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소년 빅뱅 (5)
“어? 재벌집 아가씨?”
뒤따라 들어오던 이대봉이 이즈미를 보고는 놀라며 말했다.
이즈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죠?”
한국어라 못 알아들었던 모양이다.
“인사에요. 인사.”
이대봉이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붙였지만, 이즈미는 그런 이대봉의 시선을 외면하며 날 쳐다봤다.
“거기서 뭐해요? 어서 소파에 앉아요.”
자신의 맞은편 쪽 소파를 가리키며 말한다.
말을 씹히자 이대봉이 작게 투덜거렸다.
“얼굴은 예쁘게 생겨가지고, 성격은 진짜······.”
하지만 이번엔 전혀 듣지 못했는지 이즈미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그나저나 저 여자, 여기가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너무 자연스럽게 저런 말을 하니까, 나도 모르게 소파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렇게 소파에 앉으려는데, 편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뒤쪽에 노인이 서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런 노인에게 말했다.
“같이 앉으세요.”
노인이 곧은 자세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저희가 불편해서 그래요.”
“불편해 하지 마십시오.”
여기에서 제일 연장자인 노인이 저렇게 뻣뻣하게 서 있는데 불편하지 않을 리가.
그때 경희가 이즈미 앞에 차를 내려놓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앉으라고 권해도 저러셔.”
그 말을 들은 이즈미가 경희를 보더니 말했다.
“지금 저 욕하고 있는 건 아니죠?”
자신 앞에서 또 한국말이 튀어나오니 이대봉이 한국말을 하던 순간처럼 다시 인상을 쓴다.
뭐, 이즈미의 평소 예민한 성격을 생각하면 수긍할 만한 반응이긴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말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아니, 누구라도 비슷한 반응이려나?
아무튼 그런 이즈미의 말에 경희가 깜짝 놀라며 손을 좌우로 휘적거렸다.
“아니에요, 어르신이 계속 서 있으셔서 저희가 곤란해 한다고 말한 거예요.”
그제야 표정이 누그러진 이즈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구로다. 그냥 적당한 자리에 앉아요.”
“괜찮습니다. 아가씨.”
“내가 불편해서 그래요. 이 사람들 구로다가 계속 서 있으니까, 계속 신경 쓰인다잖아요. 어서요.”
“아, 그렇군요. 이거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다니 죄송하군요. 그럼 적당히 앉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노인이 소파가 아니 주변에 자리를 잡고는 바닥에 앉는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앉아버린다.
나 이런.
이럼 상황이 더 어색하잖아.
“아, 아니에요. 이렇게 앉으시면 저희가 더 불편해요.”
경희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부축한다.
“이렇게 앉는 게 더 편합니다.”
“절대로 안 편하거든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불편하고요.”
경희의 재촉 때문에 노인은 어정쩡한 자세로 다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던 이즈미가 쯧 하며 혀를 차더니, 소파를 툭툭 치며 말했다.
“쿠로다. 그냥 소파에 앉아요.”
“아닙니다, 아가씨. 어찌 감히······.”
“그냥 말대로 해줘요. 내 입장도 있는데.”
“아, 네. 알겠습니다.”
그제야 노인이 다소곳한 자세로 소파 한쪽에 앉았다.
과하다 싶을 정도라 옆에서 보는 내가 불편할 정도다.
하지만, 뭐.
이즈미야 평생을 저렇게 봐 왔다면 익숙한 모습일 수도 있으니.
“차 드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경희가 내민 차를 노인이 받으며 말했다.
난 그런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즈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어쩐 일입니까? 얼마 전에 통화까지 했으면서.”
“어머, 말투는 언제나 냉정하시네요.”
“그냥 보통 때처럼 물었을 뿐인데.”
“사람이 좀 반가워하는 척이라도 해요.”
반갑냐고?
농담도 참 잘하셔.
코웃음을 치면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 같아서 참았다.
그런 내 표정을 유심히 보던 이즈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혹시 궁금해 하는 것 같아서 직접 찾아왔어요.”
