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은 녀석 (4)
욕설을 쏟으며 벌떡 일어난 나준호를 보며 나소정이 경악한 얼굴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난 몰라. 언제 저렇게 또 퍼 마신거래.”
나준호의 얼굴을 보니 얼굴이 거무죽죽하다.
저 정도 얼굴이 되다니, 얼마나 마신거야?
아까 조금씩 마신다 싶었더니, 가져다 놓은 소주병들도 모두 비어있다.
모두라고 해봐야 세병밖에 안되긴 하지만.
그리고 나눠 마신 것까지 생각하면 아무리 계산해도 한 병이 조금 넘을 정도인데.
“쓰레기 같은 놈들, 난지도로 꺼져!”
“야, 나준호, 그만해!”
나소정이 말려봤지만, 뭐 들을 생각 따윈 없는 표정이다.
그보다······.
저쪽 사람들 눈빛이 살벌해졌는데.
“난지도? 쓰레기? 저거 우리보고 욕하는 거 맞지?”
“그렇겠지. 저놈 눈 봐라. 우리 째려보고 있잖아.”
“와, 어이없네. 딱 봐도 어려보이는 새끼가.”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나고 있다.
숫자나 인상이나, 어떤 걸로도 상대가 안 되는 분위기다.
그래도 다행인건 그쪽 사람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남자가 그들을 말리고 있다는 것이다.
“야, 그냥 술 취해서 그런 거잖아. 그러니까, 그냥 앉아.”
“싸가지 없게 말하잖아요. 처음 보는 새끼가.”
“아직 술이 약한 모양이니까······.”
“약하긴 누가 약해 새끼야!”
하이고, 이젠 모르겠다.
“저 새끼가!”
이젠 그 연장자마저 인상을 찌푸린다.
뭐, 분위기 보니 수습은 안 될 모양이다.
저놈들이 변철수를 뒤에서 욕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곳에서 시비가 붙는 건 좋은 게 아니니까.
어쨌건 나준호의 누나인 나소정이 가장 곤란해 했다.
당황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인사하며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제 동생이 술에 너무 취해서······.”
“안 취했다니까. 저 새끼들이 모여서 개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
“너는 좀 가만히 있으라니까, 정말!”
“맞아. 준호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이번엔 가만히 있던 박기우까지 나섰다.
“오빠까지 왜 그래?”
“기우 형도 열 받은 거잖아. 누나는 그냥 빠져.”
슬슬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저쪽 사람들 표정도 장난이 아니다.
그중 한 녀석이 나섰다.
“좆만한 새끼가 뒈지고 싶나?”
저쪽에서도 가장 험상궂어 보이는 얼굴이다.
둥글둥글한 체격이지만, 인상만으로 크게 먹고 들어갈 정도의 범상치 않은 얼굴이다.
솔직히 저 꼴을 보고 있자니 나도 짜증나긴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이성적이 되어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민폐고.
어쩔 수 없이 내가 입을 열었다.
“준호야, 그만해라.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잖아. 기우 너도.”
“네.”
“······네.”
박기우야 그렇다 치고, 나준호 저 녀석 상태를 봐선 반항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금방 대답하며 자리에 앉는다.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하고는 있지만.
그런데 상대방은 이미 열을 받을 대로 받은 상황인지 조용히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씨발, 지들만 끝내자고 하면 단가?”
“미친 새끼들이 시비를 걸었으면 확실히 끝까지 가던가. 용기도 없는 것들이. 여자 앞이라고 허세 부린 모양이지?”
험상궂은 놈이랑 다른 얍삽하게 생긴 놈이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해.
“여자 뒤에서 숨어있어라, 이 한심한 새끼들아.”
아, 이놈들이 진짜.
짜증이 막 밀려오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여기서 문제를 일으켜 봐야 1도 도움이 되지 않는데.
하지만 참으려니 혈압이 솟구친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 우연이네요. 여기서 다 만나고.”
갑자기 누군가 식당으로 들어오며 내게 아는 체를 했다.
누군가 했더니······,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바로 그 공무원 남자였다.
이 사람이 왜 갑자기.
