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81화 (381/425)
  • 실버의 도전 (2)

    “데생?”

    되묻자 실버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겐 그게 가장 문제라서.”

    이형, 진심이구나.

    역시 결혼을 하니까, 달라지긴 했네.

    하지만, 책임감만으로 갑자기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단순히 아내의 일을 대신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으니까.

    그런데 실버는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선희에게 배우는 건 어렵잖아. 걔가 말을 잘 하는 성격도 아니니까. 거기다가 본능에 가까운 느낌으로 그리는 녀석이라······.”

    “그야 그렇지.”

    “거기다가 너는 선희에게 지금도 데생을 가르치고 있잖아. 특히 연출 같은 거. 넌 가르치는 것에는 재능이 있으니까.”

    “······.”

    내가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자 실버가 멈칫했다.

    표정이 어두워진다.

    “역시 곤란한 부탁인가?”

    실버가 혼자 납득하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 데생을 가르쳐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 형이라면 일단 기본 실력자체가 좋으니까. 요령정도만 있으면 어느 정도 가능할 거고. 특히나 미자 씨 정도의 연출력은 어려운 것도 아닌데. 아, 미자 씨의 실력을 까 내리는 건 아니야.”

    내가 손을 휘적거리며 말하자, 실버가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어, 그건. 그런데 문제가 있다는 거냐?”

    “어. 문제가 있지.”

    “······뭔데?”

    “아무리 형이 미자 씨를 위해서 뒤를 이어 만화를 그려 나간다고해도, 그림이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어. 결국 보는 독자입장에서는 이질감만 심해질 뿐이야. 그 때문에 순위에서 밀려날 테고 결국 연재는 중단될 가능성이 크거든.”

    그 말에 실버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본인도 어느 정도는 그런 결과에 대해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인기 만화가 외전의 형태로 다른 작가 손에서 완성되지만, 원작을 뛰어 넘는 건 거의 없다는 게 그 이유다.

    익숙해진 만화가 갑자기 다른 그림으로 나오면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이런 얘기가 결국 내 입에서 나와 버린 탓일까, 실버의 얼굴에 더 그늘이 졌다.

    하지만, 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 어떻게든 연재가 끝나지 않고 이어갔다고 해도, 그걸 곁에서 지켜보는 미자 씨의 마음이 편할까? 원작이야 어떻게 되었건, 형이 받을 스트레스를 걱정하지 않겠어?”

    “······.”

    내 말을 들으며 실버는 계속 머리를 끄덕였다.

    막상 도와주려고 시작한 일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면 남편으로서 그 마음이 오죽할까.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실버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답답하다.

    하지만 곧 내가 테라스의 난간을 툭툭 쳤다.

    “왜 그런 표정이야? 형답지 않게.”

    “······내가 뭘 말이냐. 난 아무렇지 않다.”

    아무렇지 않긴, 멘탈이 깨진 표정이구만.

    곧 실버를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

    “일단 여기까지는 형의 생각에 대한 내 예상이고.”

    내가 히죽거리며 말하자,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한 실버가 묘한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

    “내 의견이 있긴 한데······.”

    실버가 멈칫하더니 곧 깜짝 놀랐다.

    “······뭐? 의견?”

    “그래.”

    “말해 봐. 얼른.”

    “갑자기 왜 그래?”

    실버가 내 두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의견이 뭐냐고?”

    우악스러운 실버의 힘에 내 몸이 자동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한다.

    그나저나 괴물 같은 인간이 흥분하니까 살짝 무섭네.

    여기가 테라스라는 걸 생각해보면 날 아래로 집어 던질지도 모른다.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일단 미자 씨와 대화를 해보고 싶은데.”

    “미자 씨랑?”

    “어. 일단 시간 되는대로 미자 씨에게 화실에 한 번 들러달라고 해줄래.”

    내 말에 실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다음 날.

    정미자가 화실로 찾아왔다.

    화실 식구들은 그녀에게 축하 인사말을 전했다.

    “언니, 이야기 들었어요. 축하해요!”

    “축하합니다!”

    “축하 하무니다!”

    “고마워요.”

    그렇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정미자는 실버, 그리고 나와 함께 옆방으로 갔다.

    준비되어 있던 테이블 주변으로 자리를 잡고 앉자, 경희가 웃으며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미자 언니는 홀몸이 아니니까, 우유로.”

    “고마워요.”

    “오빠는 삼삼삼 커피.”

    “땡큐.”

    “실버 오빠는 특별히 유자차.”

    “고맙다.”

    “그럼 이야기 하세요.”

    경희가 웃으며 말하고는 나가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일부러 오라고 해서 미안해요.”

    그 말에 정미자가 웃으며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뇨, 저희 일인데.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실버가 유자차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테이블을 가볍게 탁치며 말했다.

    “자, 네 의견을 말해봐라.”

    실버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갑자기 움찔하고 놀란다. 그리고는 옆으로 힐끔거렸다.

    눈치를 보니, 정미자에게 옆구리를 꼬집힌 모양이다.

    “실버 씨는 좀 가만히 있어봐요.”

    “아, 그래.”

    아직도 실버 씨라고 부르는군.

    혹시 실버의 본명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하긴, 심봉 씨라고 부르는 게 더 이상하긴 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날 보던 실버가 미간에 힘을 주며 툭 던지듯 물었다.

    “왜, 웃어?”

    “아니, 딴 생각을 하느라.”

    “무슨 생각?”

    그렇게 묻다가 다시 움찔 거린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는 눈치를 주자 실버는 다시 몸을 바로 하며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린다.

    애처가 인지, 공처가 인지.

