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수프 (1)
수많은 길거리 시위로 여름을 뜨겁게 달구고 있던 때에도 화실은 여전히 원고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화실이야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으니, 더위에 허덕이는 사람은 없지만.
그때 박소미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인상을 썼다.
“아우, 코 매워. 근처에서 또 최루탄이라도 쏘는 건가?”
그 말에 김기철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엔 익숙해서 이 정도는 뭐, 괜찮던데요?”
“그래도 너무 시위가 많으니까 무서워.”
차미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임스 오빠는 또 시위 구경 갔다고 하던데.”
“진짜요?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안 그래도 길거리에서 ‘호헌 철폐’ 어쩌고 하는 사람들 근처에 있다가 하이바 쓰고 청바지 입은 경찰에게 잡힐 뻔 했데요.”
그 소리에 실버가 반사적으로 말을 툭 던졌다.
“어이구, 그 자식 정말! 하는 짓이 진짜 또라이라니까.”
“뭐, 워낙 잽싸서 경찰을 잘 따돌리긴 한 모양이더라고요.”
김기철의 말에 실버가 납득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그 자식이 쉽게 잡힐 놈은 아니지.”
“본인 말로는 고교 때 학교 100미터 1위 했다던데. 전국체전에도 나갈 뻔 했다고.”
박소미의 말에 실버가 콧방귀를 꼈다.
“넌 그 말을 믿냐? 그 자식 전에는 축구 명문 고등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들어왔다더니.”
난 그거 말고도 몇 개를 더 들었는데.
뭐 진실은 저 너머에 있겠지만.
“그나저나, 요즘 나라 전체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 걱정이에요.”
김기철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요즘엔 큰길 나가기 겁나거든. 사방에 방패를 든 경찰들 투성이라.”
“맞아요. 저 얼마 전에 길 걸어가는데 경찰이 신분증 검사를 하더라고요. 얼마나 쫄렸는데요. 말 잘못하면 칠 분위기라.”
그 말에 실버가 피식 거렸다.
“뭘, 그 정도로 그래? 난 늘 있는 일인데.”
당신은 험악하니까 그런 거지.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뭐, 본인은 선량하게 생겼다고 주장하니, 대놓고 말하지 못할 뿐이지만.
아무튼 정말 나라 전체가 흉흉한 분위기라는 건 분명하다.
내년에 있을 올림픽 때문에 방송은 늘 밝은 느낌인데.
나야 대충은 어떻게 세상이 돌아갈지 대충은 알고 있으니, 별반 걱정이 없긴 하지만, 어시들은 다르다.
만화이야기 같은 것을 하지 않으면 이런 불안한 정세 이야기를 하며 걱정하고 있다.
거기다 소련과 미국의 군비경쟁에 대한 뉴스를 보면, 정말 전 세계가 21세기엔 멸망하는 게 아닐까하는 대화도 종종하고 있다.
그나마 현실을 잊게 해주는 건 대부분 일본에 대한 소식들이다.
이렇게 정보가 원활하게 돌지 않는 시절엔 일본의 소식은 마치 먼 이 세계에 대한 소식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만큼 지금의 한국은 일본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고, 특히 문화에 대한 건 더 철저하다.
물론 어둠의 경로를 통해 만화나 음악이 종종 들어오는 모양이기는 하지만.
우리야 출판사와 연결되어 있던 탓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일본 정보를 많이 접하고 있으니 그나마 나은 셈이다.
거기다 어시들도 지로나 가끔 찾아오는 미치코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기도 한다.
아무튼 그런 잡다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이대봉이 화실에 들어왔다.
“모두 안녕! 아, 시원해.”
서둘러 들어오던 이대봉이 짧게 인사를 하고는 배를 드러내며 에어컨 앞으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티셔츠를 펄럭거리며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으어어, 천국이다. 천국. 으메, 시원한 거.”
“야, 냄새피우지 말고 씻어!”
실버가 버럭 했지만 이대봉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에어컨 앞에서 ‘워’하는 이상한 소리만 지르며 장난을 하고 있을 뿐이다.
“저 자식이.”
하지만 그런 실버의 반응과 달리 여자 어시들은 슬쩍 보이는 이대봉의 복근을 힐끔거리며 좋아라하는 눈치다.
