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47화 (347/425)
  • 징징 거리지 마라 (2)

    예상도 못한 갑작스러운 이즈미의 전화에 황당하긴 했지만, 일단 성준희에게 전화기를 넘겨받았다.

    또 무슨 말로 사람을 황당하게 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

    “네. 전화 바꿨습니다.”

    말하자마자 대뜸 카랑카랑한 음성이 넘어왔다.

    -왜 그랬어요?

    그냥 훅 들어오는구나.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아무튼 표정을 관리하며 느긋한 음성으로 물었다.

    “뭘 말입니까?”

    -그쪽 남매 크래신지 후레신지 하는 만화 그리는 걔 도와줬다면서요.

    “크래시 킹 말입니까?”

    -뭐가 됐건.

    “그거 얼마 전에도 말씀 드린 거 같은데요. 내가 스토리 짠 거 아니라고.

    -그쪽 말고, 여동생말이에요. 써니 선생.

    “아니, 그림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합니까? 전혀 그림이 다른데. 요즘 그림체에 변화를 주고 있어서 확실히 티가 나던데요.”

    -걔 그림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그림에서 도와준 게 없다는 것도 잘 알고.

    “그럼 뭘 도와줬다는 겁니까?”

    -글쎄요. 그건 그쪽에서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또 심문하는 듯 말하고 있다.

    진짜 이것도 병이지 싶은데.

    “모르겠는데, 직접 말씀해 보시죠.”

    그 말에 잠시 뜸을 드리더니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리고는 곧장 빽 소리를 질렀다.

    -발뺌하지 말아요! 이쪽도 다 조사해서 알고 있으니까!

    어이없네.

    이 여자는 진짜 답이 없다, 답이.

    그나저나 쌓이는 스트레스는 없겠다.

    하고 싶은 말은 다 쏟아내니까.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전혀 다르지.

    “뭘 조사했는데요? 말해 봐요, 나도 궁금하니까.”

    -정말 모른척하기에요?

    “모른 척이 아니라, 전혀 모르겠으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진짜······.

    부들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좋아요, 그럼 잠깐 기다려 봐요!

    그렇게 말하더니 곧 ‘쿠로다!’ 하며 늘 같이 다니는 노인을 부른다.

    잠시 후 곧 그녀가 다시 말했다.

    -소년츠바사 후기에 썼던 내용도 있었군요. 무슨 내용인지는 알겠죠?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뭐 그렇게 써져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이걸 가지고 지금 따지는 거였군.

    “그건 알고 있어요.”

    -증거를 들이미니까 이젠 아니라고는 못하네요.

    “이거 증거입니까? 나는 왜 몰랐지?”

    -비아냥거리지 마세요. 거기서 나온 글을 보면 분명히 덕분에 어쩌고 하며 쓰여 있잖아요. 전에 스토리 참여 했냐고 물었을 땐 전혀 아니라더니, 결국 내 말이 맞았던 거네.

    답정너인가?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 말이 맞군요. 한숨까지 쉬는걸 보면.

    “어이가 없어서 그럽니다, 어이가.”

    -어이가 없는 건 이쪽이에요. 그냥 인정만하면 되는데. 그리고 나도 그냥 확인만 하는 거니까 자존심 때문이라면 그 정도는 이해해 드릴 수도 있어요.

    “뭘 자꾸 인정하라는 겁니까? 아니라는데. 그리고 그쪽 이해는 별로 필요도 없고요.”

    -괜찮다니까요. 그깟 자존심이 그렇게 중요한가?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그 말에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흥분한 숨소리가 넘어왔다.

    그러더니 잠시 말이 없다.

    열 엄청 받았구나.

    그리고 곧 다시 이즈미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름 흥분을 누른 듯한.

    -써니 선생이 넘겨준 쪽지, 이후로도 뭔가 있었던 거 진짜 아니에요?

    “그것도 아니거든요. 도대체 몇 번을 말하게 하는지 모르겠네.”

    -······정말이죠?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어요?

    뭘 이름까지 걸고 말하라는 거야.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네.”

    내 말에 다시 뜸을 들이더니 이즈미가 말했다.

    -······좋아요. 믿어보죠.