    아무튼 잡념을 던지고 곧장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왕가의 신부’는 어때요?”

    ‘왕가의 신부’는 정미자의 두 번째 만화다.

    중세가 배경으로 평민이 왕족의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얘기인데, 요즘 순정만화의 유행 같은 전개방식의 이야기다.

    그림에 비해서 평범한 느낌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앙케이트 순위 말씀이세요?”

    “네.”

    정미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거렸다.

    “부끄럽지만, 하위권이에요.”

    “화실 운영은 어때요?”

    “갑자기 호구조사라도 하는 거냐?”

    실버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움찔거리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를 한번 쏘아본 정미자가 다시 내게 고개를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건 괜찮아요. 앞에 출간된 단행본에서 들어온 돈이 있어서, 그럭저럭 운영은 해 나가고 있어요.”

    어시가 4명이라고 했던가?

    우리 화실의 어시들보다는 적지만 일반적인 만화가의 문하생에 비해서는 꽤 많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확한 사정이야 모르겠지만 그리 여유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 연재하고 있는 덕분에 원고료가 적지 않아 유지를 하는 것이지, 일본에서 생활하는 만화가였다면 유지가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실버의 수익은 빼고.

    그런데 정미자가 묘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본다.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던졌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으로.

    “제 생각엔 연재를 마무리 하는 게 어떤가해서요.”

    “네? 연재를 마무리······ 하라고요?”

    “네.”

    내가 머리를 끄덕이고 말하자마자 실버가 날 휙 돌아보더니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야, 이윤환!”

    실버가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그 때문인지 옆방인 작업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실버의 큰소리 때문이겠지.

    한 번도 내게 이렇게 소리 친 적이 없는 실버다.

    덕분에 나도 조금 놀랐다.

    실버가 인상을 와락 쓰며 내게 말했다.

    “내 부탁은 단칼에 거절하더니, 이게 네 의견이었냐?”

    “실버 씨!”

    “이번 연재가 얼마나 중요한 지,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어!”

    “제발 그만해요!”

    정미자가 실버에게 굳은 얼굴로 재차 말하자, 그제야 흥분을 조금 누르며 입을 다물었다.

    물론 아직 씩씩거리고 있긴 하지만.

    그런 실버를 보던 정미자가 나를 돌아보며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실은 편집부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왔던 모양이에요. 카와다 씨는 말하지 않았지만.”

    담당인 미치코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편집부 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물론, 카와다 씨는 좀 더 연재를 이어가보자고 하더군요. 처음엔 이런 성적을 받았던 만화들 중에서도 크게 히트하는 작품이 종종 나온다고 하면서요. 하지만······.”

    정미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게 흔한 일이 절대 아니고, 이번 이야기로는 어렵다는 것도 저는 잘 알고 있으니까.”

    “아니, 미자 씨는 재능이 있어요. 아직 재능이 빛을 발하지 못했을 뿐이야.”

    평소의 실버답지 않은 말이었다.

    이대봉이 있었으면 놀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버가 버럭 화를 낸 이유를 잘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을 쳐다보던 내가 말했다.

    “왕가의 신부를 그만두고, 저랑 같이 신작을 해보자는 겁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이 흠칫했다. 그리고는 동시에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정미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시, 신작을 선생님이랑 함께요?”

    “네. 뭐, 혹시 구상하고 있는 작품은 있어요?”

    “있긴 하지만······.”

    “그럼, 그걸 기준으로 구상해보도록 하죠. 그 전에 일단 이 만화를 마무리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형은 어때? 역시 반대?”

    “······바, 반대는 아니다.”

    “그럼, 찬성?”

    실버는 대답하지 않고 정미자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을 받은 정미자가 내게 말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혹시 머신건 잭의 작업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저 몰라요? 두 편을 연재할 때도 여유만만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아직 얼떨떨해하는 얼굴이다.

    그런 정미자를 보다가 다시 실버를 돌아봤다.

    “미자 씨가 찬성했으니까, 형도 불만은 없지?”

    “······그야.”

    “그럼 이번엔 형 차례.”

    실버가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

    “어. 형이 말한 데생훈련 말이야.”

    그 말에 정미자가 깜짝 놀랐다.

    “데생 훈련이요?”

    그러더니 실버를 돌아본다.

    “아까 부탁이라는 게, 혹시 그거였어요? 데생 훈련?”

    “······.”

    “정말이지, 실버 씨는······.”

    실버가 곤란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정미자가 다시 날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실버 씨가 쓸데없는 부탁을······.”

    “실버 형이 남도 아닌데, 뭘요. 미자 씨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괜찮아요. 아무튼.”

    그리는 다시 실버를 바라봤다.

    “데생, 그건 오늘부터 일 끝나고 같이 해보자.”

    “정말이냐!”

    “어. 차기작을 미자 씨랑 구상하면 그건 형이 해야 할 테니까.”

    그 말에 두 사람이 얼어붙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정신을 차린 실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차기작을 처음부터 한다고?”

    “그래. 형이 해야지.”

    내 말을 들은 실버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곧 머리를 끄덕였다.

    “부탁할게.”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왜 저래?

    그런데 뒤로 돌아 문 앞으로 가서는 활짝 열어버렸다.

    “으악!”

    “아야야!”

    “으쿠!”

    갑자기 문 앞에서 사람들이 와르르 무너진다.

    “이것들이 뭣들 하는거야!”

    우리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놀란 어시들이 우르르 옆방 작업실로 돌아갔다.

    그런데 어째 이 상황이 만화에서 많이 보던 장면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의 내 결정으로 인해 실버가 화실을 떠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내 욕심만 차릴 수는 없는 일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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