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73화 (373/425)

씨앗을 뿌리다 (1)

게임처럼 흘러가는 이야기가 날이 갈수록 반응이 더 뜨거웠다.

솔직히 나름 고심하고 만든 이야기이긴 하지만 예상 이상의 반응에 얼떨떨한 기분이다.

물론 이야기를 잘 연출해준 선희의 그림 탓이 더 크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머신건 잭 링크는 연재를 시작하자마자 다시 소년 히어로 앙케이트 1위를 다시 탈환했고, 지금은 예전처럼 그것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단행본의 판매도 급증해서 들어오는 돈도 엄청나다.

이제까지도 많이 벌었지만, 지금은 또 그 액수가 차원이 다르다.

삼사라까지 덩달아 판매량이 늘어난 탓도 있겠지만.

일본에서 로봇해적선으로 유명한 프라모델 회사에서, 조라탱을 제작하기로 했는데 거기서도 상당한 액수가 들어오고 있다.

돈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보니 이젠 돈이 아니고 무슨 그냥 숫자처럼 보이는 것 같다.

마치 게임머니처럼.

그때 머리위로 뭔가가 툭 떨어졌다.

“······?”

뭔가 싶었더니 바삭거리는 낙엽이다.

어디서 날아온 거지?

낙엽을 머리에서 떼 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깊고 푸른색.

12월의 추운 날씨였지만, 오후 햇살이 따듯했다.

그때 아래로 보이는 화실의 마당 담벼락 위로 백설기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 녀석을 찬찬히 내려다봤다.

저 녀석은 정말 정체가 뭘까.

이제는 당연한 느낌으로 살고 있지만, 내가 이 시절의 다른 사람의 몸으로 살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고, 이것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것도 분명 비현실적인 일이다.

만화에 대한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또렷한데 비해, 여기로 오기 전의 삶에 대해선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엄마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과 얼굴 정도가 전부다.

그나마 그런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더 흐릿해지고 있다.

이젠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여기의 삶에 익숙해져버렸다.

아니, 그보다는 이곳에서의 인연 때문이겠지.

이곳의 가족과 화실의 식구, 일본에서 살고 있는 지인들.

모든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건 정말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턱을 괸 채 녀석을 내려다봤다. 그런데 담 위를 이동하던 백설기기가 멈칫했다.

내 시선을 느낀 걸까?

녀석이 위로 올려다본다.

내 눈과 마주친 녀석이 묘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오늘 아침에 엄마가 고등어 사 오셨던데. 그거 냄새 맡은 거냐?”

그 말을 이해라도 한 것처럼 녀석이 ‘냥’하고 소리치더니 곧장 담 아래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아래 부엌이 있는 뒷문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아래에서 경희의 음성이 들려왔다.

“악! 설기 너! 그건 안 돼!”

쯧, 내가 괜한 말을 한 건가?

*

어느덧 1987년의 한해도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연말이 되자 대통령 선거로 인해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17년 만에 치러지는 대통령 직선제라 선거도 치열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통사람’이라고 입버릇처럼 주장하던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일본에서 연락이 왔다.

올해 미쯔다쇼텐에서 처음으로 ‘미쯔다 대상’이라는 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와 선희가 수상자가 되었단다.

덕분에 오랜만에 일본을 가게 되었다.

외부에서 열리는 만화상은 아직 받아본 적이 없지만, 뭐 이 시대엔 상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잡지사 자체로 하는 상이 대부분이라서 받을 일도 없었지만.

물론 이름 있는 만화상이 있긴 해도 별로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차별이 아직은 많은 시대니까.

뭐, 내가 살던 시절에도 일본 내 차별은 상당히 존재했으니 별로 다를 것도 없지만.

만화계의 주요 사람들은 소년 히어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니 미쯔다쇼텐 자체가 출판계에선 따돌림을 받고 있는 건 현실이다.

당연히 한국인의 활동이 많다는 게 그 이유다.

뭐, 그런 속사정이야 어쨌건 오랜만에 일본 나들이는 재미가 있었다.

시상식이 열리는 호텔은 상당히 좋았다.

