다 접어두고 그림에 대한 걱정이 좀 있었는데. 이정도면 소녀만화에도 꽤 잘 어울리고요. 오히려 소년만화의 장점이 녹아있어서 입체적이기도 하고.”

캐릭터의 디자인은 선희의 도움도 상당히 받았다.

실버 특유의 강렬한 느낌을 순화시키기 위해 캐릭터 디자인을 여러 번 바꾼 것이다.

미치코가 단편원고를 봉투에 챙겨 넣으며 말했다.

“핑크걸 다음 편에 단편이 실릴 거예요. 제 생각엔 이정도면 충분히 연재를 따낼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더니 나를 힐끔 쳐다봤다.

“······혹시, 텐겐 선생님이 작품에 관여하신 건 아닌가요?”

그 말에 내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뇨. 스토리나 연출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건 없어요. 그냥, 완성하면 훈수나 둔 정도죠.”

그 말에 실버가 날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게 단순한 훈수는 아니지.”

“그건 그래요.”

정미자도 웃으며 실버의 말을 거들었다.

덕분에 미치코도 묘한 표정을 한 채 날 쳐다봤다.

쯧.

*

2주가 흐른 뒤, 실버에게 전화가 왔다.

당연히 미치코로부터.

실버답게 통화는 아주 짧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시크하게 말했다.

“연재 결정.”

단편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는 얘기는 미치코에게서 전해 들었었다.

그리고 새로운 그림체에 대해 잡지의 팬들이 관심을 많이 가졌다고 한다.

상당히 입체적인 그림이라 꽤 많은 팬들이 팬레터를 보내왔다고 들었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는 치트를 좀 쓴 게, 실은 내가 살던 시절에 꽤 유명했던 일본 만화가 모리 카오루의 방식을 좀 사용한 탓이다.

물론, 그녀 특유의 디테일한 무늬는 말고.

감성적인 느낌을 현실적으로 표현한 그런 느낌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버에게 나름 설명했는데, 의외로 실버가 잘 표현해 낸 탓이다.

아무튼 연재결정이라는 실버의 얘기를 들은 어시들이 그에게 축하를 건넸다.

“오빠 축하해.”

“형은 좀 웃어봐요. 너무 무신경 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고생해서 따낸건데.”

“그러게. 기분 좋은 티를 안내네.”

“저 놈은 인생을 너무 재미없게 산다니까.”

이대봉의 놀림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원고작업만 할 뿐이다.

어휴, 답답이.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섰다.

“그럼, 오늘은 연재결정 기념으로 회식이나 할까요?”

내 말에 모두 환호했다.

그날은 대충 일찍 마무리하고 오랜만에 화실식구들과 시내에 새로 생긴 고급 식당에 가서 회식을 했다.

물론 정미자네 화실 어시들도 함께.

그리고 다음날.

정미자가 다시 화실로 찾아왔다.

당연히 단편을 기반으로 한 장편준비를 위해서다.

제목은 단편에서 썼던, ‘와르다의 별’이다.

원래 준비했던 세권의 분량의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새롭게 수정해 다시 만들 예정이었다.

본래의 이야기도 딱히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이번 단편으로 나간 그 부분의 에피소드만 그럭저럭 괜찮았을 정도.

사실은 장편제작에 큰 관여를 안 하고 싶었지만, 정미자가 일본잡지에 데뷔 후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얘기를 예전에 실버에게 얼핏 들었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그래서 한손 거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정작업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정미자가 전체적인 세계관을 잡아 놓은 상황이라서 크게 힘들건 없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디테일한 부분은 어차피 정미자와 실버가 해나가야 할 일이고.

이번에 실버가 작업한 단편은 현대의 여고생인 제니가 이세계의 공주 파라울라로 깨어난다는 식의 차원이동물이다.

특별한 스토리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여운이 남는 듯한 그런 느낌으로.

하지만, 새롭게 제작한 스토리는 단편의 세계관만 그대로 두고, 제니의 설정부터 새롭게 만들었다.

기존 스토리가 단순히 공주로 깨어나 수동적인 행동을 하는 캐릭터였다면, 이번에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캐릭터는 상당히 능동적인 캐릭터로 해볼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단편과 너무 달라지는데, 괜찮을까요?”

