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를 찾아라 (2)
“여대생! 진짜?”
“우리가 모른다고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건 아니지?”
“그딴 걸 왜해? 너희들한테 뭐 주워 먹을게 있다고.”
그 말에 한명이 곧 납득했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주워 먹다니, 꼭 말을 해도.”
“하긴, 우리에게 주워 먹을 건 없지.”
“야, 네가 그렇게 납득해버리면 어떡해! 우리가 거지같잖아.”
“우리 거지 맞아. 돈 없어서 학교에서 라면만 사 먹잖아.”
“아. 그런가?”
돌아가면서 떠들어대던 친구들이 다시 박태구를 돌아봤다.
“만화가 이름이 설마 구호는 아니겠지?”
“구호는 해적만화출판사 이름이고.”
“아 참, 그렇지.”
“그럼 이름은 뭔데?”
“써니.”
“써니?”
그렇게 말하며 친구들이 서로를 돌아본다.
그런데 그중 한명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바로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써니! 응응응, 하며 시작하는 외국노래 그거?”
“야 이 무식한 녀석아. 보니엠이잖아. 보니엠.”
“아, 맞다. 그거.”
그렇게 말하더니 두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같이 ‘써니!’라고 외치고는 다시 음만 웅얼거리며 디스코를 추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유로댄스 음악을 좋아하던 애들이라 가끔 동아리방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저런 춤을 추기도 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박태구가 버럭 소리쳤다.
“야, 그만둬라 이 미친 녀석들아! 먼지 날리잖아!”
“아, 짜식. 거 기분 좀 내자는데.”
“맞아. 흥을 모르는 놈이라니까, 흥을.”
그렇게 투덜거리며 세 사람이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중 한명이 박태구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어디 대학교 학생이래?”
“그런 것까지는 몰라.”
그 말에 세 사람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중요한데.”
“맞아. 가장 중요한 건 쏙 빼먹다니.”
그런 반응에 박태구가 인상을 썼다.
“이 한심한 것들아. 그러니까 추리를 해보자는 거다.”
“추리?”
“이 와중에 갑자기 무슨 추리?”
“여대생, 그러니까 써니가 우리학교 학생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말이야.”
그 말에 잠시 멀뚱거리던 세 명이 곧 배를 잡고는 크게 웃어댔다.
“하하하, 추리 개그냐?”
“그러게. 써니가 우리학교 학생? ‘도시의 욕망’ 그린 만화가가 우리학교 교수라고 말하지 그러냐.”
도시의 욕망은 성인만화인 시티헌터의 해적판 제목이다.
물론 일본에서는 소년점프에서 연재중인 분명한 소년만화지만.
“와, 그거 비유 좋다.”
“내가 비유를 좀 잘하긴 하지.”
“난 개인적으로 ‘권법소년’이 제일 좋은데.”
“아, 전성기가 그린 거?”
“야, 권법소년은 해적판이잖아. 그거 베낀 사람의 본명도 아닐걸?”
“그럼 용소야의 성운아도?”
“당연하지.”
그렇게 웃고 떠들던 세 사람이 다시 박태구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써니가 한국인이고 여대생이라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우리학교라고 생각하는 건 좀 그렇지.”
“맞아.”
“너무 나갔다, 너무 나갔어.”
“태구야, 지구를 떠나거라~.”
“나가놀아라~.”
세 사람은 손을 휘적거리며 유행어를 떠들고는 좋다고 낄낄거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태구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그림을 툭툭 두드렸다.
“이 그림을 보면 가능성이 있다니까.”
“에이, 그림이야 정말 비슷하게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그래도 이건 달라. 세세한 버릇까지 똑같다고.”
“버릇? 어떤 거?”
“이거.”
박태구가 복잡한 그림들 중 하나를 꼭 집어 말했다.
그러자 세 명이 인상을 쓰며 자세히 봤다. 하지만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다.
“모르겠는데.”
“삐죽 선 머리칼이랑 손가락 그릴 때 끝의 뭉툭한 이 느낌. 모르겠어?”
그 말에 셋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미친 놈.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그게 특징이라고. 그런 식으로 그리는 사람은 한 트럭도 넘겠다.”
“나도 만화라면 좀 보는데, 네 녀석이 말하는 특징은 전혀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지금 만화방에서 유행하는 이연세 스타일은 뭐로 설명할래?”
“그런 것과는 다르다니까. 이건 같은 사람이 그린 느낌이라니까 그러네. 척 보면 모르냐?”
박태구의 말에 친구 한명이 팔짱을 끼며 인상을 썼다.
“척 봐도 모르겠다. 우리는 너랑 달라서.”
“맞아. 너 같은 눈이 아니라고, 우리는.”
“그래서, 네 추리로는 써니라는 그 만화가가 우리학교 학생이라고?”
그 말에 박태구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
“······.”
“······.”
셋은 박태구를 빤히 쳐다보다가 곧 자신들끼리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서로 머리를 끄덕이더니 박태구에게 달려들었다.
“이 자식, 잡아!”
곧장 세 사람이 박태구를 붙들었다.
“어어? 뭐하는 거야?”
“헛소리 그만하고 그거나 이리 내 자식아.”
“중요한 장면까지 멈추고는 한다는 소리가 정말.”
그러면서 박태구가 쥐고 있던 리모컨을 빼앗기 위해 그의 팔을 비틀었다.
“아야야! 팔 아프다고!”
“아싸, 뺏었어.”
한명이 리모컨을 쥐며 소리치자 다른 이들이 말했다.
