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뿌리다 (3)
사람들이 단체로 소리를 버럭 지르며 날 다시 쳐다봤다.
삼사라랑 머신건 잭을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만화라는 공통점이 있다고는 해도, 솔직히 같은 업종이라고는 할 수 없어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내가 김영호를 보며 물었다.
“형, 써니도 알고 있었어?”
“당연히 알고 있지. 여기 봐봐!”
그렇게 말하며 만화책을 불쑥 내밀었다.
“나도 이거 봤거든.”
그런데 이거······ 번역이 되어있는 책이다.
“이거 너무 재미있어서, 대봉이가 가져다 준 소년 히어로도 봤거든. 거기 작화 써니라고 적혀 있어서 알게 되었지.”
그런데 김영호가 내민 책을 보던 이대봉이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쳤다.
“어? 이거 해적판이잖아!”
“아.”
그제야 자신의 든 만화가 어떤 것인지를 깨달은 김영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봉이 내 눈치를 보며 더 다그쳤다.
“형, 너무하네. 지금 원작자 앞에서 해적판을 내밀다니. 도대체 뭔 생각이니?”
“······아, 이게 말이지.”
그렇게 뭔가 말하려다가 곧 머리를 푹 숙인다.
“그래······, 이건 내가 잘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피식 웃었다.
“그게 뭐 대수라고. 형은 어차피 보고 싶어서 돈을 주고 산건데. 이걸 판 놈들이 나쁜 놈들이지. 그리고 솔직히 지금은 합법적으로 일본만화책을 볼 방법도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고.”
“······.”
김영호가 정말로 미안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말했다.
“그나저나 진짜 기분 묘하다. 나도 어제 저 만화 보면서, 스토리가 미쳤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스토리작가가 따로 있었고, 거기다 한국인이었다니.”
“만화가인 써니도 한국인이야.”
이대봉의 말에 사람들이 더 놀랐다.
“그랬어?”
“진짜야?”
“그리고 윤환이의 동생. 이번에 대학교 2학년이 되지.”
이어지는 이대봉의 말에 다시 실내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떠버리 이대봉이 잘도 사실을 숨기고 있었네.
그동안 이 인간,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렇게 소리치고 싶은 유혹이 엄청났을 텐데.
여전히 놀란 표정의 김영호가 손가락을 헤어본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대봉과 날 번갈아 보며 물었다.
“대학교 2학년? 그럼 삼사라를 고등학생 때 그렸어?”
“정확히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고1······.”
“와, 진짜 엄청나다.”
“진짜 천재였구나, 써니.”
“만화를 보면서 세상에 이렇게 잘 그리는 사람이 있나 싶었는데. 나이도 그렇게 어렸다니. 세상은 정말로 넓구나.”
“그래도 그런 천재가 한국인이라니, 어째 뿌듯하기도 하네. 물론 너도.”
내가 쓰게 웃었다.
역시 선희보다는 한 끗 밀리는 기분이라서.
뭐 느낌상으론 한 끗 정도가 아닌 것 같지만, 그냥 그 정도 차이로 하자.
하여튼, 덕분에 한동안 질문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일본과는 어떤 인연으로 진출하게 되었느냐?
첫 작품 삼사라가 연재를 시작할 때 일본반응은 어땠냐?
만화영화가 나오니 기분은 어떻더냐?
지금 일본에서의 위치는 어느 정도냐. 등등.
계속되는 질문에 대답하는 나보다 오히려 이대봉이 불편해 했다.
“모두 작업 안 바빠?”
“당연히 바쁘지. 오늘 적어도 밤12시까지는 해야 될걸?”
“그런데 일은 안하고 왜 우리 윤환이만 괴롭혀?”
“괴롭히긴 누가 괴롭혀? 이제 친해진 동생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니까, 궁금해서 그런 거지.”
“적당히 하라고. 얘, 지금 눈 봐봐. 눈에 핏발 선 거 안 보여? 요즘 머신건 잭 스토리로 바쁜 몸이라고.”
별로 그런 건 아닌데.
그리고 정말로 눈에 핏발이 섰나?
매일 잠은 충분히 자고 있어서 피부가 더 좋아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무튼 이대봉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쏟아지던 질문들은 어느새 멈추었다. 그리고 정말로 바쁜 모양인지 모두 각자 책상으로 가서 작업을 한다.
그럼에도 입은 여전히 쉬지 않았다.
동화, 채화, 대부분 이런 단순한 일들이라 그런 건가.
대화는 다시 나와 선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이번엔 만화영화사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 때문에 갑자기 분위기가 우울해졌다.
“언제까지 이런 단순하청만 해야 하는지 정말······.”
누군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꺼내자 김영호도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러게. 나도 처음 사무실 차릴 땐 그래도 꿈이 있었는데 말이지.”
“그래도 영호 넌, 예전에 대단한 분들이랑 메인 작업에 참여한 경험이라도 있지, 우리들은 그런 경험도 별로 없어.”
“맞아. 영호 형 믿고 들어왔는데, 만날 이런 단순 일만 시키고.”
그 말에 김영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이 바닥에 들어올 땐 꿈 많았어. 그런데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그러다보니까 언제부턴가 이런 하청의 단순패턴에 물들어 버린 거지.”
하긴 8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가 거의 다 이런 식이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쏟아지던 극장판 만화영화 대부분이 표절로 도배된 것도 이런 이유가 한 몫하고 있었다.
TV에서는 기회가 없으니, 그나마 극장판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대부분 관련업체들이 일본 하청으로 바쁜 통에 그나마 짬짬이 만든 것이니 퀄리티 따위 기대하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표절의 이유가 될 수는 없지만.
