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39화 (339/425)

라이벌로 전직 (9)

소파에 앉아있던 이즈미가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구로다! 물!”

움찔한 노인이 허겁지겁 컵에 물을 담아서는 다가왔다.

그러자 이즈미가 그것을 빼앗듯 받아 입으로 가져가서는 확 들이부었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이 화들짝 놀랐다.

“아, 아가씨. 천천히.”

하지만, 그런 노인의 말에도 거칠게 물을 벌컥거리며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는 마치 술이라도 마신 양 ‘크아’하는 소리와 함께 컵을 거칠게 놓고는 곧장 입 주위를 닦아냈다.

요란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란 노인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아가씨, 여기 손수건이 있습니다. 깨끗하진 않지만 이거라도.”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며 노인이 내민 손수건을 받아 입을 닦았다.

“아가씨, 흥분은 피부에도 좋지 않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그 말에 머리를 끄덕인 이즈미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노인에게 손수건을 다시 건넸다.

표정이 진정된 것을 본 노인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안심한 표정으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이즈미는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기댄 채,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곧 생각에 잠겼다.

이내 빌딩 직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자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주간 루머라는 잡지의 여기자가 찾아왔었습니다.’

‘잡지 여기자? 뭣 때문에요?’

‘지하에 있는 만화가 분을 취재한다고 하더군요.’

‘취재?’

‘네. 그렇습니다.’

주간 루머.

처음 들어보는 잡지였다.

도대체 어떤 잡지인가 궁금해서 알아봤더니, 그저 그런 3류 잡지였다.

연예인의 어두운 사생활이나 캐는 그런 곳.

판매부수는 별로 높지 않았다.

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는 것도 납득이 되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의 기자가 뭐 하러 이름도 없는 만화가를 취재하러 온 것일까.

대중이 알고 있는 유명한 만화가를 놔두고.

언뜻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번엔 그 주간 루머라는 잡지사로 전화를 걸었다.

그쪽 직원들 말로는, 거기 여기자는 한명 뿐이었다.

이름은 미네 아츠코.

그녀와 이야기를 해보려 했지만 자리에 없었다.

물어보니 보통 잡지사에 붙어있는 경우가 없다는 모양이었다.

전문가들을 이용해 그녀에 대한 뒷조사를 했고, 가족이 조그마한 잡지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꽤나 영세한 잡지사였는데, 최근 출간된 책의 성공으로 꽤 성장했다고 한다.

무슨 책인지 알아봤더니, 최근 나왔던 베스트셀러 중 몇 개가 그곳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조사를 하면서 꽤나 흥미로운 점을 알아냈다.

출판사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 원동력이 된 소설의 원작이 바로 한국에서 출간되었다는 만화라는 점이었다.

물론 거기까지라면 특별한 것은 없다.

한국은 수준이 일본보다는 낮다고 해도 만화책이 상당히 많이 출간된다고 들었으니, 괜찮은 작품이 제법 있을 수는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 원작만화의 스토리 작가가 바로 텐겐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쯤 되면 그 여기자가 어떤 식으로든 텐겐, 써니 남매와 관계가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단정하기는 애매하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공교롭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건 그렇다고 예상을 한다면 납득이 되는 이야기다.

그제야 크래시 킹의 이야기가 급반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며 텐겐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에게 따지듯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전혀 모른다는 눈치였다. 그래서 순간 당황했다.

분명히 그가 개입을 했을 거라 예상했는데, 전혀 뜻밖의 반응이었으니까.

물론 텐겐이라는 사람에 대해 정확히는 못한다. 하지만,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특별히 거짓말을 할 정도로 대단한 일도 아니고.

전화를 끊고 났더니 혼란스러웠다.

텐겐이 토끼녀를 돕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가 아니라면 정말 토끼녀가 갑자기 그 짧은 사이에 성장이라도 했다는 것일까.

분명한건 미네라는 여자를 만나고 난 뒤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을 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상념에서 깨어난 그녀가 돌아보자 어느새 노인이 문을 열고 있다. 그리고는 문 너머에 있는 사람과 뭔가를 이야기하더니 다시 문을 닫았다.

노인이 이즈미에게 돌아와 말했다.

“아가씨. 모시고 왔답니다. 밖에서 기다리라고 할까요?”

노인의 말에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들여보내세요.”

“알겠습니다.”

노인이 문을 열어 뭔가를 이야기하자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며 도도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 들어볼 얘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에 사람을 시켜 찾으면 데려오라고 시키긴 했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여자가 곧 이즈미를 발견하고는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저에게 용무가 있으시다고요?”

여자가 웃음을 머금은 채로 물었다.

보통은 이런 집에 불려오면 위축되는데 이 여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눈치였다.

직업의 특성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신이 우리 빌딩 지하에 찾아왔다는 그 주간지 여기자예요?”

“주간 루머의 미네 아츠코예요. 반가워요, 나카야 씨.”

미네라고 자신을 밝힌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즈미는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은 채로 그녀가 내민 손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무안해진 미네가 손을 거두어들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손, 씻었는데.”

“역시 날 잘 알고 있네요.”

머리를 긁적인 이즈미가 이즈미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표면을 쓸면서 대답했다.

“뭐, 유명인이시잖아요. 알고 있는 게 당연하죠.”

