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57화 (357/425)
  • 주간소년 빅뱅 (4)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방금 이즈미와 통화에서 들었던 바로 그 회사다.

    -네. 조만간 새롭게 창간을 한다는 모양이더라고요. 혹시 아시는 잡지사예요?

    “뭐, 대충은.”

    -사기꾼회사는 아닌 거 맞죠?

    “자세히는 몰라도 사기꾼들은 아닐 거다.

    이즈미가 성질은 좀 더러워도 재벌가의 딸이다.

    거기다 자존심이 그렇게 강한데, 그딴 출판사를 만들었을 리 없다.

    오히려 돈만 많이 먹는 비효율의 출판사라면 모를까.

    물론 그런 거야 만화가들에겐 더 좋은 일일 테고.

    아니지, 비효율적인 회사라면 오래 유지될지 어떨지 확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성격이 제멋대로라 ‘나 그만 그리고 싶어! 폐간해!’ 이래버리면 끝장이 나버릴 거고.

    뭔가 화려하지만 실은 모래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정말 예상이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다행이네요.

    그냥 모르는 곳이라고 말할걸 그랬나?

    씁쓸한 마음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거기서 뭐라고 하던데?”

    -원고를 한번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오리지널 스토리로 단편. 그래서 지금 저희 쪽은 흥분해서 난리예요.

    “······.”

    음, 그래도 역시 재벌집회사의 노하우는 있겠지.

    좋게 생각하는 게 좋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삼사라월드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연락했다고 하더라고요. 원고는 일단 20페이지 완성해서 보내기로 했어요.

    “잘됐네. 그나저나 사람도 부족할 텐데 괜찮냐?”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제임스 형이 소개로 여자 한명이 들어왔는데, 배경을 엄청 잘 그려요. 철수 형과는 다른 스타일인데, 나름 우리 그림이랑 잘 어울리고.

    이대봉이 이미 손을 써놨구나.

    슬쩍 이대봉을 돌아봤더니 여전히 실버랑 말싸움 중이다.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번 연재를 시작하려면 바쁠 텐데.”

    한명이 추가된 것만으로는 새로운 원고까지 감당하기는 힘들 거다.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죠. 모두 죽더라고 끝낸다는 분위긴데.

    의욕은 넘치는구나.

    하지만, 매사가 의욕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특히나 애들의 가장 큰 문제가 작업 속도다.

    일본만화와 자주 접하는 탓에 자연스럽게 퀄리티는 올라갔지만, 문제는 속도였다.

    나준호의 누나인 나소정이 데생을 맡고 있는데, 데생의 속도가 느린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정미의 인물펜선도 그렇고.

    나준호는 그래도 제법 재능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초짜상태에 머물러 있어서 실전 원고에서 속도를 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지금까지는 그냥 천천히 지켜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개입을 해야 할 것 같다.

    “오늘부터 화실 매일 찾아와서 공부해라. 속도문제부터라도 먼저 해결해야지.”

    내 말에 나준호의 음성이 확 밝아졌다.

    -그래도 돼요?

    “되니까, 형, 누나들에게 알려줘. 부담 갖지 말고 오라고.”

    -네. 감사합니다.

    나준호랑 통화를 끝내자 이대봉이 날 쳐다보고 물었다.

    “걔들 일본출판사에서 연락 받았대?”

    실버 쪽을 봤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작업 중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는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소년 빅뱅.”

    이대봉이 눈알을 굴리다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빅뱅? 거기가 어딘데?”

    “어디긴 재벌 아가씨가 만든 출판사지.”

    “어? 정말?”

    이대봉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놀란 눈치다.

    그 때문에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눈알을 데굴거리던 이대봉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걔들, 아직 신인 티도 못 벗어났고, 특별히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일부러 귀찮게 한국까지 전화해서 원고를 달라고 하는 건 이해하기 힘드네.”

    “그림 실력은 좋잖아. 알아본 거겠지. 그리고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애들 들으면 섭섭하게.”

    실버가 혀를 차며 말하자 이대봉이 인상을 썼다.

    “내가 뭐 나쁜 뜻으로 말하는 거니?”

