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82화 (382/425)

실버의 도전 (3)

실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단편?”

“그래.”

“연재 테스트를 받겠다는 거냐?”

“당연하지. 그리고 단편은 전에 미자 씨랑 짧게 이야기 했던 차기작, 그거.”

정미자가 찾아왔던 날, 그녀는 차기작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도 했었다.

아이디어도 좋아서, 연출과 이야기 흐름만 좋다면 충분히 괜찮은 이야기였다.

아직 제대로 구상이 끝난 건 아니지만 인상에 남을 만한 짧은 몇 개의 에피소드는 이미 완성이 되어 있었다.

대략 3권 분량의 이야기로 준비한 거라는데, 충분히 10권 이상의 장편도 노려볼 만한 이야기였다.

아무튼 그때 자리에 있었던 실버는 그 이야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건 장편이잖아. 그걸로 단편을 만들라고?”

“전부 내용을 다 넣을 필요는 없지. 대략적인 상황만 앞에 조금 넣고, 괜찮았던 에피소드 중 하나로 단편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 싶어서. 물론 초반에 현실에서 사막의 도시국가로 넘어가는 그 얘기가 가장 좋을 것 같기는 하지만.”

“나도 그 부분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련하시겠습니까? 부인 작품인데.”

“······.”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인데, 어째 실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괜히 더 놀렸다가는 저 큰 주먹에 쥐어 박힐지 모른다.

헛기침을 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단편으로 시험을 해보는 게 가장 좋을 거야.”

실버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단편으로 독자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편집부에서도 인정을 하겠지.”

요즘 정미자의 위치가 애매했으니 이번 기회에 인정을 받고 싶을 것이다.

“일단 단편엔 참여하진 않을 생각이야. 하지만 단편 데생원고는 내가 봐 줄게.”

스토리는 정미자의 콘티만으로 해볼 생각이었다.

애초에 아쉬운 내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마지막 여운도 꽤 남았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럼 미자 씨랑 언제부터 시작할까?”

“콘티가 완성되면 바로. 내게도 콘티를 가져다주고.”

내 말에 실버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다.”

며칠 후.

실버가 콘티를 가지고 왔다.

내 생각엔 이틀정도면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일주일이 조금 넘게 걸렸다.

몸에 부담이 가서 그런가했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네가 볼 거라는 것 때문에 미자 씨가 꽤 긴장해서. 그것 때문에 좀 스트레스 받은 모양이더라.”

괜히 부담을 준건가?

내가 쯧 하며 혀를 찼다.

“중요한 건, 내가 아닌데.”

“독자보다 네가 더 어렵다는데, 뭐.”

그 말을 들은 이대봉이 낄낄거렸다.

“아무렴. 우리 윤환이가 좀 까탈스러워야지.”

욕인지, 칭찬인지.

괜히 쓸데없이 끼어들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쨌건 콘티부터 확인했다.

그때 했던 이야기에 약간의 아이디어가 더 첨가되어 있었는데, 나쁘지 않다.

물론 이게 만약 장편 화 된다면 좀 많이 뜯어고치는 게 좋아 보이긴 하지만, 이 정도라면 그럭저럭 해볼 만할 것 같다.

“괜찮네. 이 정도면.”

하지만 그런 내 말에도 실버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날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하지만 실버는 곧 머리를 가로저었다.

“별거 아니다.”

별거 아니라니, 더 신경 쓰이네.

그런데 그런 실버를 보며 이대봉이 다시 낄낄 웃었다.

실버를 한번 힐긋거린 그가 날 보며 말했다.

“쟤, 지금 눈치 챈 거야.”

“눈치라니?”

“네가 방금 괜찮다고 말했지만, 네 표정은 아니었거든.”

“뭐?”

“티가 났다고. 지금 네 이마에 ‘이걸로는 부족하다’라고 쓰여 있잖아.”

나름 표정을 관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대봉의 말에 실버가 수긍을 하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곧 머리를 끄덕였다.

“뭐, 네 눈에 들 정도라면, 걱정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오, 우리 실버, 어른이 되었구나. 역시 남자는 장가를 가야 어른이 된다더니.”

그 말에 다른 어시들이 이대봉을 보며 웃었다.

