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45화 (345/425)

몰락한 작은집 (4)

그나저나 공무원인데 자신을 밝히는 건 곤란하더라.

그런 공무원이 있었나?

하기야, 내가 공무원 전문가도 아니고.

그런 게 있다면 있는 거겠지.

물론 이 사람이 그런 공무원이 정말로 맞는다면 말이다.

좀 뜬금없어서 사기꾼 같은 느낌이라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본인을 밝힐 수 없는 공무원 나리께서 갑자기 무슨 일이슈? 나라일? 암행어사 비슷한 거요?”

점박이가 자신의 점을 긁적이며 낄낄거렸다.

이 인간도 나랑 비슷하게 느낀 모양이다.

그래도 대놓고 저렇게 빈정대는 건 좀.

그런데 저 양반은 그런 말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아, 저기. 이번 일을 중재하려고요.”

그렇게 말하며 아직 흐르는 이마의 땀을 흰 수건으로 다시 닦아냈다.

그러니까 한여름에 정장을 왜 입고 있는 건지.

저러니 미친놈 취급받아도 할 수 없는 거고.

그나저나 중재라니.

“중재? 무슨 중재?”

“그러니까, 그 채무에 대한 겁니다.”

채무라는 말에 실실 웃던 점박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채무? 설마 우리가 받아야 할 2천만 원에 대한 채무 말이요?”

“네. 정확히는 천 구백 팔십 이 만원이죠.”

점박이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 사나워졌다.

“우리 얘기 엿들었어?”

“네. 본의 아니게요.”

그렇게 말하며 뿔테안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사납게 변해있던 점박이가 잠시 동안 그를 노려보다 곧 입을 열었다.

“그럼, 그쪽이 그 빚 갚아주겠다는 거요? 그럼 우리야 편해서 좋긴 하지만. 그나저나 오늘은 대신 내주겠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그 양반 진짜 복 받았네, 복 받았어.”

그렇게 말하며 다시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뿔테안경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제 말씀을 잘못 이해하신 모양인데,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저 중재만 할 겁니다.”

그 말에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한 점박이가 그를 황당한 눈으로 봤다가 다시 우리 쪽을 돌아본다.

혹시 아는 사람이 아니냐고 묻는 듯한 그런 눈빛으로.

점박이의 시선을 받은 실버가 멀뚱거리며 나를 돌아봤다.

나야 당연히 처음 봤으니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점박이가 우리들의 모습을 보다가 다시 뿔테안경에게 말했다.

“쉽게 하자고, 그러니까 어떻게 중재를 하겠다는 거요? 설마, 대충 넘어가자고 말하는 건 아닐 테지?”

“아뇨. 조사하고 정리한 자료를 가지고 왔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메고 있던 가죽가방을 열어 안쪽을 뒤적거렸다.

조사, 정리?

갑자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네.

뭐지?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한 이상한 이 남자를 그저 우리는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도대체 정체가 뭘까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저 사람이 지금 뭘 하려는 것인지 묘한 호기심도 생긴 것이다.

점박이나 실버도 표정 보니까 마찬가지인 것 같고.

아무튼 뿔테안경이 자신의 가죽가방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더니 나와 실버, 그리고 점박이에게 나눠준다.

“자, 여기 한부 받으시고. 그쪽 분들도 한부씩.”

손가락에 침까지 발라가며 열심히 나눠준 종이를 받아들면서도 얼떨떨한 기분이다.

뭔가 회사에서 회의라도 하는 기분인데, 이거.

그렇게 황당한 기분으로 받아든 종이를 내려다봤다.

세장으로 된 A4용지인데, 그 안에는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가로등이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밤이라 그런지 글자를 읽기엔 부족한 빛이다.

그래도 대충은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때 점박이가 짜증 섞인 투로 뿔테안경에게 말했다.

“저기, 중재고 뭐고 다 좋은데. 어두운 곳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그보다 무슨 내용인지 어렵네. 그냥 쉽게 설명해 보쇼.”