오랜만에 키도랑 니시다도 만나고, 평소 모르던 만화가들과 안면도 텄다.

“다음 이야기나 말해봐라.”

키도는 만나자마자 머신건 잭의 이야기를 스포일러 하라고 협박을 했고, 니시다는 그런 키도를 말리느라 바빴다.

선희는 모처럼 호텔 요리를 잔뜩 먹느라 바빴다.

그런 선희의 주변을 힐끔거리는 만화가는 많았지만, 키도가 눈을 부라리고 있던 덕분에 접근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물론 키도가 화장실에 갔을 때 용기 있게 접근했다가 얼음 같은 선희의 태도에 물러나기 일쑤였지만.

아무튼 그런 요란한 와중에도 선희는 음식 때문인지 행복하게만 보였다.

경희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곧 여행자유화가 이뤄지면 화실 식구들이랑 단체로 와야겠다.

시상식이 끝나고 선희와 나는 아키하바라로 갔다.

머물 시간이 짧기 때문에 미리 쇼핑을 해두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마침 일본에선 록맨과 파이널 판타지 게임이 발매가 되었다.

게임에 대해선 많이 알고 있지 않았지만, 이렇게 역사적인 게임은 안 살수가 없지.

어차피 화실 사람들도 게임을 좋아하니까.

내 입장에선 그냥 오래된 레트로 게임일 뿐이긴 하지만.

그러다가 문득 거리의 일본사람들을 바라보니, 유난히 활기찬 느낌이다.

돈이 넘치던 시대.

희망이 넘쳐서 밝은 미래만을 꿈꾸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뭐 연말이라는 분위기도 한 몫 하겠지만.

우연히 봤던 TV방송에선 대놓고 이런 말도 나왔다.

[우리 일본은 더 이상 유럽이나 미국에서 배울 것은 없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함이 느껴질 정도다.

하기야, 지금 일본은 그런 생각을 가질 정도로 돈이 돌고 있는 시절이니까.

미국이 각종 회사들이나 부동산들을 사들이기 시작하는걸 보면 내가 살던 때의 중국이랑 비슷한 느낌도 있다.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도 일본인들은 많이 등장하는 편이고.

아무튼 지금의 일본은 슬슬 부동산에 돈이 몰리는 시점이다.

90년대 초쯤에 버블붕괴가 일어났던가?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호텔로 돌아오자 선희의 절친인 고토 스미레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선희에게 수다라고 해봐야 머리를 끄덕이고 짧게 대답하는 게 전부지만, 어쨌건 오랜만에 만나서는 만화얘기로 늦게까지 떠들어댔다.

아무튼 그렇게 짧고 즐거웠던 일본나들이가 끝이 났다.

* * *

연재가 이어지는 동안 새로운 맵, 혹은 공식 맵이라는 장소에서의 전투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맵에 구멍이 생기며 나타난 존재들에 의해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들은 기존의 맵으로 강제적으로 끌고 온 존재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잭의 무리를 자신의 집단으로 끌어들였다.

목적이 잭의 무리와 다르지 않아 그들과 한동안 함께 행동하기로 한다.

덕분에 이야기의 스케일도 점점 커져갔고, 이젠 단순히 캐릭터들이 싸움이 아닌 전쟁의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일본 팬들 사이에선 머신건 잭의 세계관에 대해 연구하는 그런 모임도 생겨났다.

물론 머신건 잭 연구회도 있었지만, 링크편이 시작되면서 세계관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 새롭게 생긴 것이다.

팬들 사이에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도 주요 관심사였다.

그리고 잭의 동료들이 정확히 어떤 포지션이냐는 것도 중요한 이야기였다.

신과 동등한 위치의 플레이어인가, 아니면 그저 신들의 노리개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것도 주요 토론 주제가 될 정도였다.

“아직 신이라 불리는 플레이어들의 진짜 정체도 모르잖아. 이거 진짜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전혀 모르겠다.”

“신과의 전투라니, 스케일이 다르다.”

“세인트 세이야랑은 또 다른 맛이 있어.”

“솔직히 재미는 머신건 잭이 훨씬 더 좋아. 싸움도 화끈하고. 이야기도 독특하잖아.”