“그럼 오빠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는 거네? 벌써 서른 살인데.”

놀리듯 말했지만 이대봉은 오히려 기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는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난 영원히 피터팬이야. 어른은 되고 싶지 않단다. 하지만, 서른 살이라는 건 좀 슬프다. 그래도 실버보다는 영원히 한 살 어리다는 게 위안이지만.”

그 말에 어시들이 웃었다.

물론 실버야 어이없다는 표정이고.

아무튼 정미자의 콘티가 완성되었으니 이젠 실버차례다.

물론 콘티라고는 해도 대사를 빼면 대략적인 상황만 그려져 있으니, 연출이라고 할 만 한 건 전혀 없다. 어쨌건 상상력이 상당히 필요한 콘티라는 건 분명하다.

먼저 오늘 치 화실 작업량을 마무리한 실버가 데생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원고 앞에서 끙끙거리며 그렸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는 모습이다.

평소의 실버라면 결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화실 누구보다도 그림에 대해 까다로운 성격인데다가 속도는 선희에 버금갈 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펜선에 대한 것이긴 해도.

그런 그가 원고 앞에서 저렇게 쩔쩔매고 있으니 우습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어시들은 힐끔거리긴 했어도, 웃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실버에게 웃을 정도로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니까.

물론 평소 실버를 놀리던 이대봉까지도.

실버의 데생은 모두가 퇴근한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물론 나야 평소에도 늦게 퇴근했으니, 그런 실버의 곁에서 머신건 잭의 새로운 에피소드를 구상하고 있었다.

최근 스토리의 스케일이 상당히 커진 덕분에 세계관이 상당히 커져버렸다. 덕분에 설정을 짜느라 보내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선희도 내일은 수업이 오후부터라며 남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런 우리들을 위해서 경희도 모처럼 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올 때쯤, 실버가 내게 다가왔다.

“자, 이거. 한 번 봐줘라.”

종이 뭉치를 내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서는 한 장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실버는 소파 맞은편에 앉아 그런 날 쳐다보고 있다.

그런 그를 힐긋 쳐다봤다.

잔뜩 긴장한 표정이지만, 그런 것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다시 원고로 시선을 옮겼다.

음······.

시작부터 좀 요란한 느낌이다.

평소 그림에 대해 평을 많이 하는 그였지만, 정작 데생은 처음이라 그런지, 첫 페이지부터 어색한 느낌이다.

그림 자체는 나쁘지 않고, 연출도 꽤 멋있는 게 종종 보이긴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의 연결이 너무 딱딱하다.

쉽게 말해서 그냥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다.

이래서야 보는 사람도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다.

다 보고 난 뒤 원고를 내려놓자 실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이상하냐?”

“어. 이상해.”

“어떤 부분이 이상한지 말해줄 수 있게냐?”

“형 스스로 생각하기엔 어떤데?”

“······.”

내 질문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디테일 부분은 아니겠지? 역시 연출인가?”

“연출은 맞는데, 그보다 더 문제가 있어.”

“더 문제? 어떤 건데?”

“흐름이 나빠.”

“흐름? 이야기가 넘어가는 거 말이냐?”

“그래.”

내 말에 실버가 팔짱을 끼며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그 문제가 컸구나.”

“형, 이거 먼저 콘티는 만들었어?”

“콘티? 미자 씨 꺼 말고?”

“그래. 형이 다시 콘티를 만들었어야지. 미자 씨 콘티만으로 작업을 하니까, 이런 결과가 나온 거잖아.”

“최대한 원작의 느낌을 살리고 싶어서 그랬는데.”

“그건 아니지. 형의 손에서 그려지면 형의 느낌으로 만들어야지. 그냥 대사 하나하나에 너무 열중해서 데생을 하니까 페이지마다 너무 힘이 들어가 있어. 이래서야 단편 하나 완성하고 진이 다 빠지겠다.”

안 그래도 지금의 실버 얼굴은 상당히 피곤해 보인다.

이제까지 해본 적이 없던 영역이니 심력을 상당히 소모했기 때문이겠지.

“괜찮아. 그 정도는. 나 체력이라면 자신 있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힘을 좀 빼고 그리라는 거지.”

“힘을 빼라고?”