그나마 작년부터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 주도하에 첫 TV애니메이션이 제작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물량은 아직 많지 않다.
그러다보니 한해 엄청난 양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일본의 제작환경이 부러울 수밖에.
“그런데 일본 애들 제작 노하우는 철저하게 숨기잖아. 중요한 일은 아예 맡기지도 않으니까.”
“우리나라가 세계 3대 제작국이라는 건 허울뿐이라고.”
“언제쯤이면 우리 회사에서 자체 만화영화를 제작해 볼 수 있을까?”
제작에 대한 기술은 나름 쌓아가고 있었지만, 창작이 아닌 하청에 매몰되어 프리프로덕션의 능력이 일본에 비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지금의 일본은 애니메이션 산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점이라, 한국에 보내오는 하청일이 넘치는 환경이다.
한국의 하청 회사들은 일본에서 보내오는 일감만으로도 충분히 돈을 잘 벌고 있으니, 점점 자체 제작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고 있다.
어쨌거나 한국의 만화영화 산업자체는 계속 성장 중에 있긴 하지만, 이런 분위기 때문에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아무튼 한국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다시 내게 관심을 가졌다.
“윤환이 네 작품은 이미 TV만화영화로 나온 경험이 있으니까, 그쪽 업계 사람들도 만나봤겠구나.”
“어, 뭐. 잠시 만났어.”
일본 애니메이션 관계자들과 미팅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일본 성우들의 더빙을 직관했던 일이라든가, 그곳의 사정에 대해서도 말했더니, 상당히 관심을 가진다.
어떤 사람은 내 말을 메모까지 한다.
하긴, 이 시대엔 일본에 대한 정보가 귀하긴 했으니까.
“어? 벌써 어두워졌네.”
이대봉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나도 대화를 하다 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는데.
“우리 때문에 일이 밀렸겠다.”
내 말에 김영호가 손을 휘저었다.
“괜찮아,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어차피 오늘은 늦게까지 할 각오 하고 있었거든.”
“맞아. 오히려 너희들 덕분에 재미있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
“다음엔 삼겹살에 소주라도 하면서 이야기하자.”
고개를 끄덕인 이대봉이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말했다.
“윤환아 이제 돌아가자.”
* * *
며칠 후.
지로가 머신건 잭의 TV애니메이션을 맡은 신생 제작사 ‘아니웍’을 찾아갔다.
아니웍의 대표와 지로는 간단한 인사 후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지로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원작자이신 텐겐 선생님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네.”
지로가 머리를 끄덕이자 아니웍의 대표 마키노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떤 부탁입니까?”
“현재 머신건 제작과정만이라도 견학을 했으면 좋겠다고요.”
“텐겐선생님이 직접 말입니까?”
“아뇨. 한국의 애니관련 협력업체 사람들입니다.”
“······협력업체요?”
“네.”
지로의 대답에 마키노가 묘한 표정이 되었다.
“혹시 제작과정을 배우고 싶다는 뜻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
마키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의 앞에서 지로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혹시 저희가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거부하시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로의 말에 마키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머신건 잭의 제작을 취소하신다거나 그런 건 없는 겁니까?”
“그런 건 없습니다. 저희 출판사에서도 그렇지만, 일단 텐겐 선생님도 그럴 의사는 없으십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마키노의 찌푸려진 미간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한참을 더 생각한 마키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생각할 시간을 조금 주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결정이 되시면 꼭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로가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잠시 후.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직원이 마키노를 보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걱정 있습니까?”
“그게······.”
지로가 했던 이야기를 말 하자 직원도 마키노의 표정과 비슷한 얼굴이 되었다.
“제작 노하우를 한국인에게 배우게 하려는 모양이군요.”
“그런 모양이야.”
“거절 하실 겁니까?”
“그게 좀 마음에 걸려서.”
“왜요? 별달리 문제도 없다면서요?”
“머신건 잭이야 당연히 별말 하지 않겠지. 하지만 만약 써니의 차기작이나 요즘 내고 있는 메갈로폴리스 인 캣 시리즈는 우리에게 맡기지 않겠지.”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차기작은 안 맡기겠다고 했어요?”
“아니.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그냥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긴······.”
납득한 직원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상관없지 않을까요?”
“상관없다니 뭐가?”
“견학이요. 그런 것쯤이야 뭐 괜찮잖아요. 노하우라는 게 그렇게 쉽게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내는 동안 관련일은 안 시키면 되는 거잖아요.”
그 말에 마키노도 수긍했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신생 회사라고는 해도 모여 있는 중심 멤버들은 대부분 여러 회사에서 인정받은 실력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마키노도 마찬가지였으니 노하우라는 것이 얼마나 얻기 힘든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긴 하지. 구경만으로 배울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당연하죠. 이쪽 바닥이 그리 만만한 곳도 아닌데. 한국인들 몇 명이 그 많은 노하우를 다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참에 점수 좀 따 놓으면 차기작까지 우리가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음······.”
생각해보니 그럴 듯 했다.
지금 아니웍은 신생 제작사다.
가장 필요한 것은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인기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좋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인 머신건 잭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미 텐겐의 이전 작품인 삼사라도 다른 제작사가 제작한 OVA 판 판매량도 상당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번 머신건 잭의 TV판 시청률이 잘 나오면 OVA 제작과 더불어 극장판까지 계획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만큼 현재 텐겐, 써니 작품은 많은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견학이라는 것 정도라면 받아들일 회사는 분명 많을 것이다.
생각을 끝낸 마키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고 연락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