    이 여자가 진짜.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럽네.

    -그럼 전화 끊······.

    어디서 마음대로 끊겠다고.

    곧바로 나도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런데 왜 연재를 끝낸 겁니까?”

    -그건 왜 물어요? 그쪽일도 아닌데.

    “크래시 건 때문이에요?”

    -아닌데요.

    “그럼 어째 섭니까?”

    -이야기가 끝났으니까 마무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게 이상한가요?

    “그쪽 말대로라면 이상할 게 없는데, 듣기론 전혀 끝날 상황이 아닌데 마무리 되었다고 하던데요.”

    그 말에 이즈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원고 직접 봤어요?

    “아뇨.”

    -그런데 왜 그렇게 본 것처럼 말해요?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나요?”

    -네? 뭐라고요?

    “아닙니다. 그냥 여기 말이에요.”

    다시 뜸을 들이더니 차분한 음성이 돌아왔다.

    -아니, 그쪽 편집자는 자기 담당에나 신경 쓸 일이지, 왜 다른 만화가에게까지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네요.

    이 여자 진짜 내로남불이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인기가 밀린다고 그렇게 냅다 도망치듯 마무리하는 건 너무 비겁한 거 아닙니까?”

    -뭐예요! 도망! 비겁!

    “인기라는 게 떨어질 수도 있고, 올라갈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카야 씨는 그런 걸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군요. 크래시 킹 작가에겐 특히 더요.”

    어? 방금 이빨 갈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절대 아니에요. 난 그딴 여자애에게 절대로 신경 쓰지 않거든요!

    아주~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렇게 도망치고 나면 영원히 패배자가 될 겁니다.”

    -뭐라는 거야! 짜증나게! 누가 영원히 패배자가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말 함부로 해도 되는 거예요!

    하, 이거 참.

    “느닷없이 전화해서 따지는 전화를 계속 하신분이 할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나름 이유가 있는 거잖아요!

    “그렇겠죠. 본인이 따지는 건 이유가 있고, 남이하면 아니고.”

    -비아냥거리지 마세요!

    “비아냥 아닌데.”

    -맞잖아요!

    “뭐, 그렇게 들었다면 할 수 없는 거고요. 아무튼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데빌 바이러스도 꽤 괜찮은 만화라고 생각했는데. 아까운 소재긴 하지만, 작가 본인이 도망쳐 버리면 방법이 없으니까.”

    -누가 도망을 쳤다는 거야! 아, 짜증나!

    전화가 끊겨버렸다.

    성질도 참.

    뭐, 이것도 이젠 적응하니까 별로 화나지도 않는다.

    그냥 저런 캐릭터라고 인정해버리면 되니까.

    그나저나 뭐지? 이 평안함은?

    시몬X 침대도 아니고.

    한참 열을 냈는데도 불구하고 편안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자, 실버가 날 빤히 쳐다보고 있다.

    “왜?”

    “너 얼굴이 편안해 보여서.”

    “그러게. 왜 편안하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침 놀러왔던 박상식이 낄낄거렸다.

    “너도 참 악한 구석이 있다. 그렇게 사람을 몰아세우고도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보면.”

    “그런가? 어쩌면 나도 모르는 악당 기질이 있는 걸지도.”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 * *

    고급스러운 클래식 전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은 이즈미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아, 진짜! 자기가 뭐라고 간섭이야!”

    버럭 소리치는 이즈미를 노인이 걱정스럽게 바라봤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오랫동안 봐온 그로서는 그냥 지금은 그저 지켜보는 게 가장 상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뭐, 도망? 내가? 흥! 누가 그런 여자애한테서.”

    그렇게 혼자 씩씩거리던 이즈미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로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이야기가 바닥 난건 아니었어. 그냥 시시해서 연재를 끝낸 거지.”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곧 노인을 돌아봤다.

    “구로다.”

    “네, 아가씨.”

    “저기, 혹시 전화는 없었어요?”

    “전화말씀이십니까? 아까, 아사카와 이사님의 부인이랑, 츠무라 전무님 부인에게서 온······.”

    그 말에 이즈미가 인상을 쓰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그거 말고.”

    “그 외엔 담당이신 코지마 씨 전화가 세 번······.”

