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오르라 제임스 (2)
이틀 후.
“이거 한 번 봐 줄래?”
이대봉이 시뻘건 눈을 한 채로 내게 콘티를 내밀었다.
흠칫 놀란 내가 물었다.
“저기, 형. 잠은 좀 잔거야?”
이대봉이 풀린 눈으로 실실 웃더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한숨도 안 잤어?”
“콘티 때문에?”
“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다,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럼 어제부터 밤 샌 거야?”
“엊그제부터.”
“뭐?”
이틀 동안 안 잤다고?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봤더니 이대봉이 충혈 된 눈으로 날 빤히 쳐다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어서 읽어 줘.”
“그 꼴을 하고서 그런 말이 나오냐?”
“어서.”
어이가 없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어.”
약이라도 빤 것 같은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면서 잘도 저런 소리를 하는구만.
그렇게 황당해하며 이대봉을 쳐다봤다가 곧 콘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전에 실버에게 들었던 말도 있고 해서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의 이대봉을 보면 그런 느낌보다는 저 상태로 콘티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나였다면, 푹 쉬는 것이 우선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일단 첫 장면부터 멈칫하게 만들었다.
이대봉의 콘티는 일반적인 콘티보다 더 휑한 느낌이 특징이었다.
아무래도 그림에 대한 재능은 없어서 그런지 말풍선 대화와 간단한 내용묘사가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이번 콘티는 달랐다.
네모 칸 안에 글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마치 낙서장을 방불케 하는 지렁이 같은 글자들의 향연.
보자마자 눈살이 찌푸려진다.
평소 이대봉의 성격상 이렇게 지저분한 콘티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역시 멀쩡한 상태로 만든 콘티는 아니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낙서 같은 글을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그런데 글자에 비해 내용은 꽤나 정상이다.
아니 평소보다 더 생생한 느낌이다.
풍경에 대한 묘사가 엄청 디테일하다.
어찌 보면 필요이상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게 또 나쁘지가 않다.
거기다가 인물의 묘사도 전처럼 졸라맨 같은 그림으로 대충 하는 게 아니었다.
인물의 사소한 동작까지 다 적혀있다.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 때문에 캐릭터가 진짜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다.
덕분에 그림이 한 장면도 없지만, 마치 눈앞에 선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역시 글자가 문제였다.
이렇게 날림 글이라면 읽는 것도 상당히 스트레스니까.
슬쩍 머리를 들었더니 이대봉이 계속 벌건 눈으로 날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내 사소한 행동까지 모두 살피고 있는 저 눈 때문에 부담스러워 다시 콘티에 집중했다.
쯧.
이대봉이 눈치 채지 못하게 슬쩍 혀를 차며 천천히 읽어나갔다.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는 지렁이 같은 글을 하나하나 따박따박 읽어나가며 장면을 떠올렸다.
흥미로울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재미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일단 그림이 아니라보니 눈도 상당히 피곤한 느낌이다.
보통 때의 콘티였다면 배경묘사는 대충 건너뛰는데 모조리 글자로 되어있으니.
날 괴롭히려고 이러지는 않았을 테고.
조금만 참고 가보자는 생각에 페이지를 넘겨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슬슬 이야기가 흐름을 타기 시작하자, 몰입감이 엄청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특히 이제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3인칭의 진행이었지만 흥미로운 과거에 대한 이야기에 빠져들어 간 것이다.
특히 지나가듯 대화했던 전쟁의 이야기가 상당히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고, 그 전쟁에 대한 이유도 나름 잘 풀어놔서 꽤 놀랐다.
얽히고설킨 나라와 나라,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표현한 것도 놀라웠다. 그러나 가장 놀랐던 건 따로 있었다.
이제까지 연재했던 부분이 마치 이번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한 프롤로그였다는 듯 표현하는 것이 일품이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계획된 이야기처럼 보인다는 거였다.
드래곤 수프는 보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요리이야기가 아니다.
중원요리왕과는 전혀 다르다.
그렇게 보는 이에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상당히 강렬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의 등장.
이름은 훌리안.
