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를 찾아라 (1)
수업이 끝나자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강의실 안에선 교수가 교탁 앞에서 여학생 한명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교수가 물었다.
“······역시 곤란한가?”
“네.”
평소처럼 시큰둥한 반응이다.
하지만 교수는 여학생의 평소 모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기분 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번 논문에 그녀가 참여해주길 바라는 입장이라 더욱 아쉽기만 했다.
“알겠네. 하지만 언제고 꼭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조교에게 말해주고.”
“네.”
“그래,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고는 교수가 물러갔다.
그런 교수의 뒷모습을 보던 여학생이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복도에 있던 남학생들이 그녀를 힐끔거렸다.
청색 더플코트, 죠다쉬 청바지와 까발로 스포츠 운동화차림.
아직 애 티를 벗지 못했지만, 워낙 얼굴이 예뻐서 누구라도 한번쯤은 돌아보게 만들 정도다.
거기다 이름이 이선희.
지금 한창 잘나가는 가수와 이름이 같다보니, 그녀의 이름을 과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머리까지 엄청 좋다.
강의 시간에 교수들이나 조교들이 어떤 질문을 던져도 척척 대답할 정도로.
소문으로는 서울대도 충분히 들어갈 실력이었음에도 굳이 이곳에 들어왔다고 한다.
물론 이곳도 꽤 괜찮은 곳이긴 하지만, 서울대에 비길 정도는 아니다.
그냥 소문이라고만 하기엔 그녀의 성적은 너무나 독보적이다.
아무튼, 이런 저런 소문이 많은 신비에 쌓인 여학생이라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워낙 말수가 적고 차가운 성격이라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타입.
그 때문인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늘 혼자 움직이는 그녀에게 접근했던 수많은 남자들도 몇 분이면 나가떨어졌다.
그런 그녀가 수업을 마치고 평소처럼 핑크 헤드폰을 쓰고는 음악을 들으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한적한 벤치에 앉은 선희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버릇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대략 20여분 정도가 흘렀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선희와 똑같은 얼굴의 여학생.
바로 경희였다.
“많이 기다렸어?”
하지만 머리에 쓴 헤드폰 때문에 전혀 들리지 않는지, 선희는 계속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내려다보던 경희가 곧 선희의 곁에 앉았다.
그제야 머리를 들어 곁을 슬쩍 돌아보는 선희.
경희인 것을 확인하더니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희의 헤드폰 한쪽을 살짝 들어 올린 경희가 물었다.
“재미있어?”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경희가 다시 말했다.
“어서 가자. 이런 곳에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그러고는 선희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발갛게 물든 볼이 차갑다.
봄이 왔다고는 해도 아직 쌀쌀한 날씨다.
그런데도 선희는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다.
예전부터 그림에 빠지면 주변상황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오래전 다락방에서 지낼 때도 겨울엔 그림 때문에 손등이 터서 갈라지는 일이 비일비재 했으니까.
경희는 선희의 점퍼앞 지퍼를 슥 올려준다.
잠시 후 선희의 손이 멈추었다.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 볼펜을 넣더니 그제야 곁에 앉은 경희를 제대로 돌아봤다.
경희가 웃으며 선희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얼른 가자! 가는 길에 시장에 들러서 재료도 사고. 맛있는 거 해줄게.”
경희의 말에 선희가 기대어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 거?”
“글쎄······.”
“빵이 좋은데. 떡볶이도 좋고.”
“그럼 둘 다 만들지 뭐. 어때? 좋아?”
“응.”
머리를 끄덕인 선희가 경희의 손에 이끌려 멀어져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사라진 벤치 위.
그 자리엔 종이 한 장이 놓여있었다.
선희가 그리다만 그림이 그려져 있는.
잠시 후.
벤치 근처를 지나던 남자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찌라신가?”
작년에 캠퍼스 내에서 많이 보던 A4용지다.
그런데 뒤집어보니 그림이 그려진 보통의 종이다.
낙서라고 생각하고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멈칫했다.
생각보다 퀄리티가 높은 그림이라 호기심이 생겼다.
“되게 잘 그렸네.”
그때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어? 아. 이거.”
“뭔데?”
“누가 그리던 만화 같은데. 아, 네가 보기엔 어떠냐? 엄청 잘 그린 거 맞지?”
그렇게 말하며 종이를 내밀자 친구가 그것을 무심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평소 만화에 대해선 일자무식인 녀석의 말이라 별로 신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을 받아든 친구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해버렸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떨어져 있던데?”
“······.”
“왜? 그림에 문제 있어?”
그렇게 물었지만 친구는 대답 없이 크게 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야, 왜 그래?”
“너, 먼저 가라. 난 들를 때가 있어서.”
“어딜?”
하지만 대답하지 않자 인상을 썼다.
“야, 오늘 친구들이랑 당구치기로 했잖아.”
“오늘은 안 돼. 다음에 하자.”
그렇게 말하며 곧장 몸을 돌려 다시 학교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내일 보자!”
“야! 무슨 일인지 정도는 말해줘도 괜찮잖아!”
하지만 벌써 뛰어가 버린 뒤였다.
그런 친구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쉬더니 피식 웃었다.
“또 만화동아리로 가는 건가?”
종이를 든 채로 열심히 달려가던 박태구는 곧장 캠퍼스 구석에 있는 낡은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계단을 열심히 올라서는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낡은 철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비디오 앞에 모여 있던 세 명의 남자들이 화들짝 놀랐다.
“으악!”
“앗!”
세 사람이 우당쿵탕 난리법석을 떨더니 어설픈 동작으로 TV 화면을 가린다.
세 명의 호흡이 잘 맞지 않은 탓에 제대로 가리지 못해 TV화면이 거의 다 눈에 들어왔다.