점박이의 다그침에 뿔테안경이 머리를 끄덕였다.

“네, 대충 설명 드리자면, 이 채무가 실은 사기에 의한 것이니만큼 무효라는 뜻입니다.”

사기? 무효?

이게 뭔 소리야?

나랑 실버가 놀란 눈으로 뿔테안경을 봤다가 다시 점박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점박이도 뿔테안경의 말에 화들짝 놀라더니 우리를 한번 힐끔하고는 다시 뿔테안경을 돌아보며 버럭 소리쳤다.

“야, 이 씨발! 뭔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사기? 도대체 뭘 근거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데!”

점박이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뿔테안경을 노려봤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있던 덩치들도 뿔테안경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보통이라면 그런 상황에선 저 뿔테 안경이 잔뜩 쫄아서 찌그러져야하는 게 정상일 텐데, 어쩐 일인지 전혀 주눅 든 표정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주변에 전혀 사람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근거는 거기 종이에 자세히 적혀있습니다. 두 번째 페이지를 보시면 제가 정리한 자료가······.”

“난 그런 거 모르겠고, 이딴 걸 들이밀며 하는 말도 짜증나거든.”

점박이가 그렇게 말하며 종이를 거칠게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바닥에 툭 던져버렸다.

그 모습을 본 뿔테안경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힘들게 만든 건데. 또 드리고 싶지만, 더 없어요.”

“필요 없어!”

“그러면 그쪽 분에겐 설명하기가 힘든데요.”

“됐다니까!”

그렇게 버럭 소리친 점박이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덧붙였다.

“당신 진짜 정체가 뭐야? 공무원은 아니지? 흥신소에서 나온 거야?”

“저 공무원 맞대니까요.”

“아니잖아! 어디 흥신소야? 어딘데?”

“공무원 맞는데.”

“증거를 대봐.”

“그러니까 그건 곤란하다고······.”

“거 봐, 아니니까 말 못하는 거지.”

그 말에 뿔테안경이 한숨을 푹 쉬었다.

“하, 어쩐지 홍길동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이 답답함은 진짜. 설명할 수도 없고.”

“뭐래는 거야? 갑자기 홍길동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그때 실버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러니까 무식하다는 소리나 듣지.”

그 말에 점박이가 실버를 돌아보며 버럭 했다.

“넌 왜 끼어들고 그래. 좀 빠져.”

“그래, 그래. 알았다.”

실버가 양손을 살짝 들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러자 다시 시선을 돌린 점박이가 뿔테안경에게 말했다.

“뭐, 됐고. 보나마나 허름한 흥신소에서 쓸데없는 일을 조사하고 있는 모양인데. 사지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싶으면 당장 꺼져. 우리 일에는 간섭 말고.”

“저기, 그건 곤란합니다. 이미 자료도 다 만들어졌고, 보고서도 올라간 상황이라.”

“코딱지만 한 흥신소에 보고는 개뿔.”

그렇게 말하며 낄낄거리던 점박이의 미간이 곧 깊게 패였다.

“뒈지고 싶지 않으면, 손때라고. 앙! 나니까 이렇게 신사적이지,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지금 너 반신불수가 되었을 거다.”

그렇게 말하는데도 뿔테안경은 전혀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는지, 자신의 말만 했다.

“그러니까, 왜 사기냐 하면요, 애초에 이찬용이라는 사람이 돈을 빌려 투자한 ‘용재기술’이라는 회사 자체가······.”

“죽고 싶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뿔테안경의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그때 실버가 날 보며 물었다.

“이찬용이 너희 작은아버지 성함 맞냐?”

“맞아.”

안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름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그 말을 들은 실버가 표정을 굳히더니 날선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저 양반 이야기 좀 더 들어보고 싶은데.”

그 말에 점박이가 실버를 노려봤다.

“상관없는 넌 빠져라. 그래도 한때 친구여서 여기까지는 받아주겠지만, 이 이상은 곤란해.”

