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48화 (348/425)

귀찮은 녀석 (1)

“내년에 올림픽 열린다고 요즘엔 한국산 TV용 만화영화가 많이 늘었네.”

실버가 신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김기철이 펜을 물통에 넣고는 흔들어 씻고는 다시 꺼내 휴지로 닦으며 말했다.

“그래봤자, 몇 편 안 되요. 얼마 전에 방송한 떠돌이 깡치나 올림픽 마스코트 홍보용인 호돌이 정도가 전부잖아요. 뭐, 얼마 후엔 아기공룡 두리도 한다는 소리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TV용은 처음인데.”

“올림픽 홍보로 시작한 거라서, 올림픽 끝나면 흐지부지 되는 거 아니에요? 몇 년 전엔 극장용 반공 만화영화도 꽤 많이 나왔었고. 쯧, 이럴 땐 일본이 정말 부럽다니까요.”

“걔네들은 그런 상황이 거저 나왔겠냐? 만화가들이랑 관련업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싸웠으니까. 정부랑 각종 단체들과.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건 없어.”

실버의 말대로다.

그리고 한국은 김기철의 불안과는 달리 올림픽이 끝나고서도 금방 분위기가 식지는 않았다.

그 이후에도 TV판 애니는 제법 만들어졌고, 대학교에도 관련 학과까지 생기며 많은 관심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실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지금은 조금씩 한국만화계가 부흥을 시작하기 시작하던 시점은 맞다.

1982년 보물성이라는 만화전문 잡지가 탄생하고, 거기서 인기작들이 하나 둘 쏟아지는 시점, 거기다 대본소용 만화들도 한창 인기를 올리고 있는 시기니까.

그리고 조만간 주간만화잡지도 등장할 것이고, 신문만화도 본격적으로 연재되면서 한때 청소년 미래 희망직종 1위에 오르기도 했었다.

아무튼, 어쨌건 지금 같은 분위기는 IMF 전후로 몰락하게 될 것이지만.

갑자기 입맛이 쓰다.

지금의 기준에선 과거가 아닌 앞으로 미래에 벌어질 일들이니까.

그나저나······.

요즘엔 어째선지 마음이 답답하다.

머신건 잭의 순위도 소년 히어로 내에서는 1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고, 선희도 계속 성장 중인데······.

뭐가 문제지?

자리에서 일어나 화실 밖으로 나가려하자, 실버가 날 불러 세웠다.

“어디 가는데?”

“그냥 밖에 바람이나 쐬러.”

내 말에 실버의 표정이 묘해졌다.

“바람이라면 여기가 더 시원할 텐데. 밖에 나가봐야 더위밖에 더 먹겠냐?”

“에어컨 앞에만 있어서 그런지 좀 멍한 기분이라서.”

그 말에 실버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에어컨도 너무 쐬면 몸에 안 좋다니까.”

“그럴지도.”

“그래도 이거 없으면 작업 안 되니까 끌 생각 마라.”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이거 참.

“24시간 켜 놔도 상관 안 해.”

“그럼 다행이고.”

그렇게 말하더니 뭔가 떠올랐는지 곧 덧붙였다.

“이왕 나갈 거면,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와라. 맛있는 걸로.”

“아휴, 네, 네. 알겠습니다요.”

그때 선희가 손을 살짝 들며 입을 열었다.

“난, 빠삐코.”

“아이구,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선희 쟨 갑자기 빠삐코에 꽂혔는지, 요즘은 계속 저거만 먹는 것 같다.

아무튼 평소에 외출할 때 쓰던 OB야구 모자를 쓰고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순간 훅 밀려오는 오후의 더위.

확실히 한여름이라는 건가, 거기다 한낮이라 열기가 장난이 아니다.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때 대문 앞에 익숙한 자동차가 멈춰 섰다.

“어? 윤환이네? 어디가?”

이대봉이 운전석 창문을 열고는 물었다.

“그냥 바람 쐬러.”

내 말에 이대봉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피식 웃었다.

“이렇게 더운데 바람을 쐬러 나왔다고? 혹시 에어컨 고장 났니?”

그렇게 묻더니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혼자 중얼거렸다.

“음, 그러면 곤란한데. ······들어가지 말까나?”

“멀쩡해, 에어컨.”

내 말에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아, 그래?”

이 인간은 요즘 더워지고 나서는 쉬는 날 빼고 거의 매일이라고 할 만큼 자주 찾아온다.

