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30화 (330/425)

세상은 넓고 실력자는 많다 (8)

커다란 고급 세단의 뒷좌석에 앉아있는 이즈미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그런 그녀를 운전석에서 힐끔거리던 노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제 그만 출발 할까요?”

“······.”

“아가씨.”

“아직 출발하지 말아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노인이 다시 시선을 앞으로 가져갔다.

이즈미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둔 채로 오른 손 엄지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마다 가끔 저렇게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는 그녀였지만, 요 몇 년간은 하지 않았던 습관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곧 이채가 띄었다.

후카미의 집에서 나오는 두 남매의 모습을 본 것이다.

텐겐과 써니.

방금 후카미의 집에서 굴욕을 당했던 것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써니를 볼 때마자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 어쩌면 평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도 들었다.

저 두 남매가 등장한 이후로 늘 조급한 마음이 든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밖으로 나왔던 텐겐의 시선이 그녀가 타고 있던 차에 와서 닿았다.

그도 이 차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그는 시선을 외면하고 써니와 함께 도로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노인에게 말했다.

“구로다.”

“네, 아가씨.”

“저 사람들 옆으로 살짝 붙어 봐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노인이 차를 두 사람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몰아갔다. 그리고는 그들 근처로 다가가며 걸음속도에 맞췄다.

갑자기 차가 다가와서 같은 속도로 움직이자 신경 쓰였는지 텐겐과 써니가 돌아본다.

그때 뒷좌석의 이즈미가 차창을 내렸다.

“이봐요.”

써니는 아까 자신이 가지고 갔던 양과자를 아직 손에 들고 우물우물 거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더 짜증이 치밀었다.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수제 양과점에서 따로 주문을 한 고급과자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마치 동네 구멍가게에 있는 과자들처럼 먹어대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왜요?”

텐겐이 묻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즈미가 다시 시선을 그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툭 던지듯 말했다.

“얘기 좀 해요.”

“하세요.”

“이렇게 말고요.”

“긴 얘기라면 사양입니다.”

“왜요?”

“할 말이 없으니까.”

톡톡 쏘는 그의 말투가 거슬리지만 그렇다고 성질을 부리면 더 얘기를 듣지 못하게 된다.

이즈미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럼 차에 탈래요?”

그 말에 텐겐이 차를 슬쩍 내려다본다.

써니도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차를 바라본다.

그런 모습을 보며 이즈미가 피식 웃었다.

좋은 차는 알아보는군.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어디까지 가는데요? 도쿄 외곽이라도 괜찮아요. 호텔인가요?”

“키도······ 선생님 댁이요.”

“아. 그럼 가깝네요. 어서 타요.”

나름 웃음까지 지어보이며 말하자 텐겐이 써니를 돌아본다.

어떻게 할까? 뭐 그런 표정으로.

그러자 써니는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국어라서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곧 텐겐이 이즈미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뭐, 그렇다면 저희도 고맙죠.”

그렇게 말하자 운전석에 있던 노인이 서둘러 내려서는 뒷문을 열었다.

이즈미는 뒷좌석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때 선희가 먼저 차에 타려하자 이즈미가 말했다.

“당신부터요.”

“네?”

“당신과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당신부터 타라고요.”

“이래도 대화는 되는데요?”

그렇게 말하더니 써니가 먼저 탄다.

써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오더니 중앙에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자 이내 텐겐이 들어와 앉았다.

문이 닫히고 나자 텐겐이 웃으며 말했다.

“창문 쪽이 좋거든요. 양보해 줘서 고맙다.”

그러자 써니가 머리를 끄덕였다.

“구로다. 출발해요.”

“네, 아가씨.”

차가 출발하자마자 이즈미가 텐겐 쪽으로 돌아봤다.

그런데 중앙에 앉아 계속 과자를 우물거리며 있는 써니가 거슬린다.

특별히 부스러기가 날리는 것도 아니지만, 신경이 쓰이는지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곧 표정을 관리하고는 써니 너머에 있는 텐겐에게 물었다.

“진짜 어떻게 후카미 선생님을 알게 되었어요?”

“아는 사람 소개로요.”

“아는 사람 누구요?”

“그냥 아는 사람이요. 그런데 대화를 하자더니 또 취조, 아니지 사전청취를 하시네.”

“······.”

“계속 이럴 거면 내려주세요.”

“아니에요. 그냥 대화 맞아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표정을 관리했다.

그런 이즈미를 슬쩍 힐끔거린 텐겐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어떻게 알았는지가 왜 그렇게 궁금한데요?”

“그, 그냥. 궁금해서요. 후카미 선생님이랑 친분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저는 뭐 좀 특별한 케이스고.”

“특별해요?”

“네. 후카미 선생님이 직접 찾아오셨거든요. 저한테. 써니 씨처럼 굳이 힘들게 찾아가지는 않았다고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웃었다.

그렇지만 텐겐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별로 힘들게 찾아간 건 아닌데요.”

그러자 이즈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직접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찾아온 거잖아요.”

“그야 그렇죠.”

“그게 힘들다는 거지.”

“그게 왜 힘들어요?”

“그러니까······. 관둬요. 이런 대화.”

이즈미가 그렇게 말하며 인상을 썼다.

그 모습을 보던 텐겐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시선을 외면했다. 오히려 곁에서 여전히 과자를 우물거리며 먹던 써니가 그런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런 써니에게 이즈미가 물었다.