“너, 나랑 친구인적 없잖아.”

“······.”

“아무튼, 난 더 듣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실버가 나서려했다. 그러자 저쪽의 험악한 인간들도 앞으로 나온다.

점박이 빼고 일곱이면 상대할 만 할 것 같기도 하고.

기분 상 두셋 정도는 나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가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나저나 저 뿔테안경이 중요한 실마리를 가져온 건 고맙긴 한데, 결국 이런 식으로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면 누군가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놈들 중에서 흉악한 무기라도 꺼낸다면, 결국 실버나 내가 크게 다칠 수도 있고.

젠장, 그냥 돈으로 해결하는 게 가장 간편하고 깔끔한 건데.

하지만, 분위기 상. 조용히 넘어가긴 힘들어 보이니, 뭐 할 수 없으려나?

그런데 묘하게 내 몸은 흥분중이다.

마치 어릴 적, 소풍가기 전날의 설렘 같은 느낌이랑 비슷하다.

나 진짜 변태 아니야?

그렇게 일촉즉발의 상황이 연출되려던 찰나.

뿔테안경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진짜. 이런 분위기에선 곤란한데. 그나저나 언제까지 구경들만 하실 겁니까?”

그 말에 여기 있는 모두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점박이도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둘러보다 곧 피식 웃었다.

“또 뭔 수작이야? 허허실실이냐?”

그 말에 실버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 너 그런 말도 아냐?”

“넌 좀 닥치고 있어.”

그런데 그때였다.

한쪽 어두운 골목에서 말끔한 검은 정장차림의 남자들 네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한 이목구비에 짧게 자른 반듯한 느낌의 젊은 남자들.

그중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최대한 일을 크게 벌이지는 말라고 명령받았습니다만.”

그 말에 뿔테안경이 다시 한 번 더 한숨을 푹 쉬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상황을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와요?”

“저희는 최대한······.”

“아이고, 네, 네. 알겠습니다요. 무슨 로봇도 아니고.”

갑자기 등장한 남자들과 뿔테안경의 대화를 멍하니 지켜보던 점박이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인상을 썼다.

“당신들은 뭐야!”

“방금 욕하려다가 쫄아서 ‘당신’으로 불렀지?”

실버가 낄낄거리며 말하자 점박이가 움찔했다.

“심봉이 넌 좀 닥치라고!”

쫀 거 맞네.

하기야, 저 검은 양복들 포스가 장난이 아니긴 하다.

나도 솔직히 저 중 한명이랑 붙으면 이길 자신도 없고.

“공무수행중입니다. 그 이상은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정중하게 말하자 점박이도 진짜 당황한 눈치다.

이 시절에 저런 복장에, 공무수행중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상당히 찝찝하겠지.

아니면 다행이지만, 만약 맞는데 싸웠다가는 쥐도 새로 모르게 골로 가는 사람이 많으니까.

아무튼 점박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눈치만 보고 있자, 그제야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은 뿔테안경이 입을 열었다.

그러다 머리를 갸웃거렸다.

“음, 그러니까······. 아까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었나요?”

“용재기술이요.”

내 말에 뿔테안경이 깜짝 놀라더니 싱긋 웃었다.

“아, 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 하고는 아까 하던 이야기를 다시 이었다.

“용재기술이라는 회사를 소개해준 사람과 사전에 판을 짠 뒤에 끌어들인 사건이고, 돈을 먹은 사람과 그쪽에선 벌써 돈을 나눠가진 상태니까요.”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하고 지랄들이야? 이 새끼들 모두 밟아!”

점박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덩치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러자 우리 앞으로 검은 양복들이 나섰다.

그래서 나랑 실버는 그냥 구경만 했다.

곧 이어진 타격 음과 비명의 조화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말, 진짜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정리가 되어버렸다.

진짜 싸움이 이렇게 싱겁게 끝날 수 있구나하는 것도 처음 알았다.

검은 양복들은 검은 표범처럼 일방적으로 사냥하는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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