“야, 얼른 플레이 해봐.”
“빨리!”
“알았어.”
다시 비디오가 재생되자 화면에선 헐벗다시피 한 여자요괴가 야한 포즈로 등장한다. 그 장면을 본 세 명이 환호했다.
“오, 끝내준다.”
“아무튼 일본 애들은 이런 거 무지 잘 만든다니까. 변태적인 상상력이 세계최고야.”
그렇게 모두가 시시덕거리며 화면에 열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박태구는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리고는 동아리방을 빠져나와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혼자라도 찾아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
다음날이 되자 박태구는 친구가 그림을 발견했다는 그 벤치 근처로 갔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있는 또 다른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유일한 실마리가 이 장소였으니, 그저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다.
써니의 얼굴은 모른다.
하지만 떠오르는 기억은 있었다.
명동에 있는 중국대사관 앞 서적상에서 얼핏 소년 히어로에서 써니의 사인회 사진이 있는 걸 본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땐 써니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제대로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나중에야 그녀가 머신건 잭을 그린 만화가고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 샀어야 했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얼핏 봤던 사진을 떠올려봤다.
하지만, 그래봐야 흑백사진에다 사인하는 장면 정도만 찍혀있어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기억하고 있는 건 단발머리였다는 것 정도.
하지만 다시 구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얼마 전에 근처를 죄다 뒤져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으니까.
그때 지나가던 여자애들이 벤치에 앉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세 명.
두 명이 단발머리이긴 하지만 수다를 떠느라 시끄럽기만 할뿐 아무도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그림을 꼭 이곳에서 그릴 거라는 보장이 없다.
거기다 날씨가 이렇게 쌀쌀하다면 더더욱 그렇다.
할 수 없이 좀 뻔뻔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여자들을 힐끔거리던 박태구가 벤치에서 일어나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박태구가 자신들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느낀 여자들이 그를 보고는 수다를 멈추었다.
그중 머리가 길고 반짝이는 귀걸이를 찬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저 남자친구 있는데요.”
그 말에 박태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멈칫했다.
그때 긴 머리의 여자 곁에 있던 단발머리에 안경 쓴 여자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요.”
이번엔 다른 여자도 눈치를 보더니 어색한 얼굴로 말한다.
“······전 없지만, 곧 생길 거예요.”
그 말에 박태구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러시군요. 그쪽은 생기실 거예요.”
그 말에 마지막에 말했던 여자가 얼굴을 붉혔다.
“고, 고마워요.”
“얘, 뭘 고맙다는 거니? 그냥 하는 인사말인데.”
“그, 그래도.”
머리긴 여자가 다시 박태구를 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그쪽에게 관심 없어요.”
그 말에 박태구가 머리를 끄덕였다.
“아뇨. 미안 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좀 물어볼게 있어서요.”
그러자 세 명의 여자들이 눈을 데굴거렸다.
박태구가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종이 한 장을 여자들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이 그림을 그리신 분이 계신가해서요. 어제 여기서 떨어뜨렸다고 해서.”
그제야 남자가 다가온 목적을 이해한 여자들이 약간 당황해했다.
자신들 중에 저런 그림을 그릴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작게 말을 주고받으며 중얼거린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곧장 벤치에서 벗어나더니 서둘러 캠퍼스 바깥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던 박태구가 코를 훌쩍이더니 다시 반대편 벤치 쪽으로 갔다.
그렇게 늦게까지 기다리며 몇 명의 여자들이 그 자리에 앉고 떠나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그림을 그린 사람을 찾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오늘따라 더럽게 춥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태구는 다음날에도,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같은 짓을 반복했다.
그렇게 며칠을 더 있자, 지나가던 학생들 중 몇몇은 박태구를 보며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어머, 저 사람 오늘도 저러고 있네.”
“누군데?”
“그건 모르지만, 요 며칠 동안 오후만 되면 저 자리에서 앉아있더라고.”
“누구 기다리나?”
“글쎄? 그런 것 같기는 하던데.”
“사연이 알고 싶네.”
그녀의 말에 친구가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럼 네가 물어보던가.”
“어머, 미쳤니?”
그렇게 웃으며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박태구는 계속 자리에 앉아 반대쪽 벤치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경비원 할아버지가 혀를 차며 따뜻한 꿀물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젊다고 이런 곳에 계속 있으면 안 돼. 나중에 나이 들면 뼈 시려.”
“네.”
그때 그를 발견한 만화동아리 친구들이 다가왔다.
모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놈아. 네가 무슨 용가리 통뼈냐? 이게 무슨 짓이야?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게.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이렇게 무식한 짓이라니.”
친구들을 눈앞에서 구박을 하고 있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때 다른 친구가 입을 열었다.
“나라면 학교 벽보에라도 붙이겠다. 그림의 주인 찾는다고.”
그제야 박기태가 눈을 번쩍 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벽보? 맞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더니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뒷모습을 보던 친구들 한명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놈 진짜 바보였구나.”
*
며칠 후.
박태구가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갔다. 그런데 나가자마자 만화동아리 친구가 달려들더니 그의 팔을 끌었다.
“어어, 왜 그래?”
“얌마, 왔다고, 왔어.”
“오다니. 누가?”
그 말에 친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버럭 했다.
“네가 벽보에 붙인걸 보고 우리 동아리실로 그림 주인이 찾아왔다니까!”
“정말?”
“그렇다니까. 지금 애들이 어디 못 가게 붙들어 두고 있을 거야.”
깜짝 놀란 박태구가 친구의 손을 뿌리치고 곧장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