역시 에어컨 때문이었구만.

이대봉이 싱글벙글하며 담벼락에 차를 세우더니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칫했다. 그리고는 날 돌아본다.

“너무 돌아다니지 마. 이런 날 더위 먹는 사람들 엄청 많으니까.”

“알았어.”

“아, 그리고 나가는 김에······.”

“아이스크림 사오라고?”

“어? 어떻게 알았어?”

“얼굴에 써 있구만.”

내 말에 이대봉이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아무튼 빠삐코로 부탁해.”

“형 때문에 선희가 여름 내내 그거만 먹는다.”

“오, 좋은 현상이네.”

“뭔 헛소리야?”

내가 버럭 하자 서둘러 대문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가며 소리쳤다.

“내거 까먹지 마! 알겠지?”

그리고는 바로 대문이 닫혔다.

넉살은.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시멘트 바닥에서 아지랑이가 스멀거리며 올라온다.

생각보다 열기가 만만치는 않지만 에어컨 앞에 계속 있었던 탓인지 아직은 더위에 축 늘어질 정도는 아니다.

나름 가벼운 차림으로 낮에 돌아다니는 것도 기분전환에 도움이 되고.

일단 근처 슈퍼에 들어가서 나 먹을 쭈쭈바 하나를 사 들고 입으로 빨며 걷기 시작했다.

올해부터 수입차 자유화니 어쩌니 하더니, 드물지만 벤츠 같은 독일 차들이 간혹 보이기도 한다.

듣기론 지금 가격으로 1억이 훨씬 넘는다고 하니, 진짜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다.

내가 살던 시절에도 그 정도 가격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이왕 걷기 시작한 거 운동 삼아 많이 걸어볼까.

주문받은 아이스크림이야 뭐, 천천히 가지고 가도 되고.

그러다 인근 서점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더위 때문인지 문이 활짝 열려있다.

슬쩍 봤는데, 입구 쪽 책장에 만화책들이 잔뜩 꽂혀있다.

요즘 슬슬 많아지고 있는 일본 해적판 만화책들이다.

그럴듯한 가짜 이름으로 위장한 만화들.

용소야니, 권법소년이니, 대장군 같은 이름들.

제목도 임의로 만든 것들이고.

요즘엔 정말 본격적으로 대놓고 무지막지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애들 사이에서는 꽤 팔리는 모양인지, 지금도 그 앞에 몇 명이 기웃거리고 있다.

이 시대야 정식으로 일보만화가 수입될 수 없던 시대라고는 하지만, 역시 이런 모습은 불편하네.

혀를 한번 쯧 하며 차고는 곧바로 서점 밖으로 나갔다.

그러가다 전에 선희랑 몇 번 들렀던 다방이 눈에 들어왔다.

커피숍이랑은 상당히 다른 분위기지만, 은근히 집중이 잘되는 묘한 곳이었다.

선희도 저곳에선 기분이 편해진다고 하고.

아무래도 손님이 별로 없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그곳에 한 젊은 남자가 겨드랑이에 서류봉투를 끼운 채로 서둘러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외모를 보면 이제 갓 스물을 넘어 보이는데, 대학생인가? 그런데 한쪽 손에 잉크병이랑 펜이 들려있는 게 슬쩍 보였다.

만화?

봉투에 든 건 원고인가?

아닐 수도 있지만.

나도 모르게 호기심 생겼다.

따라 들어갈까?

뭐, 운동이 원래 목적도 아니니까.

결국 호기심을 못 이기고 곧장 그가 들어갔던 다방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뽀글머리 여자가 살갑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다른 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찾는 분이 계세요?”

“아니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계속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내 앞에 들어갔던 남자가 있는 자리를 발견했다.

한쪽 구석, 눈에 잘 뛰지 않는 자리. 그곳에 뒤통수가 보인다.

나는 곧장 그 근처로 다다가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따라 왔던 뽀글머리 여자에게 말했다.

“시원한 냉커피요.”

“네에.”

하이 톤으로 대답한 뽀글머리 여자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돌아가고 나자 다시 그를 슬쩍 돌아봤다.

남자는 머리를 숙인 채 뭔가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머리를 살짝 더 들어 봤더니, 역시 만화를 그리고 있다.

이 사람은 왜 여기서 만화를 그리고 있는 걸까?