오랜 기간 동안 여행을 한 탓인지 옷은 누더기에 가까웠지만, 그가 풍기는 느낌은 이야기의 중심에 두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이제까지 등장한 인물들처럼 가볍지 않은 인물이라 눈이 가기도 했지만, 미스터리한 그의 정체가 더 궁금했다.
그렇게 여행을 해나가던 그가 전쟁터를 목격하게 된다.
그냥 지나치려했지만, 일반인들이 병사들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끼어들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병사들로부터 구해준 남자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핀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이 작품의 주인공인 마리오와 마주치게 된다.
마리오도 우연히 전쟁에 휩쓸려 사람들에게 요리를 해주고 있었는데, 그의 음식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다는 것에 호기심을 가진다.
그러다가, 마리오의 요린가 자신이 찾고 있는 물건의 실마리라고 느끼고는 접근한다.
훌리안이 찾고 있는 것은 책이다.
책을 찾고 있는 이유는 저주를 풀기 위함이다.
자신이 떠나온 고향에서 벌어지고 있는 최악의 저주.
그것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심각한 수준인 모양.
아무튼 그가 주술사에게 들었던 힌트와 비슷하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마리오는 현대의 인간이다.
관계가 있을 것 같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찾는 책이 사실은 현대의 것이 아닐까하는 예상이 들게도 한다.
그리고 초반에 나온 것을 기반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은 요리책일 것이고, 우연히 현실에서 넘어간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예상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마리오의 요리는 전쟁의 양상까지 조금씩 바꿔가고 있었다.
요리가 주는 묘한 힘으로 인해 밀리던 싸움이 조금씩 뒤집히고, 전투에서도 승리의 소식이 들린다.
병들었던 사람들도 회복해가고, 전염병까지 사라지고 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의 존경까지 받는다.
그 모습을 보며 더 확신을 가지는 훌리안.
전쟁은 결국 휴전상황으로 결말지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마리오는 그곳을 떠나려한다.
그런 마리오를 훌리안이 따라나선다.
어수룩해 보이는 마리오와 훌리안의 케미도 상당히 좋아서 그냥 대화만 보고 있어도 재미가 있을 정도.
그렇게 조금씩 읽다보니, 어느새 콘티가 끝이나 있었다.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아쉬움의 한숨을 튀어나왔다.
두 사람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갈지 궁금해서 뒷이야기를 빨리 보고 싶었다.
그런데 콘티를 다시 살펴보니, 이게 또 내 생각보다 내용이 많다.
몰입을 했더니, 내용이 짧게 느껴졌을 뿐 내용 자체는 꽤 긴 편이었다.
“어때?”
벌건 이대봉의 눈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엄청 재미있어. 시간이 가는지도 모를 정도야.”
“진짜?”
“어.”
그 말에 이대봉이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더불어 화실 식구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몰려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정신없이 콘티를 보고 있는 게 흥미로웠던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슬쩍 바라봤다가 곧 이대봉을 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이야기를 잘 풀었네. 아이디어들을 잘 섞어서 자연스러워.”
“메모들을 백번이상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렸거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콘티를 작업해 나갔는데, 덕분에 이렇게 지저분하게 변해있더라.”
그래서 콘티가 낙서장 비슷한 느낌이었군.
“글자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지?”
“이것도 나쁘지 않아. 좀 거칠다는 느낌은 있어도 몰입감이 좋으니까.”
“그래?”
“어. 다만, 진행과 관련 없는 역사이야기는 좀 줄이는 편이 좋겠어. 그리고 초반에 너무 많이 설명하지 말고 후반에 설명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은 것도 많아. 특히 전에 대화했던 전설의 요리책이 현대에서 넘어갔다는 것을 예상하게 만드는 것도 나중에 등장하는 게 좋을 것 같고.”
“어? 눈치 챘어?”
“어떻게 눈치를 안 챌 수 있겠어. 이렇게 뻔히 보이는데.”
내 말에 이대봉이 어색하게 웃는다.