“별로 외부활동을 하지 않아서 그쪽이 알만큼 크게 유명하지는 않는데.”

이즈미의 말에 미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장난하듯이 까닥거렸다.

“물론, 일반 연예부 기자라면 그렇죠. 하지만, 전 뭐 잡식이니까.”

이즈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잡식?”

“잡다한 걸 다룬다는 뜻이에요. 이거저것 관심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가리지 않고요. 킁킁, 와구와구.”

돼지의 흉내라도 내는 것인지 코를 킁킁거리며 허겁지겁 먹는 듯한 시늉을 했다.

“표현이 좀 저속하네요.”

이즈미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말하자 이내 그만둔 미네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소파 등받이에 양팔을 걸쳤다.

“아, 그런가요? 죄송하네요.”

그렇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전혀 죄송한 얼굴은 아니었다.

이즈미는 그녀가 첫 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으니 용건부터 물었다.

“왜 만났던 거예요?”

다짜고짜 질문을 던지자 미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누구를 말인가요?”

“알면서 시치미 떼지 말아요.”

“모르겠는데.”

능청맞은 미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크래시 킹을 그린 만화가 말이에요. 걔, 만나려고 갔다면서요.”

미네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머리를 과하게 끄덕였다.

“아, 취재차 갔던 그거 말이군요. 뭐, 그런 목적으로 가긴 했는데, 결과는 실패······.”

“취재? 설마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요?”

“어머, 기자가 만화가를 취재하는 게 이상한가요? 물론 전문 분야는 다르지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전 잡식이라고······.”

“그런 3류를 취재할 리가 없잖아! 날 바보로 알아요?”

“······.”

미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날카로운 이즈미의 시선을 피하려는지 곧장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그 모습에 이즈미가 낮게 심호흡을 하고는 곧 스스로를 진정시키더니 다시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무슨 일로 갔었어요?”

그런 그녀의 말에 미네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 저도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멈칫한 이즈미가 미네를 쏘아보며 물었다.

“뭐죠? 말해 봐요. 돈이라면······.”

“인터뷰요.”

“······네?”

“제가 명색이 기자인데,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미네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즈미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난 인터뷰는 안하는데.”

그 말에 미련이 없다는 듯 몸을 휙 돌렸다.

“그런가요? 그럼 뭐 할 수 없죠. 저도 그냥 돌아가겠어요. 아참, 아까 돌아갈 때도 태워주신다고 했는데.”

“좋아요. 뭐가 궁금하죠?”

그 말에 미네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돌아서며 싱긋 웃었다.

“뭐, 간단해요. 왜 만화를 그리게 되었는지 부터······, 크래시 킹의 작가인 카미야 아키 씨와는 어떤 사이인지. 언제부터 알고 지냈는지······.”

그 말에 이즈미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죠?”

“많이는 아니구요. 그냥 뭐 화실을 마련해 줄 만큼 친분이 있다? 그 정도?”

“······.”

이즈미가 쏘아보자 미네가 몸을 뒤로 쭉 빼며 말했다.

“그렇게 노려보시면 무서운데. 뭐 그럼 카미야 씨와의 관계부분은 빼고. 어때요?”

“······.”

“저희 독자들은 두 사람의 관계 따위엔 관심이 없거든요. 제 개인적인 관심일 뿐이라 기사를 낼 생각도 없고.”

“그 부분을 뺀다면 괜찮아요.”

“어머, 정말요?”

미네가 기뻐하며 가방에서 카메라와 수첩을 꺼냈다.

“사진을 찍을 셈인가요?”

“뭐, 얼굴을 곤란하시면 얼굴만 빼고 찍을게요.”

“······.”

“약속해요. 정말요.”

“······좋아요.”

그렇게 대답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뭔가 모르지만 여기자 잔머리에 말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간단한 인터뷰를 약속해주고 내용을 듣는 게 우선이었다.

“이제 말해 봐요. 도대체 왜 갔는지.”

* * *

“뭐? 그런 걸 보냈어?”

깜짝 놀라서 물었더니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 둘의 대결이 흥미로웠기로서니 미네에게 그런 부탁이라니.

그보다 그런 그림 한 장만으로 그 여자가 저렇게 전투력이 올라간 게 더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선희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반응했다는 것도 특이하고.

어쩌면 선희의 만화를 베꼈던 진짜 이유가 선망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땐 우리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으니 그렇다고 단정하긴 힘들다.

뭐가 되었건, 선희의 의도는 먹혔고, 둘의 싸움은 더욱 흥미진진해졌다.

아무튼 비밀이라더니, 내게는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니까 고맙기는 하다.

그런데 선희가 소년지를 내게 내밀었다.

뭐가 했는데, 소년츠바사다.

“왜?”

“작가 코멘트가 있는 마지막 장.”

“거기 뭐가 있어?”

“읽어봐.”

여기에 뭐가 적혔다고 그러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글들을 살펴보는데, 거기 미가미 에이코라는 이름이 보인다.

미가미 에이코는 필명이라고 했었지?

아무튼 거기에 적힌 작가 코멘트를 살펴봤다.

응?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라이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거 너한테 쓴 거야?”

내 물음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

이거야 원.

머리를 긁적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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