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신건 잭 - 링크 (1)
테이블에 잔뜩 쌓여 있는 종이들.
거기엔 캐릭터가 하나씩 언필로 그려져 있다.
머신건 잭에서 앞으로 등장하게 될지도 모르는 캐릭터로 선희가 하나하나 그려놓은 400여 장의 그림들이다.
지금 나는 그것들을 한 장 한 장 살피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괜찮다고 판단되는 것 30개를 추리고 있는 중이다.
원래라면 선희가 생각한 그림이면 아무거나 상관없었다. 그런데 정작 선희는 내가 캐릭터 30개를 정해달라며 이틀 동안이나 매달려 그린 그림들이다.
퀄리티를 생각하면 과연 이틀 만에 이 많은 그림을 어떻게 다 그렸을지 신기할 정도의 엄청난 양이긴 한데.
나 역시 이것들 사이에서 30장을 골라내는 것도 문제다.
그만큼 이번에 쓴 스토리가 선희의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리고 내가 그렇게 캐릭터들을 선별하는 동안 선희는 캐릭터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스토리 작업을 데생중이다.
“정말로 이 많은 게 모두 머신건 잭에 새로 등장할 것들이야?”
모처럼 놀러온 박상식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모두는 아니고, 30개만.”
“30개 작냐? 그나저나 역시 전쟁 씬인가?”
“좀 비슷하긴 한데, 좀 달라.”
하지만 더 이상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스포일러를 내가 자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박상식이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살피고는 내게 다시 물었다.
“이거, 종류가 많네. 인간과 인간형 종, 그리고 괴물, 로봇······. 머신건 잭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던 무장한 괴물과 로봇까지 등장하는 걸 보니 스케일이 커질 모양이구나.”
여전히 그림을 고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어. 맞아.”
내 대답에 박상식이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혹시 무리하는 거 아니야?”
“무리?”
“그래. 대봉이 형에게 1위 빼앗겨서 계획 없이 막 만드는 게 아닌가 싶어서.”
“스토리가 중간에 변한 건 맞아. 하지만, 나름 자신하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도중에 변하면 그동안 따라오던 독자들이 혼란을 느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냐? 그리고 운이 안 좋으면 순위도 떨어질 수 있는데.”
박상식의 말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이야기가 산을 탈까봐 걱정하고 있는 거니까.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뭔가 해야 할 시점이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지금이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거니까.
솔직히 그림만 놓고 보면 머신건 잭은 어떤 작품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퀄리티, 센스, 연출은 최고라고 해도 될 정도다.
하지만, 만화는 그림만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
역시 스토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림만 잘 그린 그냥 그런 수준의 만화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니까.
결국 결론은 내가 잘 해야 된다는 거다.
물론 그동안 꽤 괜찮은 성적을 올린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미래에서 온 덕후다.
그 누구보다 앞으로 나올 만화에 대한 트렌드나 지식이 앞서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 일본 소년만화 최고를 달성하지 못한 건 내 노력이 부족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물론 만화를 좋아는 덕후로서 기존의 작품을 베껴 만들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다. 그런 만큼 응용이라는 분야를 잘 살려보려 노력하고 있지만, 어느 샌가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대봉의 신작이 1위를 차지했고, 그제야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머신건 잭의 스토리를 다시 한 번 살펴봤다.
뭐가 문제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결론은 머신건 잭을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보자는 거다.
물론, 너무 황당한 이야기로 넘어가면 곤란하다.
기존의 독자들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야기에서 혁신이 필요한 것이다.
이 시대라면 어떤 이야기가 좋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아직, 스토리를 수정중이긴 하지만, 앞부분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잡힌 상태였고, 그것은 곧바로 스토리로 써서 선희에게 넘겼다.
콘티는 이제 선희에게 완전히 맡기는 상황이라, 나는 그냥 내 느낌을 글로 적어 전달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토리를 읽은 선희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까지 이야기 중 가장 재미있어.’
선희의 말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후반 부분도 스토리를 작업 중에 있다. 물론 대략적인 결말은 적어두었지만, 그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지금 그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바로 지금 내가 살피고 있는 그림들인 것이다.
여전히 걱정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박상식에게 말했다.
“그런 거 걱정하면 새로운 이야기는 도전하지 못해.”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넌 이미 이제까지 1위를 하고 있었잖아. 물론 요 몇 주간 대봉이 형에게 잡히긴 했지만, 그래도 안정적이었는데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있을까?”
“형.”
“왜?”
“형이랑 같이 스토리 작업하고, 그걸 팔려고 전 선생님 찾아갔던 시절, 기억해?”
“당연하지. 그런데 왜?”
“그때의 두근거리는 기분이 가끔 떠올라.”
“······.”
“안정이라는 건 애초에 없는 거야. 그건 그냥 퇴보일 뿐이지.”
내 말에 박상식이 피식 웃었다.
“네 말이 맞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언제부턴가 만족하며 지냈던 것 같다. 그래서 슬럼프가 온 모양이야.”
“형처럼 나도 어쩌면 그동안 슬럼프였어. 그래서 이번엔 제대로 해보려고.”
“슬럼프? 장난 하냐? 줄곧 소년 히어로에서 1위하던 녀석이 엄살은.”
“그런가?”
“뭐 어쨌건, 내 말을 들어보니 공감이 간다. 나도 요즘 스토리가 잘 안 풀려서 양구 씨한테 너무 미안했거든. 그런데 생각해보니, 너무 안정만 추구했던 모양이다.”
그때 실버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대봉이 그놈, 요즘 얼마나 거들먹거리냐. 꼴사나워 죽겠더라. 그러니까 이참에 다시 왕좌를 가져오라고.”