“궁금해 하다니 뭘요?”
“한국에 잡지를 만든 거요.”
“아······.”
딴 얘기를 계속 하다 보니 잊고 있었다.
“아, 라니. 정말.”
혼자 중얼거리며 날 쳐다본다.
내 반응이 마음이 들지 않는 모양이네.
어차피 묻고 싶었던 내용이라 질문을 던졌다.
“굳이 한국에 잡지를 만든 이유가 뭐죠? 크게 돈이 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러게요. 내가 왜 그랬을까요? 돈도 안 되는데.”
“네?”
“나도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잘 모르겠어요.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라서.”
“이유 없이 즉흥적이었다는 거군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뭐라는 거야?
이 여자 술이라도 마셨나?
왜 말이 왔다갔다 하는 건지.
“······.”
“왜 그렇게 쳐다봐요?”
“내가 뭘요?”
짜증이 폭발할 것 같지만 지금 초인적인 의지로 참고 있다.
그러니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어요. 지금.”
“그런가요?”
시침을 뚝 땠더니, 표정에 짜증이 묻어난다.
“나 참, 찾아온 손님을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게 어디 있어요.”
“말장난하려면 그냥, 차드시고 돌아가세요. 나도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서 일어나려하자 이즈미가 화들짝 놀라더니 버럭 소리쳤다.
“좀, 앉아 봐요. 손님한테 실례잖아요.”
그런데 그때 가만히 있던 실버가 불쑥 끼어들었다.
“실례라고 말할 처지가 되나? 이제까지 줄곧 예의 없이 굴던 여자가.”
그 말에 이즈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리고는 실버를 쏘아봤다.
“당신은 끼어들지 말아요.”
“남의 화실에서 큰소리치는 주제에, 어이가 없군.”
“킹콩 같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 누가 무서워 할 것 같아요?”
“키, 킹콩!?”
실버가 어이가 없어하자 이번엔 이대봉이 낄낄거렸다.
“다음부터는 실버 킹콩, 아니 실버콩이라고 부를까? 어쩐지 어울리네.”
“뭐야!”
“손님 앞에서 그러면 진짜 킹콩 된다, 너.”
그 모습을 이즈미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만화가 그려진다니 미스터리네요.”
그쪽 정신세계가 더 미스터리구만.
“아,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겠죠?”
그렇게 말하더니 노인을 힐긋 쳐다봤다.
“구로다. 그 전략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뭐랬죠?”
“아. 미래 일한전략연구팀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뭐여? 그런 요란한 이름의 팀까지 꾸린 거야?
“얘기 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노인이 이즈미에게 다가가서는 그녀의 귀에서 뭔가를 소곤거렸다.
이거야 원.
애초에 본인 생각도 아니었으면서 그렇게 거들먹거린 거야?
아무튼 노인에게 말을 전해들은 이즈미가 머리를 몇 번 끄덕이더니 곧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선점이에요.”
“선······ 점이요?”
“네.”
고작 그걸 몰라서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냐!
아우! 그냥 머리를 한 대 줘 박고 싶네.
이 와중에도 코를 잔뜩 세우며 날 쳐다보고 있다.
진짜 때려버릴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티 안 나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스튜디오D 애들도 그래서 접촉한 겁니까? 한국잡지에 연재를 하게 하려고요?”
“스튜디오D? 그게 누군데요?”
그녀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묻자, 이번에도 노인이 그녀에게 소곤거린다.
그제야 이즈미가 머리를 끄덕였다.
“아, 거기요? 그쪽 사람들은 일본 쪽이에요.”
“일본 쪽이요?”
“맞아요. 그 사람들은 예외거든요. 당신이랑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이고, 듣기로도 굳이 한국에선 활동하지 않겠다고 하던 모양이던데.”
그거야 그렇겠지.
애초에 일본에서의 활동을 목표로 모였으니.
그보다 나랑 연관되어서라고?