내가 황당해하며 쳐다보자, 그가 내 표정의 뜻을 이해했는지 웃으며 말했다.
“저희도 오늘 회식이라서요.”
회식?
뿔테안경 뒤를 쳐다봤더니, 전에 봤던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주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우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평범하지 않는 남자들 네 명과 뿔테안경.
그 때문에 흉흉하던 실내 분위기가 갑자기 애매하게 변했다.
인상을 빡 쓰며 다가오던 녀석들도 갑자기 등장한 이들 때문에 당황한 모습이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놈들이라도 이 인간들이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눈치 챘겠지.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뿔테안경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우리 자리를 기웃거리며 물었다.
“뭐 드시고 계셨어요?”
고기 집에서 뭔 뻔 한 소리를.
“삼겹살요.”
“아, 맛있겠다.”
그렇게 말하더니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여기, 삼겹살 10인분 줘요!”
“아, 네.”
식당 분위기에 얼떨떨해하던 아줌마가 머리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뿔테안경이 검정양복들에게 말했다.
“모처럼 우리도 삼겹살 먹읍시다. 이참에 소주라도 시킬까?”
“술은 곤란합니다.”
“소주랑 삼겹살이 얼마나 궁합이 좋은데.”
“안됩니다.”
“나 참, 딱딱하긴.”
방금 회식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분위기를 보니까 그냥 즉흥적으로 들어와서 주문한 것 같은데. 거기다 술은 곤란하다니, 일하고 있던 중이었나?
어쨌건 뿔테안경이 말한 건 거짓말이라는 거군.
내가 묘한 표정으로 뿔테안경을 쳐다봤더니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이 사람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회식 맞는데.”
“굳이 변명은 안 해도 되는데.”
“에이, 변명 아니에요. 회식 맞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다시 검은 양복들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들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냥 앉아만 있을 뿐이다
“이 양반들 진짜.”
뿔테안경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아까 다가오던 녀석들을 바라봤더니 어느새 자기들 자리로 돌아가 있다. 아니, 분위기 보니까 이쪽을 힐끔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아무래도 나랑 이 검은 무리들이랑 친한 사이라는 걸 알고는 자리를 뜨려는 모양이다.
뭐, 이렇게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게 가장 좋은 모양새이긴 한데.
아무튼 서둘러 계산을 하고 식당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애들을 바라봤다.
모두 눈동자를 데굴거리며 나와 검은 무리들을 번갈아 힐끔거린다.
이들과 내가 무슨 사이인지 궁금한 얼굴로.
뭐, 무슨 사이고 뭐고 할 그런 관계는 아닌데.
그런데 뿔테안경, 저 인간. 눈치는 빨라서 곧장 변명처럼 말했다.
“하하, 그냥 오다가다 알게 된 사이입니다.”
변명이 어째 궁색하다.
하지만, 뭐 특별히 틀린 말도 아니니.
“전에 일은 덕분에 잘 해결했어요. 그나저나 크게 싸웠는데, 다친 분은 없었습니까?”
내 물음에 뿔테안경이 웃었다.
“그 정도야, 뭐. 별거 아니에요. 평소 우리가 하는 일에 비하면.”
그때 검은 양복 중 한명이 뿔테안경을 쏘아보자,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 이건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이미 들어버렸는데 뭘 못들은 걸로 하래?
맨인블랙이야 뭐야.
“그나저나 근처에서 일하시는 겁니까?”
내 질문에 멈칫한다.
“너무 많은 걸 알려하면 다칠 수도 있어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실없이 웃었다.
뭐, 전에도 이야기 하지 않으려 했으니까.
어쨌건 이곳에 있는 것도 불편해서 애들에게 돌아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배도 찬 것 같으니까 우리 돌아갈까?”
“아, 네.”
“네.”
내 말에 애들이 깜짝 놀라며 대답하고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그러자 뿔테안경이 당황했다.
“어? 벌써 다 드신 거예요? 아, 섭섭하네. 이야기도 좀 하면 좋을 텐데.”
할 얘기가 있어야 하지.
그보다.
“이 친구들이 바빠서요.”
“아, 그렇습니까?”
“동료 분들끼리 즐겁게 식사하세요.”