그보다 다방에서 만화를 그리는데도 별 말을······ 할 필요는 없겠네.

어차피 손님이라고 해봐야, 나까지 겨우 세 명.

이러니 에어컨을 돌리기도 부담스럽겠지.

어쨌건 내 앞의 이 남자도 커피는 마실 테니.

그나저나······, 어떤 만화인지 궁금하네.

머리를 좀 더 빼고 턱을 들어 그림을 살폈다.

이미 데생은 완성되어 있는데, 거기서 인물 펜선을 입히고 있다.

자리가 어두워서 그런지 데생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남자가 날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요.”

“네?”

“그렇게 빤히 보시면 제가 불편해서요.”

“아,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자 그가 다시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펜선을 슥슥 그어나간다.

하지만, 이거 너무 익숙한 그림이라 다시 눈이 갔다.

남자가 다시 그림에 집중하고 있다가 내 쪽을 슬쩍 돌아보더니 인상을 썼다. 하지만 급한 모양인지 벽시계를 몇 번이나 힐끔거리며 계속 작업해 나갔다.

이거 괜히 방해만 되는 것 같아서, 일단 시선을 거두고 있는데 그때 뽀글머리 여자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냉커피 나왔어요오~”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내 앞에 두고는 돌아갔다.

곧장 나는 커피를 홀짝거리다가 곧 자리에서 문 열린 곳을 힐끔거리고 있는데, 한참 작업 중이던 남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씨. 시간이 없는데.”

마감에 늦은 건가?

그래도 동종업계 사람으로서 모른 척 할 수는 없고.

“저기 저라도 좀 도와드릴까요?”

슬쩍 돌아보며 물었더니 작업하던 남자가 멈칫하고는 날 쳐다본다.

“저를요?”

“네. 저도 그쪽 일을 좀 배우긴 했거든요. 먹칠, 지우개, 간단한 자선이면 가능한데.”

그 말에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무래도 내 말 때문에 믿음이 생긴 모양이다.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이거 도와주시면 작업료는 드릴게요.”

“그건 뭐 됐고요. 그냥 언제 기회 되면 밥이나 한번 사세요.”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죠.”

그 말을 듣고 나서 곧바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금은 스토리를 주력이긴 했지만, 내가 그래도 한때 만화가를 꿈꿨던 녀석이다.

이정도 뒤처리쯤이야.

곧장 그가 작업 중이던 원고 한 장을 내게 내밀더니 말했다.

“먼저 지우개질 부터 해주시고 바로 여기 X표시 되어있는 곳에 먹칠 해주세요.”

“네.”

간혹 지우개질 전에 먹칠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게 되면 잉크가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작업시간이 지체가 된다.

그리고 다 마르기 전에 지우개질을 하면 종이가 손상되어 원고를 망칠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순서야 워낙 많이 봐왔으니.

그나저나 이런 내 모습을 화실 식구들이 본다면 뭐라고 할까?

그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혼자 미친놈처럼 낄낄거리며 먹칠을 해나가다가 문득, 그림이 익숙하다는 사실을 움찔하고 놀랐다.

어······, 이거?

내가 감자기 먹칠을 멈추자 남자가 머리를 슬쩍 들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뭐 실수라도 하신 거예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내 반응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아, 이 만화 아시는구나.”

“네. 조금.”

내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와, 이 만화 아직 한국에서 아는 사람 별로 없는데, 대단하시네요. 중국대사관에서 만화책 좀 구입하시나 보다.”

거기서 일본책을 가끔 구입하기는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닌데.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 실내로 들어오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뒤에서 멈춰 섰다.

“야, 나준호. 너 또 작업하는 거니? 화실로 와서 그리라니까.”

“여기가 작업하기 좋단 말야.”

“너는 진짜······. 누나를 돕는 건 고맙지만, 그래서 이런 곳에서 원고 그리고 있는 건 좀 보기 그렇잖아.”

“여기가 뭐 어때서. 난 좋기만 한데.”

“어휴, 누가 말리겠니.”

그렇게 한숨을 쉬며 말하던 여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 놀란 여자가 황당한 표정으로 굳었다가 곧 입을 열었다.

“어? 서, 선생님.”

그림이 익숙하다 했더니.

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바로 ‘스튜디오 D’의 멤버인 나소정이었다.

남자가 그리고 있던 원고는 당연하게도 삼사라 외전인 ‘삼사라 멀티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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