“나랑 관계있는 걸 왜 신경 쓰세요?”
그 말에 흠칫하더니, 내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나?”
“방금 그랬잖아요. 나랑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기, 기억이 안나네. 잘 못 들었겠죠.”
“나도 들었는데.”
이대봉이 끼어들자 이즈미가 노려봤다.
“그쪽은 좀 빠지세요. 얼굴만 뺀질거리면 단줄 알아요?”
“뺀······.”
이대봉이 힘없이 머리를 푹 숙였다.
“나 충격 받았어.”
“욕하지 마세요.”
“욕 아니거든요.”
“아니면 아니지 왜 화를 내는 거야?”
“······.”
그런 이대봉을 보던 실버가 이번엔 낄낄거리며 웃었다.
“여긴 정말 시끄럽네요. 다른 곳에서 따로 이야기 할 수 없어요.”
“그냥 여기서 하세요.”
내 말이 인상을 쓰던 이즈미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물론 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한국 쪽 잡지엔 한국만화가들만 모을 생각이에요.”
이 여자 아까 하던 이야기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해버리네.
뭐,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니까, 상관없긴 하지만.
“포스터엔 나카야 씨 그림이던데.”
“물론 난 동시연재예요.”
“동시?”
“맞아요. 동시. 일본과 한국에 같은 만화를 연재하게 될 거예요.”
“그게 가능합니까? 아직은 법적으로 문제가 있을 텐데.”
일본 만화를 한국에 연재하는 건 일단 불가능일 텐데.
“그건 뭐,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보나마나 한국식 이름으로 연재를 하겠지.
대역 만화가를 쓸지도 모르고.
하지만 별로 관심은 없다.
어차피 스튜디오D 애들이 거기에 연재하는 게 아니라면.
“궁금하면 따로 알려드릴 수도 있고요.”
“별로 신경 쓰는 건 아닌데.”
“······아무튼 말도 참 밉게 하네요.”
그렇게 말하더니 경희가 가져다준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식었네요. 그래도······ 맛있네.”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거, 키도 선생님 화실에서 맛본 차랑 비슷하네요?”
그 말에 경희가 웃었다.
“네, 맞아요. 거기 언니에게 배운 거예요.”
“거기 사모님에게요?”
“네.”
“아하, 그래서 비슷했구나.”
머리를 끄덕이더니 경희를 보며 다시 말했다.
“따뜻한 걸로 다시 한잔 더 줄 수 있어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말한 경희가 이즈미 앞에 있는 찻잔을 치운다.
그 와중에 다시 이즈미가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손해를 보면서 굳이 잡지를 창간한 이유는 솔직히 재미있을 것 같아서예요.”
“재미요?”
“지금의 한국과 일본의 만화수준 차이는 엄청나거든요. 그건 인정하죠?”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잘난 채하는 모습이 아니꼽긴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런데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번엔 이즈미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뭐랄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의 그런 기분으로 창간한 거예요.”
“신대륙요?”
“한국 만화잡지 몇 개보니까, 사정이 좀 심각하더라고요. 이런 식으로는 일본 절대 못 이기거든.”
“일본을 이겨요? 그걸 나카야 씨가 왜 걱정하는 겁니까?”
“그야 우리 할머니가······, 아니 그 얘기는 됐고.”
“······?”
할머니?
설마 할머니가 한국 사람인가?
하지만 표정을 봐서는 더 이상 그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아무튼, 요즘엔 만화 그리는 것보다는 이게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해서.”
“만화를 포기한 겁니까?”
“포기는 안 했어요. 지금은 다른 것이 더 하고 싶을 뿐.”
그렇게 말하더니 날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잡지 창간은 아직 완벽하게 결정 난 건 아니에요.”
“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렇게 열심히 광고 했으면서.”
“뭐,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그럴 수도 있죠.”
“무슨 사정이요?”
내 질문에 이즈미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그쪽이 연재를 해주는 거요. 한국판 소년 빅뱅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