    “너는 음흉한 놈이니까 또 모르지.”

    “야, 내가 미쳤니? 내가 걔들에게 왜 그러겠어!”

    “누가 알겠냐? 검은 네 속마음을.”

    “뭐야!”

    이대봉이 버럭 소리쳤다.

    실은 나도 그 점이 묘하게 걸렸다.

    물론 당사자들에게는 말하기 그랬지만, 걔들을 선택한건 출판사가 아니라 아무래도 이즈미 같으니까.

    물론 실버의 말대로 스튜디오D 애들의 그림 실력은 꽤 좋은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의 기준에서 보면 높은 수준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나름 괜찮다고는 할지 몰라도 사실 그 이상은 아니다.

    스토리도 삼사라월드에서 보여주는 평균정도이고.

    앙케이트에서도 순위는 하위권이다.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잡지에서 그것도 순위가 낮은 작품.

    굳이 일본에서 한국까지 전화해 컨텍을 한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남은 예상은 하나다.

    바로 이즈미가 개입했다는 것.

    물론 이즈미 성격에 그만한 수준의 애들에게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긴 힘들고.

    결국 나나 선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싶은 것이다.

    한참 실버와 싸우던 이대봉이 다시 날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 선희 때문이지?”

    그 말에 작업 중이던 선희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자기 얘기에 관심을 가진 모양이다.

    “선희를 끌어들이려고 걔들을 이용하는 거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와, 그 여자 진짜, 나쁘다. 애들을 미끼로 사용하는 거야!”

    갑자기 이대봉이 흥분하며 손부채질을 한다.

    그 모습을 보던 실버가 혀를 찼다.

    “한심하긴, 너 사회생활 제대로 하는 거 맞냐?”

    “나 잘하거든.”

    “그런데 그렇게 멍청한 말을 해?”

    “내가 뭐?”

    “그 여자가 미끼를 하려고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쨌건 애들에겐 기회가 생긴 거잖아. 그럼 그 기회를 살릴 생각을 해야지.”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어떻게든 기회가 오면 살려야지.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정식만화연재는 좋은 경험이 될 거 아니냐. 당연히 해야지. 그걸 기분 때문에, 확실하지 않은 추측 때문에 날릴 거냐?”

    실버의 말이 맞다.

    미끼건 뭐건 애들에게는 좋은 기회니까.

    그리고 만약 내 걱정대로 잡지사가 망하더라도, 경험은 사라지지 않는 거니까.

    제대로 된 연재를 해본다는 건 그래서 중요한 거다.

    빡빡한 일정의 연재를 해보다보면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며칠 후.

    아침 출근시간에 박소미가 화실에 들어오며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서점을 지나다가 봤는데, 조만간 만화잡지가 나온대요. 그것도 주간지.”

    “주간지요?”

    무슨 소리지?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주간지는 아이큐 점보이다. 하지만, 그건 1988년 말에나 나올 잡진데.

    아직 나오려면 1년도 더 후의 일이라는 거다.

    혹시나 해서 물었다.

    “잡지 이름이 아이큐 점보예요?”

    “아이큐 점보요?”

    “네.”

    박소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럼 뭔데요?”

    “소년 빅뱅요.”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네? 진짜 소년 빅뱅이에요?”

    “네. 설마하고 봤는데, 소년 빅뱅이었어요. 며칠 전에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던 그분이 만든 잡지도 같은 이름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요.”

    “와,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

    정말 우연일까?

    원래의 역사엔 등장하지도 않던 잡지가 갑자기 등장했다.

    거기다 이즈미가 만든 잡지와 이름도 같다.

    박소미에게 물었다.

    “어디에요? 그 서점?”

    “아,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서점요. 팔억서점이요.”

    박소미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화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서점이 있는 곳까지 서둘러 걸어갔다.

    그리고 박소미가 말했던 서점 앞에 도착했다.

    서점 밖에 붙어있는 커다란 포스터가 눈에 확 들어왔다.

    ‘주간소년 빅뱅’이라고 적혀있고, 창간호가 곧 발간된다는 내용과 표지엔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데······, 놀랍게도 눈에 익숙한 그림이었다.