“그래. 힘을 좀 빼. 가볍게 그린다는 느낌으로 가도 이것보다는 충분히 더 좋은 걸 만들어 낼 거야. 지금 형은 데생에 너무 욕심을 내는 것 같아 보이거든.”

“······.”

“일단 소녀만화라는 사실은 잊고, 그냥 형이 평소에 하던 펜선의 강렬한 독기를 좀 빼고 해보자. 여자는 미자 씨 그림을 너무 의식하지는 말고.”

“구체적으로 말해주면 좋겠는데.”

“음, 쉽게 말하면, 지금 형의 데생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이야기에 집중해야하는데, 너무 정신없는 그림 때문에 그게 어렵다는 거야.”

“퀄리티도 중요한 거잖아.”

“중요하기도 하지만, 어떨 땐 그게 독이 되기도 하거든.”

“그건 그렇지.”

본인도 잘 아는 얘기다.

그럼에도 자신이 작업한 데생엔 냉정하게 작업하지 못했다.

완성된 작품에 지금 나처럼 평가질을 하기는 쉽지만 정작 본인이 만들 땐 그것을 제대로 지키기 힘들었던 것이다.

물론 당연히 아는 거랑 실제로 자신이 해본다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니까.

부정적인 이야기가 이어지자 실버도 당황한 기색이다.

나름 어느 정도는 자신감이 있었을 텐데,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때 부엌에 있던 경희가 접시를 들고 왔다.

“이거 먹으면서 해. 오늘 떡볶이 맛이 끝내줘.”

그 말에 선희가 머리를 번쩍 들더니 먹이를 발견한 고양이처럼 떡볶이를 쳐다본다. 그런 선희를 불렀다.

“선희야. 아까 내가 부탁한 거 그거 가지고 와볼래?”

“아직 안 끝났어.”

“괜찮아. 완성 안 해도 괜찮으니까.”

그 말에 옅은 미소를 짓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를 들고 소파로 다가왔다.

그런데 노트를 내밀면서도 눈은 계속 테이블 위에 있는 떡볶이에 가 있다.

“네 건 따로 있으니까, 눈독 안 들여도 돼.”

선희는 경희의 말에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경희가 웃으며 다시 부엌으로 가서는 선희 몫의 떡볶이를 가지고 나왔다.

그런데 양이 엄청나네.

내 눈치를 보던 경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기, 나랑 같이 먹을거니까.”

“여기도 2인분인데, 그쪽은 우리 두배가 넘는 것 같은데.”

“착각이야, 오빠의 착각.”

누굴 해태눈으로 아나.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가 곧 다시 실버에게 눈을 돌렸다.

내 눈과 마주친 실버가 내게 쥐어진 노트를 보며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부탁한 게 뭔데?”

“어. 미자 씨 콘티를 선희에게 부탁했거든. 생각나는 대로 될 수 있는 한 가볍게 그려보라고.”

“······.”

난 선희의 콘티를 살펴보고는 곧장 실버에게 그 노트를 건넸다.

“한번 봐봐. 선희가 본 미자 씨의 스토리.”

실버가 선희의 콘티를 차근차근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고민하던 장면을 선희가 어떤 식으로 표현했는지 보면서 배우는 것이 많을 것이다.

선희는 정미자의 콘티를 보면서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들었다.

읽으면서도 전혀 정미자의 작품이라고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만의 연출방식으로 전개한 덕분에 전혀 새로운 만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선희는 이미 완성된 실력을 갖춘 만화가니, 당연히 완성도 역시 차원이 다르다.

아마 실버는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꽤 신선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저 단순히 펜선을 입힐 때의 선희가 아닐 테니까.

이젠 자신이 배우고 언젠가는 목표로 삼아야 할 그림이 눈앞에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다 보고 난 실버의 표정이 조금 변해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내가 말했다.

“최대한 가벼운 느낌으로 만들라는 주문을 했어. 어때? 느낌이.”

“······네가 말한 눈에 잘 들어온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좀 알 것 같다.”

“······그래?”

의외였다.

실버가 원래 이론은 빠삭했지만, 금방 깨달았다니.

“나 오늘 여기서 잘 테니까, 내일 아침에 다시 한 번 더 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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