하긴, 이대봉이 좀 가벼운 인간이긴 해도 얼굴이며 몸매는 연예인이라도 믿을 정도니까.
음, 부러우면 지는 거야.
그러고 보니 저 인간은 왜 연예계 쪽에 관심을 가지지 않지?
내가 살던 시절이야, 워낙 아이돌부터 시작해서 경쟁이 치열하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보이는데.
거기다 평소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몸매도 상당히 좋고.
어쩌면 그 많은 이야기 중 일부는 진실이 아닐까?
“윤환이 너, 내게 관심 있니?”
갑작스러운 이대봉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여자들처럼 이대봉의 복근을 보며 잡생각에 빠져 있었더니.
이대봉이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자 다른 어시들도 킥킥거리고 있다.
실버는 안쓰럽다는 표정이고.
낄낄거리던 이대봉이 다시 에어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머리를 천장 쪽으로 치켜들더니 갸웃 거렸다.
“아까도 들어오면서 듣긴 했는데, 위층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아, 그거? 공사 중이야.”
“공사? 왜?”
“얼마 전에 태풍 왔었잖아. 그거 땜에.”
내 말에 실버가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아, 셀마.”
“어.”
슈퍼태풍이라서 전국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끼쳤는데, 우리 화실 지붕도 상당히 손상될 정도였다. 하긴, 수리했다고는 해도 오래된 건물이니.
솔직히 좀 겁나기는 했다.
건물이 완전히 박살나는 줄 알았으니까.
“아 참, 아직 담당에게 못 물어봤는데, 이번에 데빌 바이러스랑 크래시 킹, 어떻게 됐어? 2대2잖아. 누가 최종 승자야?”
“데빌 바이러스가 이겼다고 하던데. 나도 아까 전화 받고 알았어.”
“어? 정말? 스토리 엄청 좋아서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대봉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갸웃한다.
“원고가 제때 연재되지 않았다고 하던데.”
“엉? 갑자기 그건 왜?”
“사정이야 난 모르지.”
내 말에 이대봉이 온 몸을 비비 꼬아대며 인상을 썼다.
“아, 아쉽겠다. 분명 이길 수 있었을 텐데.”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양 아쉬워한다.
“연재가 되었다면 아마도 그랬을 테지.”
“아휴, 갑작스런 휴재라니. 몸에 이상이라도 있었을까? 아니면······, 스토리가 생각나지 않았나?”
“스토리가 그렇게 흐름을 타면 보통은 그러진 않겠지. 그리고 듣기론 어시도 없던 모양이긴 하더라.”
“정말? 혼자서 그렸다고?”
“어. 잠도 별로 못 자고 그렸을 테니, 몸이 버티기 힘들었을 거야. 어쩌면 그것 때문에 이번에 연재가 펑크 났을지도 모르고.”
미네에게서 들은 이야기긴 하지만, 그녀도 얼핏 본거라 정확한 건 모른다고 했다.
아무튼, 대충 상황을 봐서는 과로가 원인 같긴 하지만.
“그럼, 크래시 킹, 그거 연재는 완전히 끝나는 건가?”
“뭐, 그렇지 않겠어? 아마 두세 편 안에 마무리를 지겠지.”
“모처럼 재미있는 만화였는데. 아쉽네.”
“그러게.”
그때 우리 이야기를 듣던 실버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승자는 그 복사녀야.”
그 말에 이대봉이 실버 쪽으로 돌아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 곧 연재가 끝나게 될 텐데, 승자라니. 너 어디 아프니?”
“흥, 스토리를 쓴다는 놈이 그런 것도 몰라? 당연히 걔가 승자지.”
“그러니까, 왜!”
“백만 년 고민해라. 멍청한 놈.”
그렇게 말하며 낄낄거렸다.
그 모습에 이대봉이 뿔이 났는지 씩씩거렸다.
“야, 너!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니까 대답 못하는 거 아니야?”
“그럴까.”
“맞잖아.”
“아닌데.”
“맞거든.”
그 말에 실버가 여유 있는 미소로 외면하고 그림에 열중했다.
그런 실버를 보며 씩씩 거린 이대봉이 날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생각해도 쟤 하는 말 헛소리 맞지?”
“글쎄?”
내 반응이 이외였는지 화들짝 놀라더니 울상을 짓는다.