“써니 씨에겐 뭐라고 하시던가요?”

“잘했어.”

“뭐요?”

“잘했어, 라고만.”

“······.”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남매라고 생각했을 때 노인이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그렇게 말하며 운전석에서 내리려하자 텐겐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앉아계세요.”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는 문들 닫기 전에 텐겐과 써니가 말했다.

“태워줘서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문들 닫았다.

그 둘을 찌푸린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그때 노인이 말했다.

“아가씨도 내리실 겁니까?”

“아니에요. 그냥 출발해요. 집으로.”

“네, 알겠습니다.”

* * *

“어? 저차, 저거. 그 건방진 아가씨 아니야?”

키도가 우리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 모양이다.

“내 말 맞지? 그 여자.”

“어. 맞아.”

“어떻게 된 거야?”

“어떻긴, 후카미 씨 집에서 만났지.”

내 말에 키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후카미? 써니 그림 도와준다는 그 사람?”

“어.”

“그 사람이랑 저 여자랑 애인사이야?”

“뭘 앞서나가고 그래? 애인은 무슨.”

그렇게 말하며 대충 사정을 설명해줬다. 그랬더니 키도가 인상을 쓰더니 혀를 찼다.

“쯧, 또 그런 관계가 있었군. 아무튼 저 여자는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구만.”

“그래도 뭐, 오늘은 편하게 왔으니까.”

“야, 차라리 전화를 하지. 그럼 내가 데리러 갔을 텐데.”

“그냥 원고나 하셔. 어시 잡을 생각하지 마시고.”

“누가 들으면 악덕 만화가인줄 알겠다.”

“악덕 맞지. 그 정도면.”

그 말에 키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그래도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 예전엔 진짜 도제나 다름없었어. 욕도 많이 먹고, 돈도 못 받고.”

“그렇게 말하는 게 악덕 만화가라는 거지.”

“너는 말을 해도.”

그렇게 말하다 선희를 돌아봤다.

선희가 계속 뭔가를 먹고 있으니, 그게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맛있냐?”

“응.”

“이 오라비도 하나 줘. 맛 좀 보게.”

그 말에 선희가 손에 쥐고 있던 마지막 과자를 키도에게 내밀었다.

“어디, 나도 맛을······.”

그런데 그때였다.

양손 가득히 뭔가를 들고 오던 니시다와 마주쳤다.

그런 그가 내게 인사를 하다가 그런 키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키도 선생님은 써니 선생님이 달랑 하나 가지고 있는 걸 뺏어 드십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사드릴게요. 그러니까 그런 짓 좀 하지 마세요.”

그 말에 키도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

*

며칠 후.

다시 가이낙스를 찾아가 타마노를 만났다.

그에게 후카미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더니 꽤 놀랐다.

“이즈미가 찾아왔었어요?”

“네.”

“음, 역시.”

타마노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다는 듯.

그런 그를 보며 내가 물었다.

“나카야 씨를 아세요?”

“그럼요. 제가 처음 후카미 씨와 알게 되었을 때 이즈미는 이미 후카미 씨에게 그림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거든요. 뭐, 친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그런 여자랑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듣기론, 이즈미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해서는 천재적이라 집에서 영재교육을 시키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러다가 우연히 후카미 씨와 알게 된 거고.”

특별히 어떤 분야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목표가 없었던 시절에 이즈미는 후카미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니까 수많은 그림 선생 중 한명이었던 거고.

“이즈미는 단번에 그림을 잘 그려내는데다가 감각도 뛰어났어요. 그래서 후카미 씨의 관심도 많이 받았고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배울게 없다며 그만두었던 모양이에요.”

“배울게 없어요?”

“네. 후카미 씨가 몇 가지 부분은 좀 더 다듬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너무 지루했던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만 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외국의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를 초빙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아.”

타마노의 말만으로는 자세한 사정을 알기는 어렵지만, 대충은 알 것 같다.

아직 제대로 다 익히기 전에 갈아탄 게 문제였구만.

“소년매거진에서 ‘사막의 창’ 연재할 때 후카미 씨가 그걸 봤던 모양이에요. 그리고는 자신이 가르친 것과 다르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요. 아무튼 그 일이 있고부터 후카미 씨는 외부와 단절하고 살기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기대를 많이 했었기 때문에 충격도 컸던 것 같고.”

“집이 깨끗하다고 놀라던데.”

“집은 원래 지저분했어요. 그 때문에 이즈미가 청소업체를 매일 불렀거든요.”

“우리가 두 번째로 갔을 땐 후카미 씨가 청소를 제대로 하셨던데.”

“정말이요? 후카미 씨가 직접이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깨끗하던데요.”

“하긴, 후카미 씨가 청소업체를 부를 리는 없으니. 그나저나 놀랐네요. 후카미 씨가 직접 대청소를 하다니.”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그럼요. 후카미는 자신의 방을 제외하고는 절대 청소하는 법이 없거든요.”

“······.”

“그런데 청소를, 그것도 깨끗하게 하셨다니. 어지간히도 써니 씨가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에요. 하긴, 이틀 만에 더 가르칠 게 없다고 하셨다니,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둘째 날, 후카미가 그랬었다.

‘더 이상 미련은 없어요. 이런 친구를 만났으니까.’

어쩌면 그는 선희를 통해 자신이 원하던 바를 다 이뤘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데, 타마노가 다시 말했다.

“앞으로 써니 선생님의 만화가 더 기대되네요.”

1