    바로, 이즈미의 그림체다.

    미래형 갑옷 같은 옷을 입은 산발머리의 미소년.

    특유의 오버스러운 액션도 이즈미의 그림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했다.

    “······.”

    뭐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렵다.

    분명 일본작가들을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를 지로에게 전해 들었는데, 어째서 한국에 발간을 하는 거지?

    지금 시대에 일본만화잡지를 한국에 발간할리도 없고.

    물론 내가 살던 시절에도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창간호 발행 날짜를 보니, 아직 두 달이 넘게 남아있다.

    포스터엔 요란한 글자와 함께 몇 개의 캐릭터가 있는데, 익숙한 그림도 몇 보인다.

    일단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 나오는 한국의 잡지만화에 비해 수준이 월등하다. 이게 진짜로 나온다면 한국의 만화시장을 단번에 뒤집을 정도의 파괴력이 있을 거다.

    아이큐 점보가 나왔을 때도 엄청났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면 만화 팬들에게는 충격이나 다름없을 테니.

    전화번호라도 있나싶어서 확인했더니, 포스터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 거기서 뭐해?”

    돌아봤더니 익숙한 자동차에서 들린 음성이다.

    슬쩍 머리를 내려 봤더니 이대봉이다.

    “타! 가는 길인데, 같이 가자!”

    어차피 돌아가야 할 상황이라 머리를 끄덕이고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뭐 보고 있었어?”

    “새로운 주간소년지가 창간된다는 포스터가 붙어있어서.”

    “주간소년지? 정말?”

    “그래.”

    “드디어 우리나라도 주간만화잡지 시대가 열리는 건가?”

    그렇게 말하며 웃더니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디 출판사야? 혹시 보물성을 출간한 육성재단?”

    “아니, 아무래도 나카야 이즈미가 만든 것 같기는 한데.”

    그 말에 차를 출발시키려고 기어를 넣던 이대봉이 멈칫하더니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나카야 이즈미? 그 부잣집 아가씨?”

    “어.”

    “그 여자가 한국에 만화잡지를 만들었다고?”

    “어.”

    “그게 가능해? 일본만화가 그렇게 정식으로 들어올 수 있어?”

    “정식으로는 안 되지.”

    “그럼, 말이 안 되잖아. 네가 잘 못 안거 아니야?”

    “표지 그림이 그 여자 캐릭터가 맞아. 그림은 뭐 익숙하니까 금방 알아보겠던데.”

    “그림이 비슷한 거 아닐까? 연재만화도 가끔 해적판을 올리는 미치광이들이 있으니까.”

    “해적판이 저렇게 떳떳하게 포스터까지 만들고 창간호 나온다고 광고할 수 있겠냐?”

    “표지는 좀 그렇겠지.”

    이대봉이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다.

    “아마, 표면적으로는 한국 업체가 만드는 것처럼 했겠지. 사장도 한국인으로 앉혔을지 모르고.”

    그제야 이대봉도 납득했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바지사장 같은 거구나.”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예상은 가능하지.”

    “윤환이 네 말이 맞다고 쳐도 이상하네. 굳이 한국에 잡지를 만들 이유가 없잖아. 시장이 큰 것도 아니고. 관리하는 것도 어려울 텐데. 거기다가 성공을 하더라도 일본 본토만큼의 파급력도 없을 테고.”

    그 여자의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본인의 말을 들어보기 전엔 어느 것도 확신하기 어렵다.

    애초에 제정신인지도 모르겠고.

    그때 뒤쪽에서 빵빵거리는 자동차 클랙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네엥, 죄송합니다!”

    이대봉이 뒤쪽을 보며 손을 흔들고는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화실 앞에 도착했는데, 검은색의 고급세단이 담벼락 아래 주차되어 있다.

    이 동네에선 보기 힘든 고급차다.

    “와, 차 번들거리는 거 봐. 엄청 관리 잘했네.”

    이대봉이 감탄하는 사이 나는 서둘러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역시나 예상했던 인물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머, 이제야 왔네요. 헛걸음을 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바로 이즈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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