“아무튼 과거에도 현대인이 왔었다는 설정은 좋은 아이디어야. 이걸 또 잘 살리면 이야기도 재밌겠고.”
“······그럴까?”
“그래. 그리고 이 장면은······.”
“······.”
머리를 들어 이대봉을 봤더니 머리를 푹 숙이고 있다.
“······?”
머리를 살짝 아래로 해서 이대봉을 살폈더니, 자고 있는 모양이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도 흘러나온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곧장 이대봉을 소파 옆으로 눕혔다.
성준희가 옆방에서 얇은 이불을 가지고 오자 그것을 받아서는 이대봉을 덮어줬다.
입을 쩍 벌리고 자는 폼이 우습다.
곧 이대봉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다시 콘티를 살펴봤다.
그림으로 나와 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이 정도면 순위가 상당히 상승할거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내가 긴장해야 할지도 모르고.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실버의 말이 고개를 돌렸다.
“어?”
“콘티 말이야.”
그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재미있어, 예상보다도 더.”
“그렇지?”
기대를 많이 했음에도 그것보다 더 재미가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벌써부터 독자들의 반응이 기대된다.
* * *
드래곤 수프의 작화를 맡고 있는 무카이 하지메의 화실.
“모두 안녕.”
담당인 야지마가 인사를 하며 들어오자, 어시들이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한창 데생 중이던 무카이가 머리를 들고는 그를 쳐다봤다.
“왔어요?”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시 데생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야지마가 피식 웃었다.
무카이가 왜 저러는지 잘 알고 있어서다.
“반갑다는 티라도 좀 내주면 안 되냐? 만날 썰렁하게.”
야지마가 실실 웃으며 말했지만, 작업 중이던 무카이는 콧방기만 뀌었다.
“뭐가 즐겁다고 그래?”
“야, 그대로 담당이잖아. 너 중원요리왕 땐 꽤 반기더니.”
“그랬나?”
“그랬어. 기억 안나?”
“글쎄, 기억 안나거든요.”
“진짜 너무하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야지마가 계속 웃었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무카이가 머리를 다시 들어 올리며 인상을 썼다.
“아, 진짜. 뭐가 그렇게 좋은데요? 복권이라도 당첨된 겁니까?”
“그런 일이 있었으면 당장 이 짓도 때려치웠지.”
“그럼 왜 그래요?”
“일단 이거 좀 볼래?”
그렇게 말한 야지마가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무카이가 야지마의 손에서 노트가 튀어나오자 다시 시큰둥한 표정이 되었다.
“새로운 네임입니까? 일단 거기 놔두세요. 나중에 읽어볼게요.”
“지금 읽어봐.”
“모레까지 완성해야 되는 원고예요. 나중에 볼게요.”
“모레까지면 아직 여유가 있네.”
“여유가 없다니까 그러네.”
“에이 그러지 말고.”
야지마가 작업 중이던 무카이의 작업을 억지로 멈추게 하고는 그의 손에 억지로 노트를 쥐어줬다.
“자, 어서.”
“아, 진짜. 담당 편집자가 왜 작업을 방해해? 이래도 되는 거야?”
“응. 되니까. 어서 읽어보라고.”
“······.”
무카이가 잠시 야지마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가 마뜩찮다는 표정으로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는 천천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이전에 비해 네임은 깔끔하고 꼼꼼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특별할 것은 없다.
중원요리왕이 꽤 괜찮은 성적을 내었고 덕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차기작은 기대에 전혀 못 미치고 있었으니까.
물론 스토리 작가인 제임스에게 불만은 없었다.
그저, 몰락해가고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힘이 나지 않을 뿐이었다.
아무튼 야지마의 억지에 불만 섞인 얼굴로 천천히 읽어나갔다.
어시들도 그런 무카이의 얼굴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무카이의 표정이 점점 변해갔다.
그런 무카이를 야지마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까 와는 전혀 다른 표정의 무카이가 머리를 번쩍 들고는 물었다.
“이거, 정말 재미있는데?”
“그렇지?”
야지마가 팔짱을 끼며 웃었다.
“이제, 앙케이트 순위에 변화가 생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