“보시다시피 무뚝뚝한 사람들이라.”
그 말에도 검은 양복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뿔테안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보이시죠? 이렇게 재미없다니까요.”
“그러네요. 아무튼 저희는 이만 갈게요.”
“······.”
애들을 먼저 보내고 값을 치르는 동안에도 뿔테안경이 계속 날 쳐다보며 아쉬워한다.
하긴, 저런 사람들이랑 지내면 좀 답답하긴 하겠네.
그래도 뭐, 어쩌겠어.
본인 팔자인거지.
“먼저 나가. 계산하고 따라 나갈게.”
애들을 먼저 내보내고 계산을 하는데, 뿔테안경이 내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봬요.”
“네?”
무슨 소리지?
둘 다 우연처럼 만나놓구선.
“우리, 인연이 있는 것 같으니까.”
못 알아들을 소리를 하기에 그냥 슬쩍 웃고는 돌아서서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 따다다다 거리는 익숙한 음성이 들린다.
뭔가 싶어 봤더니 나소정이 나준호에게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너는 진짜, 어쩌려고 그래? 그렇게 살면 객사하기 딱 좋아. 엄마도 너 그럴까봐 얼마나 걱정하시는데.”
“아니, 그게 아니고, 그 자식들이······.”
“그 입 좀!”
“······.”
“자꾸 그럴 거면 앞으로 화실에도 나오지 마!”
“누, 누나······.”
“알겠어?”
“아, 미안. 앞으로 안 그럴게.”
쯧, 그러게 누나 말씀 잘 듣지.
그런 모습을 보고 난 뒤, 이대로 헤어질까 싶었는데.
그때 아까 밖으로 변철수를 따라 나갔던 이정미가 돌아왔다.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얼핏 듣기론 전에 변철수랑 사귀었다고 하던데.
지금은 헤어진 모양이고.
변철수에 대한 건 그냥 묻지 않는 게 좋겠다.
“누나? 철수 형은?”
갑자기 나준호가 이정미에게 묻자 나소정이 인상을 팍 썼다.
“너는 좀!”
“아야야야!”
또 나소정에게 귀를 잡힌 나준호가 비명을 질렀다.
쯧, 넌 좀 당해서 싸다.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차고는 애들에게 말했다.
“이젠 나도 슬슬 가봐야겠다.”
“아, 네. 오늘 잘 먹었습니다.”
“네,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애들이 인사하자, 손을 휘저었다.
“감사는 무슨. 그리고 사람 구하는 건 대봉이 형에게 말해 둘 테니까, 금방 해결될 거야. 그리고 우리 화실 자주 놀러 와라. 멀지도 않잖아.”
“정말 자주 가도 되죠?”
나준호가 좋아라하며 물었다.
“야, 너는 좀.”
“괜찮아. 언제라도 괜찮으니까.”
“써니 선생님에게 그림도 배울 수 있나요? 아야!”
“얘가 진짜.”
또 나소정이 귀를 잡아당기자 비명을 지른다.
그래, 좀 많이 당겨라, 많이.
“선희는 몰라도, 화실에 오면 많이 배울 수는 있을 거다.”
이대봉이 만든 팀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삼사라를 기반으로 한 외전격 만화를 그리는 이상, 나도 도움을 주고 싶다.
물론 그만큼 실력을 스스로도 쌓아야 할 테지만.
아무튼 그렇게 애들이랑 헤어지고 난 뒤, 택시를 탔다.
그나저나······.
뭐지? 이 허전함은.
뭔가 빼먹은 기분인데.
혹시나 싶어서 뒷주머니를 만져보니, 지갑은 있고.
휴대폰이야 당연히 없는 게 맞고.
열쇠도 있는데.
뭐지?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창밖을 보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화실에 도착했는데······, 어시들이 날 동시에 돌아본다.
표정들이 묘하다.
그런데 그때 실버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 구석구석 살피고 있다.
왜 저러지?
“대봉이 그놈, 기다리다가 지쳐서 방금 갔다.”
“기다리다니, 왜?”
“빠삐코.”
“빠삐······.”
아, 참. 잊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어째서 허전한가 했더니.
선희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