정미자의 걱정은 당연하다.

아무래도 단편으로 시험한 이야기고, 반응이 좋아서 연재결정을 했는데 갑자기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면 편집부에서도 당황할 것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기본 설정은 같으니 다른 만화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솔직히 단편에서 나왔던 설정대로 이야기를 만든다면 굳이 다시 만들 필요도 없죠. 원래 이야기가 더 어울리니까요. 하지 만, 미자 씨도 느꼈을 테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로는 핑크걸에서 자리를 잡기 힘들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안전한 방식으로만 이야기를 진행시키면 그 이상의 결과는 어려우니까.”

“모험을 해보자는 거군요.”

“모험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고요. 그냥 좀 더 재미가 있을 이야기로 만들어 보자는 겁니다.”

“알겠어요.”

정미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도 새로운 시도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일단 특별함이 없던 주인공 제니에겐 새로운 특징을 부여했다.

정미자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취미가 전쟁사요?”

“네. 학교에서도 역사에 관심이 많은 걸로 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다른 성적은 꽝이라는 것도 나쁘지 않고.”

정미자가 메모를 하면서 갸웃거렸다.

“여학생이 전쟁사에 관심이 많다니 좀 의외이긴 하네요.”

“그러니까 특징인거죠. 그리고 더불어 중국의 삼국지나 수호지 같은 소설과 손자병법, 손빈병법, 그리고 육도 등의 병법에도 관심이 많아요.”

“어머, 그런 거라면 저는 아는 게 없는데.”

“다 알 필요는 없지만, 한번 읽어는 두세요. 그리고 저랑 전투에 대한 건 의논하며 공부해보죠.”

머리를 끄덕인 정미자가 물었다.

“그럼, 전쟁이 주 내용이 되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소녀만화인데, 전쟁중심으로만 가면 좋은 건 아니니까. 그냥 공주가 된 제니가 더 이상 수동적인 캐릭터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죠.”

“아, 그럼 단편에서 주변국과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에 그저 방관자가 되지 않는다는 거군요.”

“그렇죠. 파라울라의 오빠인 1왕자와 배다른 오빠인 2왕자의 갈등이야기도 새롭게 설정해서 외부뿐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문제가 많은 나라라는 건 어떨까요? 왕은 병들고, 그런 아버지는 후계자를 결정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고.”

“그럼 공주는 어느 편이죠?”

“일단 1왕자와 2왕자의 입장부터 결정하죠.”

“네.”

정미자와의 대화 끝에 1왕자는 고지식하지만, 그래도 곧은 성격으로 국가를 강하게 하려는 타입으로 정했다. 그리고 2왕자는 현실적인 캐릭터로 현재 국가가 약하니 속국이 되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2왕자도 악한 캐릭터는 아니네요.”

“네. 그렇죠. 뜻이 달라서 갈등을 벌이고 있을 뿐이니까. 물론 개인적으로는 왕이 되려고 하는 2왕자를 1왕자가 견제하는 것도 있고요.”

“그럼 제니, 아니 파라울라는요?”

“원래 제니가 빙의되기 전의 파라울라부터 얘기해보죠.”

“아, 그렇겠네요. 단편에선 그 얘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미자 씨는 어떻게 생각했었죠?”

“글쎄요. 그러고 보니 그 부분은 따로 정해두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어색하게 웃는다.

하긴 설정이 디테일하다고 재밌는 것도 아니고, 꼭 중요한 부분도 아니다.

필요하면 넣는 거지만, 필요하지 않다면 빼도 되니까.

“그럼 이건 어떨까요? 원래는 이기적인 공주였고, 거기다 두 오빠들과 사이도 좋지 않았다 정도.”

“그럼 제니가 빙의하고 나서 너무 달라져서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그래서 처음엔 왕자들도 의심하겠죠. ‘얘가 무슨 꿍꿍이 일까’ 뭐 이렇게.”

“그리고는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제니를 받아들이게 하는 건가요?”

“그렇죠.”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전체적인 줄거리를 조금씩 잡아갔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겁니다.”

“결정적인 사건이요?”

“네. 인근의 호전적인 부족국가의 침략을 받는 거죠. 평소에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작은 사건을 빌미로 선전포고를 당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진가가 나오는 거죠. 첫 전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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