왕좌?
실버의 입에서 저런 닭살스러운 멘트가 흘러나오다니.
그런데 그때였다.
“왕좌라니, 누가 쉽게 내어준다니?”
언제 왔는지 이대봉이 들어오며 실버에게 깐족거린다.
그런 이대봉을 보며 실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자리 지킬 힘도 없는 녀석이.”
“내가 왜 지킬 힘이 없어? 나 능력 있어 왜 이래?”
“능력 좋아하네. 운이 좋았던 거지.”
“운도 실력이야!”
“그럼 운이 구만!”
“야!”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른 이대봉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일그러뜨렸던 표정을 싹 지웠다. 그리고 은근한 표정으로 실버에게 말했다.
“너 요즘 매일 비리비리 하는 것 같다. 요즘 너무 힘 많이 쓰고 다니는 거 아니냐?”
“뭐?”
화실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제임스 오빠, 너무 야한 말 하지 마!”
“맞아.”
“내가 뭐. 그냥 물어본 것뿐인데. 요즘 들어 실버가 너무 예민한 것 같아서 그러는 거지.”
“미친놈이 진짜! 예민 한건 너지. 그 또라이 여자에게 아직 쫓기고 있는 거 아니야?”
“으악! 그 얘긴 하지 마! 요즘 꿈에서도 보인다고!”
그 말에 상황을 역전시킨 실버가 낄낄거렸다.
“어쩌면 네 집 근처에서 계속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만! 그런 건 상상만으로도 소름끼쳐!”
“그러고 보니 아까 어떤 일본인 여자가 찾아오지 않았어?”
“그마안!”
이대봉이 정말 충격에 빠진 모양인지 두 손바닥으로 자신의 귀를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곁에서 계속 이야기를 듣던 박상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야? 미친 여자는 또 누군데? 혹시 대봉이 형 여자 친구 생겼어?”
그 말에 실버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보통은 여자 친구에게 미친 여자라고 하지는 않지.”
“그건 그러네. 그럼 누군데?”
그때 다시 이대봉이 비명을 질렀다.
“그 얘기는 그만해! 그만!”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모두가 멀뚱거리는 시선으로 이대봉이 나간 방향을 쳐다봤다.
“어? 제임스 오빠, 진짜 충격이 컸던 모양이네.”
“그러게요. 의외네.”
“나라면 기분이 좋았을 것 같은데.”
“나도.”
어시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모두가 이대봉이 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정적에 쌓여있던 그때 선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업 끝났는데.”
선희의 말에 난 선희의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데생된 원고를 천천히 살폈다.
그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이 느낌이야.”
“캐릭터는?”
선희의 물음에 고른 30장의 그림을 내밀었다.
“이거. 여섯은 네가 알아서 골라.”
“알았어.”
“그리고 머신건 잭의 새로운 제목도 정했어.”
“뭔데?”
“머신건 잭 링크.”
“링크?”
“그래. 연결이라는 뜻이야.”
“······아.”
선희가 스토리를 떠올리고는 납득했는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 * *
끼익.
조라탱의 무한궤도가 멈췄다.
뒷좌석에 널브러져 잠들어 있던 잭이 눈을 떴다.
“여기가 소문의 그 마을이야?”
그 말에 운전을 하던 조크가 모자를 슬쩍 들어 올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야.”
“와아, 정말 성벽위엔 아무도 없네.”
문이 활짝 열려있는 성벽을 올려다본 몽이 말하자 곁에 있던 파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성이 비어있는 모양이야.”
파스는 여전사로 활을 주로 사용하는 궁사다.
그녀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낮에 떠있는 붉은 색의 달.
소멸의 징조였다.
저 붉은 달이 뜨고 나면 반드시 마을은 소멸한다는 얘기가 얼마 전부터 대륙 전체에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실제로 파스의 마을도 소멸을 당했다.
그녀가 외부로 나가있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고, 외부에서는 달이 붉게 보이는 일이 없어서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소멸을 당하는 마을에서만 달이 붉게 보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얼마 전 붉은 달이 뜬 마을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들이 달려온 것이다.
조라탱에서 뛰어내린 파스가 열린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잭이 따라 뛰어내렸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빨리 떨어져.”
“안 그래도 그럴 거야. 궁금하긴 하지만 싸움이 전문이 아니라서.”
조크가 웃으며 말하자 그런 그를 노려보던 몽이 잭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괜찮겠어.”
“괜찮아. 혹시라도 내가 살아나면 네가 날 고쳐줘. 알겠지?”
“난 기계 전문이지, 의사가 아니라고.”
“그냥 다 기계로 만들어 주던가.”
“무슨 소리야?”
“아무튼 멀찌감치 떨어지도록 해. 위험하니까.”
그 말에 조크가 곧바로 조라탱을 돌렸다.
“그럼 꼭 살아서 봐.”
“잭 조심해.”
“그래. 알았다.”
그렇게 두 사람을 보낸 잭이 파스를 따라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 피난을 간 모양이다.
길거리엔 사람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이 즐비하다.
얼마나 급했던지 이것저것 깨진 도자기 조각이나, 각종 집안 가구들도 부서진 채 흩어져 있다.
그런 사이에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병자들과 노인, 그리고 아이들도 몇 보인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먹을 것만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고, 노인들과 병자들은 삶은 체념한 얼굴들이다.
그렇게 마을을 돌아다니던 그들은 결국 저녁이 되자 성벽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한밤중이 되자 두 사람은 모닥불을 피우며 성벽 위에서 잠을 잔다.
그때 뭔가를 느낀 잭과 파나가 눈을 떴다.
파직, 파지직!
그 순간 갑자기 마을 위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