“어? 너 지금 실버 편만 드는 거야?”
그 말에 실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저 자식, 억지는. 윤환이 쟤는 똑똑하니까, 내 말을 알아들은 거고.”
“뭐, 그럼 난 멍청하다는 거니?”
“뭐,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뭐? 야, 실버 너!”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른 이대봉이 나라 잃은 백성의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윤환아. 아니지? 내가 저 얕은 녀석의 생각 따위 읽을 수 없을 리 없잖아. 그렇지? 내가 저런 저능아보다 머리가 나쁜 거 아니지?”
이거, 이거 이 인간 또 선 넘는다.
역시나 그 말을 들은 실버가 무서운 살기를 피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이대봉이 벌떡 일어나며 거실 쪽으로 후다닥 나갔다. 그리고는 실버를 경계하며 말했다.
“저거 봐. 저 녀석은 그냥 과격, 무식. 그 자체라고! 저런 놈이 머리가 좋을 리가 없지. 머리도 근육으로 꽉 차있을 녀석.”
“뭐야!”
“나중에 다시 올게! 아일 비 빽!”
그렇게 터미네이터의 명대사를 날리며 쌩하니 밖으로 튀어나가 버린다.
저렇게 잽싸니 그 요란한 시위현장에서도 살아남았겠지.
아무튼, 실버가 말한 뜻을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이렇다.
‘연재 처는 잃었지만, 만화가적 능력은 얻었다.’
뭐, 이정도.
아무튼 내 생각도 사실은 비슷하다.
저 정도 능력을 얻었다면, 솔직히 다른 출판사가 가만 둘 리는 없으니까.
물론 크래시 킹이라는 만화의 판권문제가 있기는 하겠지만, 소년츠바사라는 소년지가 그다지 인지도가 없는 곳이라 그 문제는 잘 해결될 거라 생각된다.
그리고 미네에게 들은 바로는 이즈미와 관련이 있는 모양이라 그 문제에 대해선 소홀했을 수도 있고.
물론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런데 오후 늦게 이대봉이 다시 찾아왔다.
금방 돌아오겠다고는 했지만 평소처럼 며칠 후에나 오겠거니 했는데, 진짜였네.
“죽고 싶어서 돌아온 거냐?”
“아이, 왜 그렇게 또 화를 내고 그래. 그냥 남자답게 잊어. 알겠지?”
“누구 맘대로.”
“아이, 실버.”
“소름끼치는 짓 하면 죽는다.”
“넵!”
요란스럽게 부동자세까지 취하며 사과하고 있으니 실버도 어이가 없는지 쯧 혀만 차고 만다.
뭐 대부분 이런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가긴 하지만.
그런데 이대봉이 손에 뭔가를 들고 있다.
노트.
스토리 작가라고는 하지만, 노트를 들고 있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 힘든 인간이라 의외다.
“웬 노트야?”
“아, 이거? 너 한번 읽어볼래?”
“······콘티?”
“응.”
이대봉이 내민 노트를 펼쳤다.
중원요리왕의 새로운 에피소드인가 싶었는데, 전혀 다르다.
콘티엔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고 상황이 글로 표현되어 있어서, 정신이 좀 없기는 하지만, 중원 배경은 아니다.
거리의 식당이라든가, 로베르토 주방장이니, 서빙을 하는 발렌티나라는 여자가 등장을 하기도 한다.
뭐야 이건?
배경이 이탈리아인 요리만화인가?
분주한 식당의 모습을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뭐야, 이거?”
“아, 그거. 신작.”
“뭐, 읽어보니까, 그건 알겠는데. 배경이 이탈리아야?”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꼭 그런 건 아니라니. 그럼 어딘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뭘 얼렁뚱땅 넘어가는 거야.
배경이 중요하지 않다니.
“그럼 뭐가 중요한데?”
“아, 이거 판타지거든.”
“판타지? 배경이 현대유럽 같은데?”
현대배경이라면 해리포터 종류인가?
“맞아, 그건 맞는데. 주요 배경은 따로 있어?”
“따로?”
“어. 판타지 세상이 따로 등장해. 그리고 제목은 아직 가칭이긴 하지만, 드래곤 수프! 그러니까 판타지 요리 만화야.”
판타지 요리 만화?
드래곤······ 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