“그래도 내가 아는 여자애들은 대부분 세인트 세이야가 더 재밌데.”

“역시 취향의 문제인가?”

“요즘엔 재미있는 만화가 너무 많다니까. 사야할 만화책도 산더미같이 많아서 용돈이 모자란다고.”

“아르바이트를 해. 난 밤마다 교통정리하고 있어. 시급도 괜찮아. 뭐, 자동차 운전하는 사람들에게 욕은 좀 많이 먹지만.”

“난 공사판에서 하고 있어. 게임도 사야하거든.”

“역시 살아가려면 돈이 많이 든다니까.”

“그러게. 갑자기 우울해지네.”

그렇게 이야기는 힘든 현실로 끝이 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 * *

머신건 잭의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동안 새해가 밝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해다.

새해가 되자마자 TV에선 새해맞이 특별방송으로 바빴다.

화실은 쉬는 날이라 모처럼 한가한 기분으로 혼자 시내로 나갔다.

가끔 버스나 택시를 타고 돌면서 도시를 보는 것이 취미처럼 자리를 잡은 탓이다.

삼사라로 유명해진 아파트단지는 한동안 일본관광객이 뜸했다고 하던데, 다시 북적이는 모습이다.

머신건 잭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생긴 특수처럼 보이긴 하는데 정확한건 모르겠다.

전에 TV에서 한번 방영한 적이 있어서 잠시나마 한국에서도 관심을 받기도 했었다.

어쨌건 지금은 TV가 거의 유일한 영상매체이고, 채널도 몇 개 없다보니 관심 받는 게 어려운 세상이다.

뭐 개인적인 입장에선 이게 더 다행한 일이지만.

지금 시대에 너무 관심을 많이 받는 것도 좋지만은 않으니까.

물론 일본에서 연재되고 정식으로 수입이 되지는 않지만, 암암리에 해적판이 나돌고 있어서 괜히 학부모 단체 같은 곳의 눈에 띄면 좋을 게 없다.

학부모 단체는 일본이나 미국도 만만치 않긴 하지.

그런 것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짓다가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렇게 딴 생각에 빠져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어? 윤환이네?”

익숙한 음성이었다.

돌아봤더니 역시 이대봉이다.

“대봉이 형.”

“시내엔 무슨 일로 나왔어? 평소처럼 바람 쐬러 나온 거니?”

“어. 그런데 형은?”

“나야, 늘 바쁘잖니. 오늘은 아는 형이 일하는 곳에 가보려고.”

“오늘도 일해?”

“만화 쪽은 늘 바쁘잖아. 윤환이 네 화실처럼 쉴 거 다 쉬는 곳이 있는 줄 알아?”

하긴 그건 맞는 말이다.

만화 그리는 사람들은 쉬는 날 일일이 챙기기 힘들다.

“그럼 만화 화실?”

“그건 아니고. 만화영화사.”

“만화영화사?”

역시 이대봉은 발이 넓다.

“어. 오랜만에 놀러가 보려고. 곧 올림픽이라고 국산만화영화 제작에 바쁜 모양이더라고.”

이대봉 말대로 올림픽 특수로 자체제작 만화영화가 작년부터 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특수도 90년대 초면 급격히 줄어들긴 하지만.

“어때? 같이 갈래?”

달리 할 일도 없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까?”

내 대답에 좋아하며 손뼉을 친다.

“좋아. 그리고 네 정체는 숨기는 게 좋겠지?”

“아는 사람이 있기나 하겠어?”

내 말에 이대봉이 날 툭 치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너 은근히 한국에서 유명해. 몰랐어?”

“그야 만화 그리는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만화영화 쪽도 마찬가지야. 은근히 네가 한국 사람이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도 많아.”

내가 국뽕의 대상이 된 건가?

묘한 기분이네.

내 표정을 살피던 이대봉이 묘하게 웃는다.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근데 여기서 멀어?”

“근처야. 저기.”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낡은 건물을 가리켰다.

“자, 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 놀리러 가볼까?”

은근히 악마 같은 인간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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