그 걸 본 박태구가 혀를 찼다.
“쯧, 가리려면 제대로 가리던가. 다 보이잖아.”
세 명은 박태구의 얼굴을 보더니 곧장 한숨들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버럭 소리쳤다.
“야, 임마! 깜짝 놀랐잖아!”
“노크를 하라고, 노크!”
“아, 진짜. 간 떨어질 뻔했네. 다음엔 정말로 손잡이를 좀 교체해야지, 원.”
세 명은 그렇게들 말하고는 다시 시선을 TV로 옮겼다.
TV화면 속에는 어둑어둑하면서 야시시한 장면의 만화가 눈에 들어왔다.
“태구야, 너도 여기 자리 잡고 앉아서 이거나 같이 보자.”
“세운상가에서 거금 만원을 주고 산거다. 그런데 이거 작년에 일본에서 나온 성인용 만화영화래. 그림이 진짜 장난이 아니다. 공작왕 비슷한데, 더 죽여.”
“아니지. 그래도 공작왕이 더 화끈해.”
“이거 제목이 뭐랬지?”
“요수도시! 좀 기억해라, 기억!”
“맞다. 요수도시. 그런데 이 녀석은 진짜. 까먹을 수도 있지, 왜 화는 내고 지랄이야!”
TV앞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떠드는 그들을 보던 박태구가 곧바로 비디오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곧장 STOP 버튼을 눌러버렸다.
세 명이 동시에 깜짝 놀랐다.
“어? 뭐야?”
“응?”
“얼레?”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박태구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있는 리모컨을 보고는 다시 버럭 했다.
“야, 이 미친놈아! 갑자기 왜 비디오를 꺼!”
“이리 내놔.”
친구들이 달려들자 박태구가 리모컨을 등 뒤로 숨기고는 방금 가지고 왔던 종이를 그들에게 내밀었다.
“비디오는 나중에 보고, 이거 먼저 봐봐.”
그 말에 모두의 얼굴이 짜증으로 물들었다.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리모컨 이리 안 내? 죽고 싶냐?”
“빨리 내놔 임마!”
그런데 한명이 그림을 보더니 머리를 쭉 내밀었다. 그리고는 다른 친구들을 두 손으로 말렸다.
“야야, 잠깐만! 잠깐만!”
“뭐? 왜 그래?”
“뭔데 그래?”
그제야 그림에 관심을 가진 두 사람이 같이 그림을 쳐다본다. 그리고 가장 먼저 그림을 확인했던 친구가 종을 뺏듯이 가져가서는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어? 이거 그림 장난이 아닌데?”
나머지 둘도 그림을 보며 감탄했다.
“그러게. 엄청 잘 그렸잖아.”
“잠깐, 이거. 그거잖아. 뭐더라······, 아. 기관총 자쿠.”
‘기관총 자쿠’는 한국에서 발매된 머신건 잭의 해적판 제목이었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꽤나 알려진 일본만화다.
“기관총 자쿠? 정말?”
“어? 진짜네.”
“그림 진짜 잘 그렸네.”
“와, 대단하다. 이렇게 그리다니, 사람이 아니네.”
종이에 셋이 모여 연신 감탄을 했다.
“이거 네가 그런 건 아닐 테고, 누가 그린거야?”
“우리 학교 애야? 설마 신입생?”
“이런 실력자라면 반드시 우리가 영입해야지.”
영입이라는 말에 박태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입 같은 소리하고 있네. 우리가 뭐 줄 거라도 있냐?”
“일본에서 들어온 비디오테이프가 많이 있잖아. 그거 빌려주면 돼지.”
“맞아. 이런 거 다 사려고해도 돈 많이 들어. 거기다가 소년점프랑 소년매거진, 그리고 소년 히어로도 빌려줄 수 있고.”
한심한 소리를 하는 친구들을 보던 박태구는 곧장 그들이 들고 있던 종이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종이를 테이블에 놓고는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딴 건 됐고. 아무튼, 자세히 좀 봐봐, 이 해태 눈들아.”
“지금 보고 있는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미친놈이 우리는 눈깔이 없는 줄 아나.”
“그런 헛소리를 계속 하니까, 자세히 좀 보라는 거다.”
그런 박태구의 말에 세 명이 인상을 팍 쓰더니 다시 그림을 살폈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이 묘한 표정으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 이거.”
“뭔가 알겠어?”
박태구의 말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상당히 비슷한데?”
그 말에 곁에 있던 두 명이 헛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기관총 자쿠의 그림이랑 닮았지.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맞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그림이 비슷하다고. 그냥 흉내를 낸 게 아니라 본인 그림을 그린 것처럼 자연스럽다는 거야.”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원작자 본인 같은 그림이라니.”
“그러게. 그냥 세밀하게 베낀 것 같구만.”
그러자 이번엔 박태구가 입을 열었다.
“아니, 본인 그림과 상당히 닮았다는 것이랑,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건 맞아. 본인이 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 나가는 거 아니냐? 이거 일본만화야, 일본만화. 그 만화가가 뭐 때문에 우리 학교에서 그림을 그려.”
“태구 넌, 일본만화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아는 녀석이 왜 헛소리를 해?”
그러자 박태구가 그런 친구들을 슥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일본에서는 머신건 잭이라는 제목의 만화야.”
“그건 전에도 들어서 알아.”
“그래.”
친구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박태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지······, 이 머신건 잭을 그린 만화가는 한국인이거든.”
그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정말?”
“진짜야?”
“우와, 한국인이 일본에서 만화가로 성공한 거냐? 엄청난데?”
“그것도 그거지만, 이 만화를 그린 만화가는 여대생이야.”
박태구의 말에 세 사람이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