    “그거.”

    “네?”

    “그 사람 전화 마지막으로 언제 왔죠?”

    이즈미의 말에, 노인이 잠시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정확이 한 시간 13분 전입니다.”

    “뭐야? 어젠 그렇게 자주 전화를 걸더니.”

    “그야, 아가씨께서 통화를 거절하시니까······.”

    그렇게 말하던 노인이 멈칫했다.

    이즈미가 왜 저렇게 물어보는 것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가 전화를 걸어 볼까요?”

    “그건 안돼요. 이쪽이 안달 난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되니까.”

    그 말에 노인이 금방 수긍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이즈미는 시계를 보며 다시 인상을 썼다.

    “아씨, 짜증나게.”

    그 모습을 보던 노인이 눈을 데굴거리다 곧 입을 열었다.

    “저, 잠시만······.”

    “어디 가는데요?”

    “아까 물을 좀 많이 마셨더니······.”

    그 말에 이즈미가 머리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아, 네.”

    그렇게 대답한 노인이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복도를 지나 옆방으로 건너가 곧장 전화기를 들었다.

    잠시 후.

    이즈미가 소파에 앉아 인상을 쓰며 팔짱을 끼고 전화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팔위로 삐져나온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던 바로 그때 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그러자, 이즈미가 화들짝 놀라더니 문 쪽을 보며 소리쳤다.

    “구로다! 구로다!”

    그때 문이 열리며 노인이 서둘러 들어왔다.

    “네, 아가씨!”

    노인을 본 이즈미가 전화기를 손가락질 하며 소리쳤다.

    “전화기! 전화기!”

    그러자 노인이 헐레벌떡 다가가며 전화기를 들었다.

    “네, 나카야가(家)입니다.

    -코지마입니다. 호출기 확인하고 전화 드렸습니다.

    “아, 코지마 씨. 또 전화를 주셨군요. 끈질기십니다.”

    -네? 무슨······.

    “물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 아가씨가 연재를 끝내면 귀하의 출판사에도 큰 타격이 될 거라는 걸요.”

    전화기 너머에서 당황한 음성이 들여왔다.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

    그렇게 말하던 코지마의 음성이 곧 끊어졌다. 그러더니 곧 뭔가를 느낀 것인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네. 말씀대로입니다. 나카야 선생님은 그만큼 저희 입장에서도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나카야 선생님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요?

    “안 그래도 제가 오늘 내내 아가씨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좀 더 스토리를 늘려보실 수 없을까하고요.”

    노인의 말에 전화기 속에서의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 그래서요?!

    기대감이 잔뜩 오른 음성.

    그 소리는 소파에 앉아있는 이즈미에게도 잘 들릴 정도로 컸다.

    노인이 그녀를 슬쩍 돌아봤다.

    이즈미는 그런 노인의 시선을 피하며 모른 척 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엔 만족스러워하는 것이 잘 나타났다.

    그것을 확인한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조금 생각해보시겠다고······.”

    “저, 정말입니까?!”

    “아, 네. 그래서 제가······, 아. 지금 아가씨께서 들어오시네요.”

    그렇게 말한 노인이 손으로 전화기를 막고는 잠시 있었다. 그리고는 이즈미를 돌아봤다.

    이즈미는 팔짱을 낀 채로 느긋하게 있다가 벽시계를 슬쩍 바라봤다. 그리고 시계바늘을 잠시 보던 그녀가 노인에게 왼손을 뻗었다.

    노인이 서둘러 그녀에게 전화기를 넘겼다.

    “무슨 일이죠?”

    * * *

    -마지막 두 페이지를 수정하고 계속 연재를 이어나가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진짜, 그렇게 연재를 절대로 안할 것처럼 굴더니.

    관종도 아니고.

    -갑자기 왜 생각을 바꿨을까요?

    “모르죠. 워낙 변덕이 심한 사람이라.”

    물론 지로는 이즈미가 여기로 전화를 걸었다는 건 모른다. 그리고 솔직히 그 때문에 생각을 바꿨다는 증거도 없고.

    내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그쪽 담당하시는 분도 힘들겠네요.”

    내 말에 지로가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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